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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의문의 소년 (53/120)

53. 의문의 소년

“건국일을 맞아 헤렌 축제를…….”

축제는 황제의 긴긴 연설로 시작되었다. 대강 건국일을 기리는 내용이었으나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건 오직 하나, 황제의 마지막 말.

회귀 전에 겪었던 대로라면, 황제는 연설의 막바지에 ‘축제를 즐기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카렌을 노리는 수십 명의 자객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폭탄 제거에 성공했더라도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인을 노려보았다.

내가 홀로 속을 태우는 그 순간에도, 아인은 제국의 이인자다운 면모로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이 큰일을 계획한 사람답지 않게 그의 얼굴엔 여유가 번지고 있었다.

‘오늘은 당신 뜻대로는 안 될 거예요. 황녀님도 황자님도 내가 지킬 거니까.’

슬며시 카렌의 손을 잡자,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쑥스러운 것인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미는 게 보였다.

“카렌이랑 손잡고 싶었어?”

“혹시 싫은 거면…….”

“좋아, 마침 손이 심심하던 참이니 잡아줄게.”

혹시 싫어할까 봐 손을 슬쩍 빼려는데, 그녀가 놓칠세라 얼른 내 손을 붙들었다. 제레미의 동생이라 그런지, 하는 행동이 제레미 만큼이나 귀여웠다.

‘이렇게 귀여운 동생을 눈앞에서 잃었다니…… 얼마나 슬펐을까.’

착잡한 심정을 느끼며 단상 위에 선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만개한 꽃과 같은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카렌이 죽었던 당시, 제레미는 백치 연기도 잊고 슬픔을 토해냈었다. 폭탄이 터지는 광장에서 죽은 카렌을 품에 안은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번엔 꼭 비극을 막을 거야.’

그리고 잠시 후, 운명을 결정지을 순간이 다가왔다.

“엘키시에스 제국민들이여, 헤렌 축제를 즐기시오!”

황제의 마지막 말이 끝난 그 순간, 내 예상대로 사방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나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옆에 있던 카렌을 끌어당겼다.

카캉!

그녀를 내 품으로 안자마자, 예리한 칼날이 바로 옆을 스쳤다.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바닥이 처참히 갈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카렌이 발을 디디고 있던 곳이었다.

“꺄아악!”

놀란 카렌이 비명을 지르고, 뒤이어 검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자객이다!”

“폐하를 보호하라!”

목표물이 황녀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함인지, 자객들은 닥치는 대로 기사들을 공격하며 그들을 교란시켰다.

덕분에 황제의 주변으로 기사들이 몰리는 현상이 생겨버렸다. 카렌의 주위로 빈틈이 생겨나고, 오히려 자객들에게 길을 터준 꼴이 되어버렸다.

여러 명의 자객이 연이어 날아오른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꺄아!”

나는 비명을 지르는 카렌을 끌어안으며 단검을 들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자객의 검을 쳐내고, 곧바로 뒤를 돌아 후방을 급습한 자객의 배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검에 맞은 자객이 쓰러지자마자 어딘가에서 또 다른 자객이 튀어나왔다. 그는 날렵하게 검을 내지르며 카렌을 노리고 있었다.

카렌을 보호하며 단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받아낸 후 곧바로 급습할 생각이었으나, 자객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니, 내가 느린 건가?’

머리로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겨우겨우 자객의 공격을 흘려냈으나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자객은 내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 몸이 휘청한 순간을 노려, 자객의 검이 정확히 카렌을 향했다.

“꺄아악!”

이런, 안돼!

검을 막기 위해 할 수 없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상처를 입고 말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 들이 닥칠 고통에 대비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 곧장 검을 내리치려던 자객이 몸을 우뚝 멈춰 섰다. 당황한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자객이 자신의 명치 쪽으로 손을 올렸다.

‘왜 저러지? 명치 쪽은 맹세의 보석이 있는 자리인데.’

눈을 깜빡이며 자객을 쳐다보자 그도 당황한 듯 나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건 내게 기회였다.

‘아싸, 빈틈!’

곧장 단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내 검이 닫기도 전에 자객이 무릎을 털썩 꿇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응? 나는 손도 안 댔는데?’

멍하니 바닥에 쓰러진 자객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맹세의 보석을 통해 스며든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힐.]

쏟아지는 검의 마찰음을 뚫고 들려온 아인의 목소리는 열이 받을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스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 아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선득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차갑게 빛나는 금안이 카렌을 향했다.

[카렌을 놓고, 이리로 와.]

오라고? 지금? 이건 회귀 전에 없던 일이라 나는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회귀 전에 그는 볼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유유히 광장을 떠났었다. 카렌이야 자객들이 알아서 할 테고, 폭탄도 미리 심어두었으니 그가 계속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오라고 말하는 거지? 무슨 꿍꿍이야?

그의 의중을 파헤치는 데 집중한 사이, 또다시 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힐. 어서 그곳에서 나와.]

어쩐지 아인의 목소리가 조급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쾅! 쾅!

연발로 들려오는 폭탄 소리. 그 뒤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공포에 질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이.

“아아악-!”

뒤를 돌아보니 광장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 틈으로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모래 먼지와 화염이 빚어낸 어둠이 하늘을 온통 까맣게 뒤덮었다.

‘폭탄? 폭탄이라고? 내가 분명 다 제거했는데 어째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한 강한 충격을 느꼈다.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멍하니 넋을 빼고 있던 그때 갑자기 바닥이 갈라졌다. 곧이어 발아래로 시커먼 구덩이가 생겨났다.

“윽!”

구덩이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 한 손으론 카렌을 잡고, 다른 한 손은 필사적으로 바닥을 붙잡았다. 울퉁불퉁한 노면에 긁혀 손바닥을 찢을 듯한 고통이 스몄다.

하지만 발아래로 펼쳐진 시커먼 구덩이를 보고 있자니, 멋대로 손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황녀님! 어서 제 어깨를 밟고 위로 올라가세요!”

“어, 언니…….”

“어서요!”

카렌이 울음을 터뜨리며 엉금엉금 위로 기어 올라갔다. 겨우겨우 지상으로 올라간 카렌이 곧장 내게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다.

“언니도 얼른 올라와!”

나도 그러고 싶었다. 저런 시커먼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힘없는 카렌을 붙잡고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그러면 카렌까지 떨어지고 말 테니.

“저는 혼자서도 올라갈 수 있으니 황녀님은 먼저 가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가 혼자서 올라갈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았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까부터 몸 상태가 이상했다. 속도가 느려지는가 하면, 지금은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를 않았다. 아주 기운이 빠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구덩이에서 혼자 올라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몸이 점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를 본 카렌이 무작정 내 팔을 끌어당겼다.

“어, 언니이!”

“황녀님, 어서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가세요! 여긴 위험해요!”

“아, 안돼! 언니만 두고 혼자 못 가. 흐윽.”

아아, 이러다가 자객이 카렌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지? 부디 자욱한 먼지에 가려 아무도 카렌을 발견하지 못하길, 속으로 바라고 있던 그때였다.

쾅-! 쾅!

다시금 폭탄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땅이 크게 진동함과 동시에 손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러다간…… 황녀님까지 떨어지겠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으므로.

“황녀님, 제 말 잘 들어요. 좌측으로 쭉 달리면 황후 폐하와 기사들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윽!”

“어, 언니이!”

말하는 그 순간에도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젠 손가락 끝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저는 몸이 튼튼해서 여기서 떨어져도 멀쩡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쾅!

또다시 울려 퍼진 폭발음과 함께 손이 완전히 미끄러졌다. 아찔한 감각과 함께 칠흑같이 검은 구덩이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갔다.

‘젠장…… 여기서 죽으면 곤란한데. 아직 할 일이 많단 말이야…….’

죽음이 코앞에 닿았다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게다가 이번 죽음은 저번보다 더 못하지 않은가. 저번에 죽을 땐 울 황자님 품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황자님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다가올 죽음 앞에서 결코 이뤄지지 않을 소원을 빌던 그때였다.

후웅-.

솜털처럼 푹신한 바람이 내 몸을 끌어올렸다. 축 처진 다리를, 땀에 젖은 등을, 그리고 힘없이 떨군 고개를 부드럽게 받쳤다. 바람은 나를 누군가에게 인도하고 있었다.

‘누가…… 나를 구해준 거지?’

이윽고 구덩이를 완전히 벗어난 나는 마법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그 사람의 정체를 채 파악하기도 전, 몸이 아래로 하강했다. 그 탓에 나는 누군가와 부딪히며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아고고…….”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은 게 어디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내 밑에 사람이 깔려 있는 게 보였다.

후다닥 몸을 떼자, 조그만 체구의 소년이 작게 기침을 했다.

‘어……? 잠깐만.’

병아리 솜털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은빛의 머리카락. 달처럼 하얀 얼굴 위로 자리한 맑고 커다란 눈망울…….

‘황자님……?’

제레미를 닮은 소년의 모습에 나는 다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너무 어린데? 이제 겨우 10살 정도 되었을까.’

황자님이 뭔가 마법을 쓴 건가 생각했지만, 이내 그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어려지는 마법이라니, 그런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마법사들을 포함해, 마법사를 거느릴 수 있는 권력자들까지 모두 젊은 모습으로 있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이 소년은 대체 누구지? 제레미를 닮은 다른 사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던 그때, 옆에 있던 카렌이 소년을 끌어안았다.

“히잉, 왜 이제 와. 무서웠잖아.”

카렌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소년에게 매달렸다. 소년은 그런 카렌의 등을 손으로 가만히 다독여주고 있었다. 뭐지? 카렌은 저 소년을 알고 있나?

“황녀님이랑 아는 사이예요?”

“당연하지, 이 사람은……!”

무언가를 말하려던 카렌이 우뚝 멈춰 섰다. 소년 쪽을 한 번 쳐다본 카렌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먼 친척인데…… 언니는 잘 모를 거야.”

아, 황족 중에 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제레미랑 닮은 거였어.

오늘 이곳엔 헤렌 축제를 위해 걸음한 황족들이 꽤 많았다. 이 소년 또한 그중 한 사람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그럼 방금 전 마법을 쓴 것도 이 소년인가?’

나를 구덩이에서 꺼내준 것은 분명 마법이었다. 황족 중에 유독 마법사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린 소년까지 마법을 사용할 줄 알다니…….

“혹시 방금 전 저를 구해준 게 당신인가요?”

물어보는 게 빠를 것 같아 허리를 숙여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년의 말간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스며 들었다.

‘헉…… 왜 울어?’

소년의 눈물에 당황했다. 어쩜 우는 모습까지 울 황자님을 꼭 빼닮아서, 내 심장에 크나큰 무리를 주고 있었다.

“어어, 왜, 왜 우세요?”

“아…….”

소년이 조그만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미약한 흔들림에 별빛을 뿌려놓은 듯한 은발이 아른거리는 빛을 발했다.

“방금 전에…… 나도 모르게 너무 놀라서.”

그가 눈물을 떨구며 내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볼을 간지럽히는 감각에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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