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사탕을 준 이유가 달콤하지 않다 (52/120)

52. 사탕을 준 이유가 달콤하지 않다

아인이 삐딱하게 고갤 기울였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느냐? 네 몸속에 잔재했던 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게 중요하지.”

아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하지? 나는 당신이 내 몸에 독을 남겼단 사실이 더 기가 막힌데?!

우리는 서로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결국 눈싸움에서 진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궁시렁거리는 걸로 서러움을 대신했다.

“……그걸 남겨두다니 진짜 치사해. 내가 죽었으면 어쩔 뻔했냐고.”

“똑바로 말해라, 힐.”

아인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갤 기울였다. 요즘 많이 너그러워지긴 했어도, 역시 제 앞에서 웅얼 웅얼거리는 모습은 봐주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 자가 치유란 것도 있지 않냐는 말입니다.”

“네 몸이 알아서 독을 치료했다……?”

“예, 스스로 낫지 않았으면 어떻게 독이 사라졌겠어요? 황태자님 말고 절 치료해줄 사람이 누가 또 있다고.”

다소. 아니, 많이 건방진 질문이었으나 아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신경을 쓰고 있는 곳은 아무래도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나밖에 없다니.”

핏빛을 머금은 입술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사냥을 마친 포식자처럼 충족한 미소였다.

“가엽구나.”

나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엽다니, 참나. 말이 그렇단 거지…… 정말 저밖에 없을까 봐? 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어?!

씩씩대며 그를 쳐다보자 아인이 스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그 사실이 기껍기도 하고.”

“…….”

나를 놀리는 건가?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노려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뭐 어떡해, 참아야지. 입안의 혀처럼 굴어도 모자랄 상황임을 떠올리며 화를 꾹 눌렀다.

씩씩댔다가, 체념했다가. 그런 내 모습이 웃긴지 아인이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후 적막한 공간을 메우던 아인의 웃음소리가 멎고.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일전에…… 카렌에게 독을 쓴 적이 있었다.”

“……?”

“유디트의 자리에…… 카렌의 어미가 앉아있는 모양새가 거슬려서.”

유디트는 폐궁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아인의 친모였다. 그녀의 이름을 읊조릴 때의 아인에게서 미약한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하루 만에 체내의 모든 독이 사라졌다. 지금의 너처럼.”

그때의 일은 나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 죽을 거라고 예상했던 카렌은 기적처럼 깨어났고 체내의 모든 독은 해독된 상태였다.

카렌은 10살 남짓한 소년이 자신을 치유해주었다고 일관되게 말했지만 황궁 내에 그런 어린 소년은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은 그 누구도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 채 시지부지 묻혔었다.

간간이 그 사건이 언급될 때마다 ‘아무래도 천사가 다녀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추측만이 농담처럼 사람들 사이를 맴돌았었다.

이미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뭐지? 카렌 때와 같이 내 몸의 독이 감쪽같이 사라져서?

“독을 흔적도 없이 제거할 수 있는 건 오직 마법사뿐이다. 그것도 꽤 출중한 실력을 갖춘. 하지만 카렌이 독을 먹었던 당시 마법사들 대부분이 북부에 지원을 나갔던 때라, 황궁 내엔 그만한 실력을 갖춘 자가 없었지.”

아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녀님을 치료해줄 만한 마법사가 없었다면…… 그럼 그때 황녀님을 치료해 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혹시 황자님이 황녀님의 독을 제거해주었을까?’

카렌이 죽어가고 있던 때, 제레미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살리려 애를 썼을 것이다. 어쩌면…… 카렌을 치료해준 천사는 우리 황자님일 지도 모르지. 그래, 그가 확실해.

속으로 확신하던 그때 아인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누가 카렌의 독을 제거해주었을까?”

그의 말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모른다고 대답하려는 그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레미일까.”

“……!”

설마 아인이 제레미를 유추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 탓에 놀란 감정을 얼굴에 고스란히 내비치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옭아맸다. 표정의 의미를 읽으려는 듯.

나는 굳었던 표정을 고치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황자님이라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내가 마법에 능하니…… 나와 피를 나눈 제레미도 마법에 재주를 가졌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

“하지만 황자님은 백치이지 않습니까.”

“아닐 수도 있지.”

“가능성이 작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황자님을 곁에서 지켜봐 왔지만 백치를 연기하는 거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의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군.”

“어째서요?”

“카렌의 독을 제거해주고, 어쩌면 네게 남은 독마저도 제거했을지 모를 그 마법사는 분명 황궁과 관련되어 있다. 어쩌면 황궁 내에 살고 있을지 모르지.”

그가 내뱉는 말들은 너무도 예리하고 정확해서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으면 제레미를 향한 의심이 깊어질 텐데.

회귀 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상황이라 도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사이에도, 아인의 추측은 좁혀지고 있었다.

“마법사란 사실을 숨긴 황궁 내부인. 만약 제레미가 백치 연기를 하는 게 확실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사람이 제레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간 아인의 의심이 더 깊어질 게 분명했다. 어쩌면 당장 제레미를 죽이고 오라고 명할 지도.

‘어떻게…… 어떻게 말해야 아인의 의심을 잠재울 수 있을까.’

아인의 입가에 떠오른 잔잔한 미소를 보며 몸을 긴장했다. 지금은 미소를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언제 사라질지 모를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만약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란 걸 확신하게 되면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그의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전에 막아야 했다.

나는 가슴이 터질듯한 긴장감을 감춘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하……하하하.”

그러곤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하하하하하.”

배를 잡고 웃어대다가 눈가에 비집고 나온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아인은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린 채 그런 나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 웃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난 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한 번쯤 황태자님의 추측이 틀렸을 때 이렇게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추측이 틀렸다……?”

“예, 황태자님의 추측에 순간 홀린 듯 고갤 끄덕일 뻔했지만, 잘 생각해보니 황태자님께서는 한 가지를 놓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제 독을 치유해준 사람이 황자님일 리가 없죠. 절대로.”

아인이 더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턱을 괬다. 신의 심판대 앞에 선 것마냥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다행히 떨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황태자님 말씀대로 황자님이 백치가 아니라면, 그분은 제가 황태자님이 심은 첩자란 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황자님이 저를 치료해줄 이유가 없죠. 독을 그대로 두면 몰라도.”

내 말에 아인의 표정은 놀란 기색 없이 고요했다. 이미 거기까지 다 추측한 사람처럼.

잠시간 말이 없던 아인은 내가 초조함에 지쳐갈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황자가 너를…….”

하지만 이내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인답지 않은 태도였다.

“아니다. 내가 괜한 생각을 했군.”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그가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만 가보거라, 힐.”

“예.”

갑자기 축객령을 내린 아인을 보며 참을 수 없는 찝찝함이 밀려들었지만 일단은 고갤 끄덕였다. 그의 곁에 있는다 해서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더 이상은 내가 못 버틸 것 같았다.

‘하아…….’

방을 나오자마자 긴장감이 탁 풀리며 다리가 힘없이 덜덜거렸다.

‘저렇게 보내주는 걸 보면…… 내가 잘 얘기한 거 맞겠지?’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솔직히 말해 10년 치 수명을 한 번에 다 까먹은 기분이었다.

* * *

힐레인이 황자궁으로 돌아간 후, 아인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힐레인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녀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다 끝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황자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면?”

어쩐지 힐레인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이게 무어라고.

하지만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듣고 있든 안 듣고 있든, 말을 뱉는 그 순간 기분이 몹시도 더러워지는 걸 보니.

아인이 창문에 걸린 석양에 시선을 두었다. 타오를 듯 뜨거운 붉은 빛이 금안에 스며들었으나,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 * *

‘드디어 오늘인가!’

어느덧 헤렌 축제 당일이 되었다. 나는 아침 해를 받으며 눈을 반짝 떴다. 옆을 보니 제레미는 아직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몸을 일으켰다. 제레미가 자고 있는 사이, 준비했던 것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위해서.

‘폭탄도 말끔히 제거했고, 황후 폐하한테 보고도 올렸고. 또 보자……. 아 맞다, 단검!’

하마터면 가장 중요한 걸 놓칠 뻔했다. 나는 침대 밑으로 허릴 숙여 주섬주섬 단검을 챙겼다.

‘이걸로 자객들을 다 쓸어버려야지.’

카렌을 향한 위협은 폭탄이 다가 아니었다. 잠시 후 광장에서 카렌을 죽이려 자객들이 덤벼들 예정이었다.

생각 같아선 도끼라도 하나 챙겨가고 싶었지만, 드레스에 도끼라니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드레스 밑으로 단검 하나를 숨기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정 안되면 그때 가서 보고 기사의 검을 뺏으면 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 시녀들이 방문을 두드렸다. 아직 시녀들이 활동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센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어쩐지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어 재빨리 대답을 해주었다.

“응, 들어와도 괜찮아.”

잠시 후 시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밀려 들어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았다.

“뭐, 뭐야?”

내 말에 센이 앞장서서 팔을 걷어붙였다. 그녀는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의 모습처럼 결의에 차 보였다.

“헤렌 축제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엉?”

잠시 후 나는 시녀들의 무지막지한 힘에 이끌려 침실을 나가야 했다. 울상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니, 고상하고 우아하게 제레미를 깨우고 있는 시종장이 보였다.

‘나도 좀 저렇게 다뤄주면 안 돼?’

어쩐지 제레미가 부러워지는 아침이었다.

* * *

고막이 울릴 정도의 함성 속에서 황실의 일원이 광장에 도착했다. 황제의 연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황족들은 임시로 준비한 막사에서 대기했다.

전용 막사로 들어온 나는 초조함을 느끼며 같은 자리를 뱅뱅 맴돌았다. 내가 카렌을 과연 잘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라도 카렌이 죽어, 제레미의 백치 연기가 탄로가 나진 않겠지?

쉬이 사그라들지않는 걱정에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루 대공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후 그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몇 주 전 독을 먹었던 사람답지 않게 말쑥한 모습이었다.

“몸은 괜찮아?”

“예, 말끔히 나았습니다.”

하긴, 누가 고쳐줬는데. 나는 2주 전 황실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이시스 대사제의 황궁 침입 사건이었다. 아마 대사제라는 직함이 없었다면 이시스는 무사히 풀려나지 못했을 것이다.

“형님은 괜찮고?”

“예, 그 직후 신성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루나는 다정한 사람…….”

“수작 걸지마, 자기.”

입구를 막은 루를 밀어내며 막사 안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왔다. 핑크색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들어온 그는 도베르였다.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도베르는 뜻밖에도 사탕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사탕도 꼭 저같이 핑크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먹을래?”

안 그래도 입이 심심했던 차라 사탕을 오물오물 입에 삼켰다. 냉큼 사탕을 집어 먹는 나를 멍하니 지켜보던 루가 도베르를 노려보았다.

“수작은 도베르 경께서 걸고 계십니다만?”

“아아, 질투 하지마. 대공 자기한테도 줄게.”

“필요 없…… 읍!”

도베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루의 입에 직접 사탕을 물려주었다. 그동안 둘이 많이 친해진 건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넉살 좋은 두 사람 때문에 꽤 유쾌한 대화가 오갔다. 잠시 후 휴식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루는 아쉬운 가득한 표정으로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대공을 뒤따라 나가던 도베르가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간 내 쪽을 쳐다보았다.

“미안.”

“뭐가요?”

내 물음에 도베르는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미소가 어쩐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막사 밖으로 사라지는 도베르를 보며 입안의 사탕을 굴렸다. 진한 단맛에 혀가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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