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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낯선 소유욕 (47/120)

47. 낯선 소유욕

제레미는 시에나의 추적을 맡길 용병을 고용하고 오는 길이었다. 수하에게 맡겨도 될 일이었으나, 힐레인과 관련된 일인 만큼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며칠 전 있었던 레틴의 일도 그 결정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도망간 시녀가 수중에 들어오겠지.

어그러짐 없이 박차를 가하는 계획처럼, 제레미의 걸음도 조금씩 빨라지던 그때였다.

‘힐……레인?’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 나타난 힐레인의 모습에 제레미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힐레인은 평소와 달리 검은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채였다.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의 고운선과 하얀 빛깔이, 멀리서도 눈이 부셨다.

제레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와 다른 모습, 다른 분위기. 하지만 분명 힐레인, 그녀였다.

‘여긴 왜 온 거야? ……저 남자는 누구고?’

그녀의 모습에 시선이 빼앗긴 것도 잠시, 제레미의 눈빛이 일순 차가워졌다. 힐레인의 옆에 선 강렬한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 때문에.

‘저 자의 이름이…… 도베르 하이만이었던가.’

하이만 가문은 공공연한 황태자파였으니, 힐레인과도 어느 정도 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단순히 일로 엮인 사이라기보단 조금 더 각별해 보였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친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레미의 시선이 꾸밈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힐레인에게로 닿았다.

오늘 아침, 자신에게로 향했던 모습과 상반된 표정이었다. 거짓 미소도, 불편한 기색도 사라진 스스럼없는 얼굴.

제레미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했던,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제레미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오래도록 힐레인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그런데 그때, 문득 도베르와 눈이 마주쳤다.

제레미를 알아본 도베르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놀란 얼굴에 장난기 섞인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 도베르가 힐레인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무릎을 꿇는 것과 같이.

“…….”

이를 지켜보는 제레미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남자를 떨어뜨려 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채, 그는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그런데 그때 힐레인의 시선이 그가 쥔 반지를, 그리고 다시 도베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스치듯 지나간 시선에도 질투가 났다. 저 붉은 눈동자에 담길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저 하나였으면.

제레미의 안에서 낯선 소유욕이 몸집을 부풀렸다.

지금껏 포기하고, 체념하고, 놓아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 무엇을 갖고 싶다는 이 열망은 분명 낯선 감정이었다.

처음이었기에 여느 감정들처럼 손쉽게 잠재울 수도 없었다. 그사이에도 질척한 감정은 그의 마음을 검게 침식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들끓는 감정을 몰아낼 수 있을까. 힐레인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널 소유하면…… 이 감정을 몰아낼 수 있을까.’

제레미가 천천히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먼발치에 있는 힐레인의 모습이 조그맣게 손안에 들어왔다. 제레미는 그녀의 모습을 바스러뜨릴 듯 손을 힘껏 말아쥐었다.

“……!”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가 이내 힘을 풀었다. 질투, 소유욕, 절망감, 죄책감으로 뒤엉킨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제레미가 뒤를 돌아섰다. 시야를 차단하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어디로든, 그곳이 설령 벼랑 끝이라 해도 도망쳐야 했다.

질투에 눈이 멀어 횡포해진 이 마음을, 그녀가 볼 수 없는 곳에 멀리 치워두어야 했다.

* * *

“그렇게 줄 거면 나 안 받을래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도베르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물론 늘 그렇듯 도베르의 짓궂은 장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장단을 맞춰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응? 왜?”

“그건 프로포즈할 때 주는 방식이잖아요. 가짜 결혼이긴 해도…… 황자님한테 실례라고 생각해요.”

“음…… 좋아. 이건 내가 장난이 좀 심했네, 미안. 자, 반지는 여기 있어.”

내 말에 무안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도베르는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중에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야.’라는 의미 모를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에게 감사하게 될 거라는 말은 정확히 적중한 것 같았다.

‘이거 뭐야? 너무 편리하잖아?’

반지를 폭탄에 가져다 댄 후 ‘들어가, 폭탄.’이라고 말하자 폭탄이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세상에, 이렇게 효율적일 수가! 장장 두 시간을 폭탄 해체에 매달려야 했는데!

그 후 나는 신나게 폭탄 제거 작업에 몰두했다. 그 덕에 설치된 폭탄의 1/4을 제거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 * *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 열심히 흙먼지를 털어내 보았으나, 냄새까지는 채 털어내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드레스를 껴입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이 밀려들었다.

‘목욕, 목욕할 거야, 목욕…….’

코를 찌르는 흙냄새와 먼지 냄새를 느끼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최상급 폭탄을 하루 만에 5개나 제거하다니. 대견해, 힐레인.’

모종삽으로 땅을 파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으나, 그래도 도베르의 반지가 있어 시간을 확 줄여놓을 수 있었다. 이게 없었다면 아마 오늘의 수확은 폭탄 2개로 그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속도라면 4-5일 내로 다 제거할 수 있을 거야. 황궁 밖을 나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넉넉잡아 일주일?’

헤렌 축제가 열릴 때까지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온몸을 감싸는 듯한 따뜻한 기운이 평온한 휴식을 안겨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카렌을, 제레미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 * *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약간의 노곤함을 느끼며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욕실에 있었던 탓일까? 미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눈을 깜빡이는데 흐릿한 시야 사이로 익숙한 은빛이 스며들었다.

“황자님……?”

한 번 더 눈을 깜빡이자 제레미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그의 얼굴이 걱정에 물들어 있다고 생각한 순간, 팔 아래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괜찮아?”

“네? 아…… 방금 그건 너무 오랫동안 목욕물에 몸을 담가서 잠시 현기증이 일었나 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발을 콩콩 바닥에 굴리며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 보였다. 내가 하는 양을 세세히 관찰하던 그의 시선이 이번엔 젖어 있는 내 머리카락에 와 닿았다.

“내가 머리 말려 줄까?”

내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본 그가 자연스레 내 손에서 수건을 가져갔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듯, 그가 나를 의자로 이끌었다.

제레미가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새털이 닿은 것마냥 간지럽게 느껴졌다.

묘한 어색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문득 제레미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으셨나?’

인제 보니 그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제레미의 시선은 줄곧 내 손가락 위로 고정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도베르에게 받은 반지 쪽으로.

“……황자님?”

“응?”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제레미가 천천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긴 했지만 슬쩍 뒤돌아 살펴본 그의 모습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시무룩해 보였다. 어깨가 처져 있고 눈매는 몹시 슬퍼 보였다.

뭐 때문에 그러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때였다. 머리맡으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레미…… 노력할게.”

“네?”

“……결혼했다고 안심하면 안 되는데. 제레미가 너무 안일했어.”

대체 뭘 노력하신다는 거지? 안일했다는 건 뭐고?

머리를 말리다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무의식중에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손을 내리려던 나는 머리가 당겨지는 고통에 짧은 신음을 삼켰다.

반지에 머리카락이 엉켜버린 것이었다.

“에구, 머리카락이 걸렸네.”

눈을 치켜뜨자 헐렁한 반지에 걸린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지를 다른 데 보관해둘 걸 그랬다 싶었다. 혹여나 빌린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까 봐 내내 착용했던 건데.

섬세한 것과는 거리가 먼 탓인지 반지에 걸린 머리카락은 더 심하게 엉킨 상태가 되어버렸다.

“잠깐만, 향유를 바르면 좀 더 쉽게 풀 수 있을 거야.”

허둥지둥하는 내 손을 차분히 다독인 그가 향유를 가져오기 위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나는 어떻게든 머리카락을 풀어보고자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아야야, 좀 나와랏.”

두피가 당기는 고통을 참으며 머리카락을 길게 당기던 그때였다.

펑!

‘나와’라는 시동어에 반응한 반지가,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토해냈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폭탄 다섯 개. 그리고 온갖 난잡한 단어들이 난무하는 야한 책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마도 도베르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런 미친……!’

신성한 공간에 튄 오물 같은 그것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와’라고 말하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나와버리는 시스템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낮춰 ‘들어가!’라고 말해보았다. 하지만 보관하는 건 일일이 반지를 맞대야 하는 것인지, 물건들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이 많은 걸 하나하나 집어넣어야 한다고?’

폭탄과 책 무더기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야한 책부터 어떻게 숨겨 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성적으로 보면 폭탄부터 숨기는 게 먼저였다.

부디 제레미가 오기 전까지 숨길 수 있길 바라며,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들어가 폭탄! 들어가, 들어가! 이것들아!”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거칠어졌다. 무생물에 협박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지금 상황이 너무도 당혹스럽고 황당해 사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폭탄을 다 숨길 수는 있었다. 이게 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직 수백 권의 책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도베르는 무슨 책을 이렇게나 많이 소장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죄다 야한 책들 뿐이잖아?’

제레미가 올까 봐 등 뒤로 땀이 흐르고, 그전까지는 결코 못 숨길 것 같다는 초조함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그리고 결국 때가 오고야 말았다.

“신부야…….”

아아.

욕실을 나오다 우뚝 멈춰서 버린 제레미를 보며 깊이 절망했다. 떨리는 연보랏빛 시선은 이미 한 무더기의 빨간 책들을 다 훑어버린 이후였다.

“밤의 공주와 아홉 기사들…….”

제레미가 책 제목 중 하나를 멍하니 읊조렸다.

“…….”

도저히 고개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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