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더 질투해 주세용
베르킨의 일 처리는 아주 빠르고 정확했다. 1시간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시에나에 대한 정보가 들려 있었다. 모두 제레미가 지시한 내용 그대로였다.
20년이라는 원숙한 경력이 뒷받침한 결과였으나, 그는 처음 시종 일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황자궁의 수장이 내린 첫 임무나 다름없지 않은가.
‘혹시 황자님께서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 계신 건가?’
베르킨이 서류를 훑어보는 제레미를 살폈다. 은빛의 안경테 뒤로 자리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이지적인 빛을 발했다.
무언가에 열중한 차분한 모습이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태고적부터 지휘와 통솔에 능한 군주의 모습처럼.
도무지 백치라고 생각할 수 없는 면모에, 베르킨의 낯빛이 조금씩 환해졌다.
‘황자님께서 혹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건가?’
베르킨은 20년간 제레미의 곁을 지키며 그 누구보다도 그의 회복을 바랐던 사람이었다. 제레미를 바라보는 그윽한 시선에 물기가 어리던 그때였다.
“시에나가 사라진 그 날, 힐레인이 그녀를 찾아 헤맸었다고?”
“예? 예! 급한 일이라며 애타게 찾으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지만…… 그 당시 황자비님께서 몹시 초조한 모습이셨습니다.”
“…….”
제레미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길 바랐는데. 역시 사라진 시녀와 힐레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였다. 부디 힐레인에게 어떠한 해악도 미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머지 서류를 훑어보았다.
이름과 나이, 주소, 가족관계 등 기본 정보만이 기재되어 있는 서류였으나, 무언가 중요한 점을 발견한 듯 제레미의 시선이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추었다.
“돌보고 있던 동생이 두 명이라고…….”
“예, 각각 8살, 10살 동생으로 이웃집 할머니가 맡아 돌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에나가 무척이나 각별히 생각했었죠. 어제 시종들을 시켜 알아본 결과 동생들도 함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여자 하나와 아이 둘. 함께 도주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그렇담 조금 둘러가게 되더라도 여러 번 이동수단을 갈아타야 하는 육로가 아닌, 한 번에 먼 거리를 갈 수 있는 수로를 선택했을 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항구를 떠올려보자, 시에나의 행선지가 대충 머릿속에 그려졌다.
“수고했어, 베르킨.”
제레미의 말에 베르킨이 들뜬 얼굴로 고갤 숙였다.
“예, 저는 그럼 시에나를 찾을 때까지 계속 추적하고 있겠습니다.”
그는 지금 어서 빨리 황자님의 상태가 좋아졌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 이상 황자님이 백치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를, 황제의 홀대를 받지 않기를.
하지만 그의 바람은 그리 쉽게 이루어질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베르킨을 제레미가 조용히 불러세웠다. 베르킨이 뒤를 돌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레미의 모습이 보였다.
“베르킨.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아도 괜찮아.”
희미하게 걸린 미소 사이로 어쩐지 슬픔이 스며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던 그때였다.
“고마웠어.”
제레미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스며들었다. 잠시 후 정신을 잃은 베르킨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제레미는 기절한 그를 소파 위로 올려준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누구도 섣불리 믿을 수 없어.’
백치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그 신념은 머릿속에 낙인처럼 자리해 있었다.
텅 빈 복도를 걷는 그의 표정 위로 익숙한 공허함이 맴돌았다.
* * *
‘역시 바지가 편해.’
온몸을 누르는 듯했던 드레스를 벗어 던지자 온몸에 자유가 찾아든 기분이 들었다. 그 덕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황궁 밖을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막 비밀통로를 빠져나오던 그때, 의외의 인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선배……?”
“어? 힐레인 아냐?”
도베르가 눈을 비비던 손을 내렸다. 곧이어 드러난 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밤을 새운 것 마냥 얼굴이 칙칙해 보였고, 눈 아래는 어두워져 있었다.
“방향을 보니까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데. 무슨 외부 임무라도 있었어요?”
“응,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
굳이 무슨 임무라고 말해주지 않는 걸 보니 묻지 말라는 뜻 같았다. 비밀임무인가.
“힐레인 너는 무슨 일인데?”
“저는…….”
순간 말해 줘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 같아선 좀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는? 뭐?”
“저는…… 그러니까 뭘 좀 살까 하고.”
“뭔데? 몰래 나올 정도면 중요한 거야?”
도베르의 시선이 라탄 바구니 위로 닿았다. 뒤로 슬쩍 숨겨 보았지만 원체 몸집이 커 잘 숨겨지지 않을뿐더러, 덜거덕거리는 소리 탓에 되레 힌트만 준 꼴이 되어버렸다.
“뭐가 들었길래 그런 쇳덩이 소리가 나?”
“그냥…… 뭐. 별거 아니에요. 선배는 선배 갈 길 가세요!”
간단한 인사를 남긴 채 후다닥 돌아섰다. 그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황태자의 최측근 아닌가. 어쩌면 이번 폭탄 설치 임무에 도베르가 참여했을 수도 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점차 작아지는 도베르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힐레인은 도베르가 황궁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그를 너무 만만히 본 것이었다.
‘힐레인 녀석, 오늘은 또 뭘 하려고 저러는 거야?’
도베르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척하다 은근슬쩍 다시 걸음을 돌렸다. 기척에 예민한 아이인 걸 감안해 최대한 숨을 죽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옛날엔 아지트에 있는 게 제일 재밌었는데, 요즘은 힐레인을 보는 게 더 흥미롭단 말이지.’
도베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새벽 내내 임무를 하다 돌아왔음에도 피곤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살금살금 힐레인을 뒤따르던 그의 발걸음이 이내 한곳에 멈췄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광장이었다.
‘음? 신기하네. 내가 새벽에 임무를 수행한 곳도 여기였는데.’
우연인가 하고 넘기던 도베르는 힐레인이 우뚝 멈춰 선 위치를 보며 싸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은 지켜보잔 생각에 가만히 몸을 숨기는데, 힐레인이 라탄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꺼낸 것은 ‘공무 수행중’이라고 적힌 완장과 머리끈이었다. 팔에 완장을 차고 이마에 머리끈을 둘렀을 뿐인데, 제법 황실의 일꾼다운 모습이 되었다.
잠시 후 힐레인이 바구니에서 모종삽 같은 걸 꺼냈다. 그러곤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힐레인의 괴기한 행동은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잠시 후 팔 둘레 길이 정도의 구멍이 생기자, 힐레인이 그 안에 상체를 욱여넣었다. 뒤에서 보니 꼭 한 마리의 커다란 두더지 같았다.
‘힐레인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세 시간 정도 지났을까. 겨우 작업을 끝낸 힐레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러곤 잠시 휴식을 가지려는 것인지 주섬주섬 도구를 챙겨 광장을 빠져나갔다.
배를 잡고 있는 걸 보니 어쩌면 근처 단골 식당에 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도베르는 10분 정도를 더 기다려 그녀가 완전히 갔음을 확인했다. 잠시 후 힐레인이 만졌던 구덩이 앞에 선 도베르가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게 뭐냐며 키득거렸던, 힐레인의 두더지 자세 그대로.
잠시 후 폭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나석으로 작동되는 폭탄은 시전자가 스위치를 누르면 폭발하는 최상급의 폭탄이었다.
당연하게도 일상에서 쓰이는 일이 매우 드물었기에, 이를 본 사람들은 ‘저게 뭐지?’하는 정도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림자 기사로 수없이 많은 거친 임무를 담당해왔던 그는 그것이 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폭탄이…… 다 해체된 상태야.’
폭탄은 마나석에 내재된 힘을 흡수하기 위해 얼기설기 복잡하게 연결된 선이 많았다. 만드는 것도 일이었지만, 사실 해체를 하는 게 더 어려웠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폭탄은 완벽하게 해체되어 있었다. 수십여 가닥의 선 중에서도 해당 되는 선만 골라 잘라낸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여기 폭탄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도베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전 힐레인이 해체시킨 폭탄은 다름 아닌 도베르의 작품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이 며칠 내도록 밤을 새워 작업한.
하지만 이건 그림자 기사들 중에서도 임무에 배정된 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임무였다. 힐레인이 어떻게 알았을지 떠올려봐도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었다. 동료들이 얘기했을 리도 없고.
‘대체 어떻게 안 거야?’
* * *
‘으음, 왜 이렇게 입맛이 없지?’
배는 무척이나 고팠지만 정작 샌드위치 한입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바깥 임무가 있을 때면 꼭꼭 들리던 단골식당이었는데. 그새 맛이 변했나?
다른 손님들이 먹는 걸 보니 그건 또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꾸역꾸역 샌드위치를 입안에 욱여넣었으나, 결국 반도 먹지 못한 채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내내 입맛이 없었어.’
제레미 보는 낙 다음을 차지하던 게 먹는 낙이었는데. 우울한 기분으로 식당을 나왔다. 걸음이 향한 곳은 다시 또 광장이었다.
황궁을 나온 지도 벌써 세 시간째에 접어들고 있는데. 20개의 폭탄 중 겨우 하나만 제거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최상급 폭탄을 쓰다니. 제거하기 너무 힘들어.’
더 쉬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어? 또 만나네?”
길에서 마주친 건 다름 아닌 도베르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까 황궁으로 돌아갔던 게 아니었나!
“뭐예요? 설마 나 따라온 거 아니죠?”
“엥, 아냐. 제작 맡겼던 물건을 깜빡하고 안 찾았지 뭐야. 할 수 없이 다시 나왔지, 뭐.”
도베르가 제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가 싶어 보자 아무 무늬도 없는 은색의 반지가 보였다.
“음, 선배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응? 아, 이거 장식용이 아니라 마법 물품이야.”
방금 산 물건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지 도베르가 들뜬 얼굴로 설명을 달았다.
“이거 아공간 보관 마법이 걸려 있는 귀한 거라고. 한 번 볼래?”
아공간 보관 마법? 뭔가 싶어 무심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도베르가 내 라탄 바구니에 자신의 반지를 가져다 댔다.
“들어가, 바구니.”
“……!”
도베르의 한 마디에 갑자기 손에 있던 바구니가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하핫, 하며 웃음을 흘렸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네 바구니를 아공간에 보관한 거야. 다시 꺼낼 수도 있어. 자, 봐봐. 나와, 바구니.”
나오란 말에 바구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와, 세상에나. 이렇게 참신한 물건이 있었다니.
“그뿐만이 아냐. 이 반지 안은 마법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서, 부피, 무게에도 자유롭고 무엇보다도 외부의 충격에도 끄떡없지. 아, 물론 이 아공간 안에서 충격이 일어도 우린 느낄 수 없어. 현실과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이라서.”
오호라, 아공간 안에서 충격이 일어도 나는 못 느낀다 이거지? 그럼 폭탄을 여기다가 넣어버리면…… 굳이 일일이 해체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이거…… 어쩌면 폭탄 제거에 요긴하게 쓰이겠는데?
도베르의 반지를 반짝반짝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안 그래도 세 시간의 공을 들여 겨우 폭탄 하나를 제거하는, 극악한 업무에 시달리던 중이었는데.
“선배님……. 이거 저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 * *
힐레인에게 반지를 내민 도베르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심어놓은 폭탄을 편히 제거하도록 돕게 될 줄이야.
‘그래도 이왕 할 거면 편하게 해.’
삼삼오오 모여 웃음소리가 번지는 광장 속에, 홀로 땅을 파고 있는 힐레인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어차피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니, 그대로 두었다간 20개의 폭탄을 낑낑거리며 해체할 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편하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렇게 속 터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반지를 이리저리 껴보고 있는 힐레인을 내려다보았다. 사이즈가 너무 커서 그런지, 엄지손가락에 낀 반지가 주르륵 빠져나와 버렸다.
“이크.”
도베르가 떨어진 반지를 주워 입으로 후후 불었다. 다시 힐레인의 손에 쥐여 주려는데 문득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도베르가 눈동자만 살짝 굴려 광장 어귀를 응시했다.
‘황자님이잖아?’
꽤 멀리 있는 데다가 평민복으로 위장한 상태였지만 그는 단번에 제레미임을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게 황자는 거친 천 조각 따위에 가려질 외모가 아니지 않나.
제레미는 분노가 노골적으로 스민 시선으로 도베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압박이 실린 시선에 겁을 먹을 법도 했으나 도베르는 오히려 싱글벙글해 했다.
‘질투하나? 내가 힐레인에게 반지를 줘서?’
도베르의 눈이 장난기를 가득 머금으며 반짝하고 빛이 났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후후.”
“뭐가요?”
“흐흥. 그냥 그렇다고. 근데 반지가 커서 어쩌지?”
도베르가 갑자기 반지를 하늘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집게 손으로 반지를 이리저리 돌렸다. 마치 ‘온동네 사람들 제 반지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잠시 후 반지를 다시 내린 도베르가 이번엔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황자님, 더 질투해 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