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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추적 (45/120)

45. 추적

“저 자를 잡아라!”

요란스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나뭇가지에 도약했다. 평소 몸이 숙련되어 있던 탓에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가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

‘붙잡히면 황자비 자리는 이대로 끝이야. 황자님을 지킬 수도 없게 된다고!’

내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도 경비병들과의 거리는 착실하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에 재빨리 몸에 반동을 주었다. 목적지는 도베르가 있는 곳이었다.

방향을 도베르 쪽으로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딱딱한 땅보다는 쬐끔 더 푹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간다!”

힘껏 반동을 주며 소리를 높이자 도베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자신과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보더니,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잠깐!”

“합!”

가볍게 무시하고 뛰어내렸다. 도베르에게 있어 새털처럼 가벼운 나를 받아내는 건 가뿐한 일일 테니.

“억!”

얼떨결에 나를 안아 든 도베르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최강의 그림자 기사가, 이렇게 가벼운 여자 하나에 ‘억!’이라니.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땅에 내려주었다.

“자기, 나 팔 빠질 뻔했어.”

“……!”

진짜 팔이 빠지는 게 뭔지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기 있다! 잡아라!”

멀리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위협적인 뜀박질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앞으로 내달렸다. 두 그림자 기사의 쏜살같은 움직임에 황궁 경비병들의 모습이 차츰 멀어져갔다.

* * *

황자궁 후원에 몸을 숨긴 나는 허리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면 도베르는 열이 받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이게 힘들어? 아까도 그렇고, 오늘따라 자기답지 않네.”

“하……. 그건 그렇네요, 왜 이렇게 숨이 차지?”

도베르의 앞이라 말을 아끼긴 했지만 사실 숨만 차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눈도 좀 침침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심하게 뜀박질을 한 탓인지 미약하게 토기도 있고.

‘그동안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가? 하루 푹 쉬면 괜찮아지겠지?’

굽혔던 허리를 펴자 목걸이가 브로치에 부딪쳐 짤랑이는 소리를 냈다.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옷 속으로 다시 집어 넣다 문득 이시스의 말이 떠올랐다.

“선배 혹시 카야의 돌이 뭔지 알아요?”

“……뭐?”

“아까 분명 이시스 대사제가 이 목걸이를 보고 카야의 돌이라고 했거든요. 무슨 성물이라고 하던데…….”

“응? 성물? 으음…… 난 성물에 대해선 잘 모르겠는데.”

도베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책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턱을 쓸며 곤란해하자 도베르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갤 저었다.

“자기,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 목걸이에 대해서는 그냥 잊어. 어차피 황태자님이 너 줬다며.”

“그건 그렇지만…….”

“자자, 이제 자기는 황자궁으로 돌아가. 난 가볼 데가 있어.”

도베르가 내 등을 밀며 황자궁 쪽으로 떠밀었다. 왜 저렇게 재촉하나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바쁜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이내 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황자궁으로 돌아왔을 때 제레미는 아직 방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욕실 책장에 숨겨두었던 종이 쪽지를 꺼냈다.

‘보자, 보자. 황태자님에게 보고할 거리는 미리 생각해 두었고, 루도 괜찮아졌으니 이제 슬슬 다음 일을 진행해볼까.’

눈도 침침하고 피로도도 꽤 높은 상태였지만 쉬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우울한 잡념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아서.

게다가 남은 시간이 촉박한 탓도 있었다. 어느덧 헤렌 축제가 2주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카렌을 지키고 제레미의 백치 연기가 들키지 않게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분주히 준비해야 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은 나는 종이 위에 펜을 끄적거렸다.

‘보자, 폭탄이 터졌던 곳이 여기랑…….’

광장의 약도와 함께 폭탄이 터졌던 위치를 꼼꼼히 체크해 두었다. 회귀 전 두 번이나 겪었던 일이었기에 기억이 명확히 남아 있었다.

‘헤렌 축제가 앞으로 2주 남았으니…… 그림자 기사들이 이미 폭탄을 설치해놓은 상태겠지? 좋아. 어디 한번 해보라지. 내일 가서 내가 다 해체 시켜 버릴 테니.’

이날을 위해 지난 2년간 폭탄 해체하는 법도 미리 공부해둔 상태였다.

‘뭐든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고철덩어리로 만들어주겠어. 감히 우리 카렌을!’

카렌의 죽음이라고 써놓은 곳에 마구 엑스자를 그어버렸다. 부디 이번에는 카렌이 죽지 않게 지켜줄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꼭 지켜줄게. 황녀님도, 황자님도.’

결의를 다지며 종이를 보는데 문득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녀들에게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해둔 상태니, 그녀들이 들어왔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방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한 사람, 제레미였다.

‘얼른 숨겨야겠다.’

내가 있는 곳은 가벽에 가려져 있는 곳이었기에 출입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고로 그가 나를 발견하기까지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재빨리 종이를 책 사이에 꽂아 서랍 속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그러곤 이대로 제레미와 자연스레 인사할지, 아니면 어젯밤처럼 자는 척을 할지 잠깐 고민했다.

‘아직은…… 제레미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는데.’

마음을 덜 추스른 상태에서 제레미를 보기가 겁이 났다. 그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든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좀 흘러야 평상시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일단은 자는 척하자.’

그렇게 결정하고 재빨리 가까이 있는 소파로 돌진했다. 어찌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옷이 펄럭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그만 스텝이 꼬여버렸다.

‘으, 으악!’

다행히도 내가 넘어진 곳은 소파였다. 일자로 엎드려 누운 다소 웃긴 자세였으나, 자세를 고치기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아치문을 통해 들려온 발걸음 소릴 들으며 나는 숨을 죽였다.

* * *

방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안락함을 느꼈다. 그 안락함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제레미는 불이 환히 켜져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재로 통하는 아치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제레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 빠른 듯 보이는 발걸음이 서재로 향하던 그때였다.

두다다다다-.

가벽 뒤로 흡사 조랑말이 뛰어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딴에는 조심스럽게 다니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서두르는 중이라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쿡-.”

제레미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오늘은 또 자신 몰래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루도 쉼 없이 무언가를 분주히 하고 있는 그녀가 신기했다. 꼭 도토리를 분주히 찾아 헤매는 가을 산의 다람쥐 같지 않은가.

아인이 내린 임무를 진행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면 좀 슬프기도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제레미는 그녀의 움직임이 좋았다.

가벼운 걸음 소리가, 허겁지겁 당황한 표정이.

‘좀 더 천천히 걸어야겠다.’

제레미가 아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숨기고 싶은 걸 다 숨길 수 있도록 여유를 주기 위해.

잠시 후 그가 서재로 통하는 아치로 들어섰을 때는, 힐레인은 이미 숨길 걸 다 숨기고 소파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상태였지만 자세는 매우 똑발랐다. 엎드려 누워 있다는 게 다소 특이하긴 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제레미는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허술한 모습이 그녀다워서.

제레미가 웃음을 참으며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숨을 고르느라 등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음에도, 자는 척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혹시 화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가?’

가족에 대해 물었던 일로 힐레인이 화를 냈던 게 떠올랐다.

그날 밤 바로 사과를 했지만, 아직 마음이 덜 풀린 모양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자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제레미는 눈을 꾹 감고 누운 힐레인을 보며 침울해졌다. 얼굴을 마주하기 싫을 정도로 자신이 미워진 걸까? 섣불리 가족 이야기를 꺼낸 게 후회됐다.

‘어떻게 하면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그가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힐레인의 앞에 가만히 허리를 숙여서 그녀의 어깨와 무릎 아래를 두 팔로 감쌌다.

‘우선은 편하게 잘 수 있게 해주자.’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든 그가 침실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표정 관리에 더 신경 써야 하나.’

오늘 아침 제레미와 함께 식사를 하며 나는 최대한 평소와 같이 행동하려 애썼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제레미는 내내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내 기분을 세심하게 살피는가 하면, ‘그날은 제레미가 잘못했어. 미안해.’라고 또다시 사과를 건네기도 했다. 진짜 괜찮다고, 그날은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그때마다 제레미는 더 침울해진 표정을 지었다.

거울 앞에 선 채 손으로 입가를 마구 문질러보았다. 아무래도 이 표정을 좀 고쳐야 할 것 같은데. 평상시에 내가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짓자 새빨간 눈의 여자가 나를 따라 음흉하게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

결국 표정 연습을 포기한 나는 주섬주섬 외출복을 바구니 속으로 숨겼다.

‘에휴, 폭탄이나 제거하러 가야지.’

홀로 산책을 다녀오겠다는 말에 센이 늘 있는 일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황자비님.”

“응, 다녀올게.”

중장비로 가득한 디저트 바구니를 들자 안에서 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센은 바구니 속에 든 것을 몹시도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 * *

황자궁의 시종장 베르킨은 업무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중앙궁이나 황태자궁 소속 시종장들처럼 명예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이 즐겁고 업무 스트레스가 낮다는 점이, 그에게 적지 않은 만족감을 주었다.

그 모든 건 사실 황자궁의 수장인 제레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까다로운 주인도 아니었고, 백치라고는 하지만 무언가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는 일도 없었다. 황자궁 내부의 일 처리 또한 저를 믿고 지지해주니, 베르킨으로서는 일이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될 때가 간혹 있었다. 이를테면 오늘처럼 황자궁에 커다란 사건이 생겼을 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자비님 소속 시녀인 시에나가 어제 아침 모습을 감춘 이후로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도주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베르킨이 황자궁에서 일한 20년 동안, 시녀가 황성을 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이 하기 싫으면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될 일이고, 급한 용무가 있으면 휴가를 내면 그만 아닌가.

시에나가 도주한 이유가 가늠되지 않는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베르킨은 곤란에 빠졌다.

두 수장의 도움을 얻어보려 해도 황자비님은 부재중이고, 황자님은 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상태가 아닌가.

‘황자님께서는 이번에도 예쁘게 웃으시기만 할 텐데……. 이를 어쩐담.’

하지만 그런 베르킨의 추측은 오늘만큼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제레미는 평상시 보이던 백치 미소를 완전히 지운 채였다.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주한 시녀가 황자비의 소속이었다고?”

“……예? 옙!”

제레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도주한 시녀가 하필이면 힐레인 소속 시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도 그럴 게 간밤에 시녀가 황궁을 도주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중죄를 저질러서.’

벌을 받을 게 두려워 도망을 간 것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힐레인에게 해를 끼칠 뻔했다거나, 이미 알게 모르게 위험에 빠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드시 추적해야 해.’

잠시 후 제레미에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에나를 찾아.”

“……!”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

은빛의 속눈썹 사이로 드러난 예리한 시선이 베르킨에게로 향했다.

시종장은 제레미의 낯선 모습에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터라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기도 했다.

“부탁할게, 베르킨.”

제레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곡선을 그렸다. 차가운 모습은 어느덧 사라지고 예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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