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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치료 (51/120)

51. 치료

제레미가 손가락 끝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 주변으로 푸른 마나가 위협적인 형태로 피어올랐다.

‘감히.’

그의 손에서 점차 몸집을 키워나가던 마나가 일순간 세 남자를 덮쳤다.

“아악!”

태풍보다 더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으니 여기저기 부러지고 찢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제레미는 죽은 듯이 기절한 남자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힐레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는 끝내 그의 앞으로 쓰러졌다.

“힐레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제레미가 힐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모로 안아 든 그는 표정을 굳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가벼워.’

힐레인의 몸이 많이 여위었다는 건 그녀를 안아 든 그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가려 몰랐었는데. 손안에 담긴 어깨는 뼈가 만져질 정도로 야위었다. 그녀를 안은 두 팔엔 무게감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레미는 다급히 투시 마법을 시전해 힐레인의 상태를 살폈다.

‘이건 독인데……? 대체, 대체 언제 독에 당했던 거야…….’

힐레인의 몸 안에 돌고 있는 건 분명 독이었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제때 치유되지 못한 독이 그녀의 몸 곳곳에 상처를 입힌 상태였다.

이렇게 될 동안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 제 앞에서 내색도 하지 못하고.

다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가슴이 저릿했다.

‘미안해, 좀 더 미리 알아채지 못해서.’

제레미가 새근새근 잠이 든 힐레인에게 몸을 숙였다. 그러곤 얇은 유리잔을 다루듯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잠시 후 푸른 마나가 힐레인의 몸을 보호하듯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제레미는 가만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의 볼이 복숭앗빛으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제 가슴을 졸이게 했던 그녀는 이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들어 올린 제레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고개 숙인 그의 뺨 위로 힐레인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감각이었다.

그 감각은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할 자신에게 따스한 평온을 선사했다. 영원히 그 안에 머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연보랏빛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며들었다.

* * *

어둠이 깔린 새벽, 레틴은 황궁으로 향했다. 근신에 처했던 레틴이 황궁에 다시 발걸음하게 된 건 근 일주일만이었다.

아직 근신이 풀리기까지 3주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절대로 그 시간을 꽉 채우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빌어서라도 제발 근신을 풀어달라고 말씀드려 봐야지.’

자신이 자릴 비운 동안 혹여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전전긍긍했던 그는 곧장 비밀 서재로 방향을 틀었다. 제레미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밖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 레틴은 제레미의 무사함을 보며 안심했다.

하지만 이내 제레미의 상태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칼날처럼 예리해진 눈동자와 꾹 다물린 입술. 냉기가 곳곳에 스민 그의 얼굴 그 어디에도 평상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 여자는 또 뭐냔 말이야.’

레틴의 시선이 결박되어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로 향했다. 낯이 익은 걸 보니 아마도 황자궁에서 일했던 시녀 같았다.

‘그런 그녀가 여긴 왜? 게다가 저 몰골은 뭐란 말인가.’

그녀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으나 어디가 아픈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넋을 놓은 듯 텅 빈 눈동자에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제레미의 눈은 지독하리만치 무표정했다. 그 어떤 연민도 느낄 가치가 없다는 듯.

“황자님…….”

레틴은 처음 보는 제레미의 모습에 덜컥 겁이 나 그를 불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었다. 백치 연기로 자신을 완벽히 숨기는 데 익숙해지기 전까진 종종 저런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요즘은 저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으셨는데.

이유가 뭘까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제레미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말해, 누가 힐레인에게 독을 먹이라 시켰는지.”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틴은 그제야 이 상황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제레미는 시녀에게 마법 고문을 하는 중이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 속에 정신을 가둬 끝내 사실을 털어놓게 하는.

그것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는 고문법이었지만, 육체 고문보다 더 잔인한 방법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 세계를 완전히 파멸에 몰아넣을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 이 고문법은 미치광이를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레틴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제레미에게 손을 뻗었다.

“황자님!”

선득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레틴에게로 향했다.

“왜?”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레틴이 손을 움찔했다.

지금 제레미의 모습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악마보다도 더 하다는 정신 고문을 쓰고 있으면서도.

“황자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나……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반쯤 내리깐 제레미의 시선이 레틴을 향했다.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운 눈동자가 짙은 어둠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방법?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레틴.”

“이건…… 황자님답지 않습니다.”

“나다운 게 뭔데?”

“그야……. 황자님은 좀 더 평화적이고…… 온화한 방법을.”

레틴이 당황한 모습을 고스란히 내비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는 지금의 제레미가 낯설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맑게 웃던 순수한 모습은 어디로 가고…….

“레틴, 착각하지 마.”

“……!”

“내가 백치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게 내 본모습이라 여기지 마. 아닌 거, 알잖아?”

제레미의 말에 레틴이 얼굴을 굳혔다. 자신이 백치의 모습을 황자님의 본모습이라 착각했던가? 누구보다도 제레미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레틴의 표정을 보며 제레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난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야, 결코. 그런 여유로운 위치에 있지도 못 하고.”

레틴은 그의 시선 속에 깃든 선명한 빛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주체 못 할 분노로 그가 이성을 잃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바보처럼 행동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황자님은 마냥 착하기만 한 바보가 아니다. 제 사람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적을 쳐낼 수 있는 분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

레틴이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 후 내내 레틴은 조용히 제레미를 지켜보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그게 가장 제레미다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제 사람을 건드리면 언제든 기꺼이 악마가 될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주군의 본모습이니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시에나가 입을 열었다. 갈라진 힘없는 목소리가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체르샤……. 체르샤 레이몬드.”

레틴은 일전에 연회에서 힐레인과 한바탕 설전을 벌였던 붉은 머리의 여인을 떠올렸다. 설마 독을 쓸 정도로 원한이 깊었던 건가 싶었지만, 시에나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제레미 또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시에나에게서 시선을 떼 레틴을 바라보았다.

“레틴.”

“예, 황자님.”

“‘이엘란’을 구해와.”

이엘란은 힐레인이 먹었던 독보다 훨씬 더 강한 독성을 가진 독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독이었지만 아주 못 구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누구에게 쓸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레틴은 알아들은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뭐지?’

잠에서 깬 나는 그 자세 그대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분명 어제 광장에서 기절했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황자궁의 침실이었다.

‘기절하기 직전 황자님을 봤던 것 같기도 했는데…… 하지만 그건 환상 같은 게 아니었나?’

광장에서 기절하고 침실에서 깨어난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는 폭탄의 개수였다.

‘어제 제거하다 만 폭탄이 왜 이 반지 안에 있는 거야?’

이 정도면 몽유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건달들에게서 빠져나와 황궁으로 돌아온 기억도, 마지막 폭탄을 제거한 기억도 없으니 말이다.

‘요즘 몸 상태가 영 안 좋더라니…….’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곧 괜한 걱정이란 걸 깨달았다.

흐릿했던 눈은 아주 또렷해져 있었고 머리를 묵직이 누르던 현기증도 사라진 상태였다. 어디 그뿐인가?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에너지가 들끓었다.

‘혹시…….’

팔을 붕붕 돌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우뚝 멈췄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만약 황자님이 나를 발견해 황자궁으로 데려온 거라면?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보고 치료도 해 주고…….’

나도 참, 무슨 생각을. 잠시나마 행복했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 * *

이윽고 아인과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나는 독을 쓴 사람은 시에나고 그녀의 단독 범행이라고 그에게 보고했다. 일전에 혼을 냈던 일로 앙심을 품었던 것 같다는 추측과 함께.

“그래서…… 시에나는 도주한 상태다?”

아인의 예리한 시선을 받은 채 덤덤하게 고갤 끄덕였다.

“예, 제 불찰입니다.”

거짓말도 계속하니 실력이 조금 느는 기분이 들었다. 아인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일단은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범인이 도주했다는데 뭐 어떻게 할 거야.’

뻔뻔하게 고개를 든 채 그를 마주했다. 이럴 땐 당당하게! 그래! 당당하게 나가야지…….

하지만 아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 같은 거였다. 맹수 앞에서 초식 동물이 벌벌 떠는 것과 같이. 그래도 어찌어찌 준비한 말을 끝까지 할 수는 있었다.

“도주한 지 꽤 되어 잡기도 힘든 상태고…… 게다가 독도 다 해독되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는 게 어떨까요…….”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긴 설득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인은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괜히 겁먹었네.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하던 차, 아인이 내게로 손짓을 해 보였다.

“가까이.”

몇 걸음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벽에 붙은 그림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뻘쭘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농담을 섞어 그에게 물었다.

“다 감상하셨어요?”

“감상하는 것처럼 보였느냐.”

“예, 마스터피스 보듯 바라보시기에.”

그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멈춘 그가 잔잔히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몸속의 독이 전부 사라졌길래. 신기해서.”

느른하게 등을 기댄 그가 내게 설명해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턱을 한 손으로 괸 채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하늘에 떠 있는 고고한 태양처럼 느껴졌다.

“신기하다뇨…… 그때 독을 치료해주신 건.”

황태자 당신이지 않느냐, 라고 말하려던 걸 멈췄다. 잠깐만…… 신기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때 완벽하게 해독시켜준 게 아니었나?

“혹시 독을…… 남겨두신 거였어요?”

“그래.”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일부러 독을 남겨둔 것처럼…….

그럴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묘하게 반발심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그에게 꺼냈다.

“왜요?”

항의하듯 물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인은 그런 내 모습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왜라.”

뒤늦게 그의 말에 반기를 들어선 안 된단 걸 깨달았지만, 이미 말이 흘러나간 후였다.

긴장으로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아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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