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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도와줘 (50/120)

50. 도와줘

깊은 밤, 황궁의 후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한적한 새소리만이 감도는 밤의 후원은 경비를 서는 기사들만이 가끔 오갈 뿐이었다.

“하흠.”

늘어진 하품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후원을 지났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리한 시선은 줄곧 황자궁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황자궁에서 시녀 한 명이 나왔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그림자 속 사람이 손짓을 보냈다.

나무 그늘 아래 모인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졌다. 시녀는 눈치를 살폈고, 그림자 속 사람은 고요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에 밟힌 나뭇가지를 우득 부러뜨린 인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시에나 그 계집은 도망을 쳤다고?”

“예……. 가족들까지 다 데리고 떠난 걸 보아, 아주 숨어버린 것 같습니다.”

“독을 먹이는 데 실패하곤 도망을 친 게로군.”

“다시 써볼까요?”

“아니. 독을 연달아 쓰는 건 들킬 위험이 있어 위험하다.”

그림자 속 사람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시녀는 혹여나 수고비를 빼앗길까 두려워,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무슨 방법을?”

“황궁은 조그만 꼬투리만 잡혀도 쫓겨날 수 있는 곳이지요. 제가 그 꼬투리를 한 번 잡아보겠습니다.”

달빛 아래 시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어둠 속에서 틈을 노리는 도둑고양이처럼.

* * *

햇살이 방 안을 비추기 시작한 이른 아침, 힐레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응? 이불이 왜 턱 아래까지 덮여 있지.’

그녀에겐 이불을 발로 차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보면 늘 저만치에 이불이 떨어져 있었는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번데기가 연상될 정도로 꼭꼭 이불이 덮여 있었다.

‘너무 더운데.’

힐레인이 이불을 걷어내며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다. 눈곱 때문인 줄 알았는데,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 뿌연 안개가 낀 것 마냥.

‘눈이…… 요즘 따라 왜 이렇지? 일단 세수부터 하고 올까…….’

힐레인이 고갤 돌려 옆자리를 살펴보았다.

제레미가 잠들어 있었지만 힐레인은 그것이 이불이라고 생각했다.

은빛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 하얀 상의. 흐릿한 시야 탓에 그녀의 눈에는 하얀 이불 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누르는 어지럼증 또한 기척을 못 읽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황자님은 벌써 나가셨구나.’

힐레인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시계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강 늦은 아침이겠거니 생각하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미약한 흔들림에 옆에 있던 제레미가 눈을 떴다.

“…….”

조금은 몽롱한 상태로 제레미가 눈을 깜빡였다. 아침 햇살 속에 선 그녀의 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던 그때였다.

“후, 더워. 옷이 너무 갑갑하네…….”

힐레인은 더움을 느끼며 잠옷의 단추를 손으로 톡톡 풀어냈다.

어느덧 그녀의 손길이 쇄골 아래로 닿았다. 잠옷의 앞섶이 옅게 그림자를 이루는 깊은 곳까지 벌어졌다.

“……!”

무의식중에 그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제레미가 어깨를 움찔했다. 너무 놀라 뭐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귀만 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그때였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힐레인이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 천천히 옆으로 고갤 돌렸다.

“……?”

잠에서 덜 깬 눈동자가 침대 위에 있는 제레미에게로 닿았다.

당혹감에 물들 것이라 생각했던 붉은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잘못 들었나.”

힐레인이 벽을 짚으며 조심조심 드레스룸 쪽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제레미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충격에 물들어 있었다.

* * *

‘아, 이제 좀 잘 보인다.’

따뜻한 물에 연거푸 세수를 하자 다행히도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머리를 뭉근히 누르는 현기증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앞이 환히 보이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휴, 놀래라. 역시 별거 아니었잖아?’

앞이 갑자기 흐릿해서 놀란 것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이런 때 컨디션에 난조가 생긴 건가 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지금 아프면 안 돼. 아직 내겐 제거해야 할 폭탄이 일곱 개나 남았단 말이야.’

나는 나머지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오늘도 광장으로 나왔다. 빠르게 움직이면 오늘 안에 폭탄을 다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을까. 정신없이 땅 파기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상점의 불빛도 하나둘씩 꺼져가고, 광장은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비어버렸다.

‘오늘 다 제거하려고 했는데…….’

인제 그만 미련을 떨치고 황성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폭탄을 한 개 남겨둔 상황이라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좋아, 한 개만 더!’

결국 나는 다시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는데 문득 내 앞으로 길고 검은 인영이 드리웠다.

“여.”

퉁명스럽게 툭 던진 한마디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땅파기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건들, 건들. 참 불량스럽게도 생긴 남자들이 보였다.

“풉, 놀랐나 본데.”

“아저씨들 무서운 사람들 아니야.”

남자들은 놀란 내 모습이 자신을 두려워해서라고 여기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결코 남자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세 사람씩이나 다가오고 있었는데…… 왜 미리 기척을 읽지 못했지?’

이상함을 느끼며 남자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니 힘은 셀 것 같았으나, 기척을 숨길 정도의 실력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 몸이 둔감해진 건가?’

고개를 기울인 채 멀뚱멀뚱하니 서 있는데, 한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뭘 그리 넋이 나가 있어? 진짜 겁먹은 모양이네.”

확 그냥, 눈앞을 왔다 갔다 하는 손을 물어버릴까 생각하다 자비를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바쁘니까, 꺼져.”

“무슨 일인데 이쁜 아가씨께서 이렇게 밤늦게 땅을 파고 계실까.”

“공무 수행 중인 거 안 보여?”

손가락으로 이마의 머리끈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남자 셋이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보이지. 안 그래도 좀 떼고 싶던 참이었어. 이 예쁜 얼굴에 이렇게 못난 걸 달고 있다니. 이리 와 봐, 내가 시원하게 떼어 줄게.”

“어허, 어딜 감히 손을 대?”

내 이마로 향하는 손을 삽으로 가로막았다. 손등의 뼈와 부딪힌 것인지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야. 제법 성깔이 있네? 길들이는 재미가 있겠어.”

뭐가 재밌는지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그러곤 그중에서 가장 힘이 좋아 보이는 남자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그건 그만하고 우리랑 좋은 데 가자.”

“이것 놔, 이 새끼야.”

손목을 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몸을 움찔했다. 이상하다. 평상시라면 벌써 내동댕이치고도 남았을 텐데.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는 사이 두 남자가 내 팔 아래로 손을 넣어 나를 구덩이에서 꺼냈다. 인형처럼 달랑 들어 올려진 것도 기분이 더러웠지만, 자꾸 어딜 가자며 무지막지하게 손을 잡아끄는 남자의 행동도 짜증스러웠다.

“이것들이 진짜,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아직 저들에게 잡히지 않은 발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막 빚어놓은 것 같은 못난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주기 위해.

하지만 한 쪽 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몸의 균형이 급격히 무너져내렸다.

“윽……!”

앞으로 기울어지는 내 몸을 남자가 붙들어주었다. 그는 이게 웬 떡인가 싶은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어이쿠, 왜 이렇게 연약한 거야? 내가 좀 부축해줄게.”

팔을 더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꼭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손을 뿌리치려고 해도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저들에게 끌려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인적이 드문 곳에 나타나 굳이 싫다는 여자를 끌고 가려는 이유가 뭘까. 구덩이에 파묻혀 있는 내가 안쓰러워서? 비실비실 불쌍해 보여서 의원에 데려다주려고?

아니, 굳이 미화하려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 남자들은 절대 신사가 아니었다. 그 뜻은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는 곳이 결코 의원이나 치안대와 같은 따뜻한 곳이 아니란 뜻이었다.

‘벗어나야 해…….’

어떻게든 남자들을 뿌리치기 위해 팔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젠 현기증까지 일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질 수 있나? 세 사람에게 붙잡힌 내 꼴이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스스로 그 도마 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이,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제레미.’

결코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란 걸 알지만, 어쩐지 그가 생각났다.

‘도와줘.’

어쩐지 내 부름에 답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 황자님이 떠오른 걸 보면. 황궁에 있을 그가 이곳에 올 리가 없는데.

나 스스로도 참 어이없다 생각하며, 침침한 눈을 껌뻑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두 뺨 위를 스친 밤공기 속에서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응? 웬 바람이…….’

처음엔 약하게 불어오던 미풍은 점차 강해지더니, 옷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거세진 상태였다.

신기한 것은 나는 여전히 그 바람이 간지럽지도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내 옆에 있는 뚱땡이들은 몸도 못 가누고 있는데.

“으아악!”

“이게 뭐야? 아악!”

눈 깜짝할 새 세 남자가 바람에 떠밀려 갔다. 체구가 아까울 정도로 볼품없이.

‘뭐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정체를 채 파악하기도 전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독한 현기증이 온 다리의 힘을 빼앗아간 탓이었다.

딱딱한 광장의 바닥에 몸이 닿기 직전, 고통을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딱딱할 거라 생각했던 바닥은 내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단단하면서도 한없이 포근한 그것을 나는 무의식중에 꼭 붙들었다.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옷깃을 붙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솔직히 무서웠다. 평상시라면 주먹 하나에 해결되었을 놈들이 내 몸을 함부로 붙잡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혼자서 어딘지 모를 곳에 끌려갈 것이 미치도록 공포스러웠다.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은 난데없는 바람에 씻겨나간 상태였지만, 두려움은 여전히 내 몸 곳곳에 남아 미세한 떨림을 주고 있었다.

떨림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 건, 어깨를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고부터였다.

“이제 괜찮아. 내가 왔어.”

내가 왔어.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큰 위로로 다가왔다. 나는 요람 속에 있는 듯한 따뜻한 안식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목소리의 주인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내게 포근한 안식을 전해주는 사람은 항상 그였으니까.

“제레미…….”

점멸하듯 깜빡이던 의식이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나는 나를 다독이는 이 남자에게 몸을 맡긴 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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