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너의 수호기사가 되어
미친 듯이 다릴 움직여 황자궁을 빠져나왔다. 채 피하지 못한 나뭇가지가 몸을 할퀴고,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는 추위를 안겨다 주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 고통이 달가웠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괴로운 생각이 흐려졌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아무리 무시하려 애써도 다시금 고통스러운 의문이 찾아들었다.
‘황자님이 나를…… 죽이려 했다고?’
나는 어제의 그 독 쿠키를 떠올렸다.
아인이 말하길 내게 쓴 독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었다. 시간 차를 두고 자연스럽게 고통을 일으켜 독살 의심도 덜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거추장스러운 가짜 황자비를 제거하기에 딱 좋은 독이 아닌가.
“하……. 하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곧이어 다리에 힘이 빠지며 잔디로 풀썩 주저앉았다.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흐릿한 눈을 좁히며 잔디로 추정되는 것을 손으로 꽉 쥐었다.
“아.”
몰랐는데 모난 돌까지 함께 움켜쥔 모양이었다. 돌의 예리한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며 아린 감각을 남겼다.
피멍이 든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런 꼬락서니가 되어버렸을까. 몸도 마음도 넝마가 따로 없었다.
나를 이렇듯 형편없는 꼴로 만든 사람이 목숨 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남자였다니.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밀려들었다.
“흐엉. 흐으윽.”
서러운 마음이 들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고 엉엉 울어버렸다. 발로 차이고 짓밟힌 기분이 들어 억울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짓밟혔다고 해서 마냥 원망을 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레미의 입장에서 나는 제거해야 할 아인의 첩자, 그뿐. 그건 이미 각오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다정했던 제레미의 태도에 그만 망각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내게로 향한 그 다정함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허상은 달콤했던 만큼 그것이 깨어졌을 때의 허탈감도 더 짙었다. 차라리 그렇게 잘해주지 말지. 그럼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한참을 후원에 숨어 울었다. 영영 그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나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한바탕 울고 나니 지금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 선명히 그려졌다. 그것은 죽을 듯이 아프고 서러운 와중에도 놓을 수 없는 한 가지였다.
‘나는 여전히…… 제레미가 잘됐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야. 누군가를 원망할 생각은 없어.
그저 먼 훗날 우리가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래, 그때 가서 생색내는 것도 괜찮겠지.
내가 당신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고.
‘그때까지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돼.’
비밀 수호기사가 되어 제레미를 지키는 것.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하면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어떤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꿋꿋하게.
* * *
그 후 나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싫어 시에나를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끈질긴 추적 끝에 시에나가 이미 황궁을 탈출했음을 알게 되었다.
황궁 문지기의 말로는 시에나가 출입 패를 가지고 있었다고. 시녀들은 휴가 때나 윗사람이 바깥 심부름을 시킬 때 외엔 출입 패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배후가 있는 만큼, 출입 패를 얻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멀리 도망쳐.’
시에나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도망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인에게 범인을 보고하기로 한 날, 나는 그에게 시에나의 단독 범행이라 말할 생각이었으므로.
아인은 내 말을 의심하겠지만 그땐 이미 시에나가 국경을 두 번을 넘고도 남을 시간이겠지.
아인이 마음을 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그녀 하나 찾자고 수많은 인력을 푸는 공을 들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의 진범은 영영 묻히게 되겠지.
‘독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지으면 되겠고…… 음.’
갑자기 눈이 흐릿하기에 손으로 눈을 세차게 비볐다.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난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 이러지?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가, 아니면 잠을 못 자서?’
요즘 너무 컨디션 관리를 엉망으로 하긴 했었다. 잠시 쉬면 나아질까 싶어 벤치에 앉아 있기를 10여 분.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진다 생각해서 눈을 떴는데, 곧이어 강렬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베르 선배?”
“힐……레인. 하아, 여기 있었구나. 안 그래도 널 찾으러 다니던 참이었어.”
항상 장난기 가득하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도베르가 마른세수를 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를요?”
“루 대공이 있는 곳.”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문득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왜요, 왜 그러는데요?”
“대공이 지금…… 많이 아파.”
* * *
도베르와 함께 남쪽궁으로 향하는 사이,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루가 아인에게 독을 쓰려다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고.
‘루 대공은 바보야? 바보냐고! 왜 겁도 없이 황태자를 건드려!’
루가 하루 만에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황자님이 그 고생을 하고 있겠냐고.
병든 화초처럼 누워 있을 게 그려져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루의 숙소로 도착하자마자 화는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 자릴 대신한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그것은 루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연한 백금발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 누워 있는 루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보는 각도에서는 꼭 애정행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당황하여 도베르를 쳐다보는데, 그 또한 충격을 먹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유심히 두 사람을 살피다 문득, 여자가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보니 큰 키도 그렇고 골격도 그렇고,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누구야……?”
누구냐고 물어보던 찰나 사제의 입술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마치 무언가 주문을 외우듯.
그리고 그 순간 맞댄 이마에서 시작된 하얀 빛이 구를 이루며 몸집을 부풀렸다.
잠시 후 하얀 빛 속에 파묻힌 루의 몸에서 무언가가 쏙- 하고 나왔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길쭉한 게 꼭 뱀 같았다.
백금발의 남자가 손을 뻗자 뱀이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장면을 보며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는 지금 루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지?’
의문의 남자가 굽혔던 허리를 펴자 결 좋은 백금발이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여리여리한 체형과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 탓에 여자로 착각하기 쉬운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루.”
애정 어린 연녹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루의 얼굴 위에 닿아 있었다.
“이 미친놈.”
연분홍의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고운 미성이 새어 나왔다. 다정하고 상냥한 말투였으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다소 거칠었다.
“나만 믿고 무리했죠?”
남자가 희고 고운 손으로 루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어딘지 모르게 말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남자의 입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런 몰골로 나타나면 이 형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형……이요?”
형이라고? 루의 형?
스스로를 형이라 말한 남자가 혈색이 감돌기 시작한 루의 얼굴에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그러곤 뒤를 돌아 차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섬세한 선으로 이뤄진 눈매가 휘어지며 선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루의 친형인 이시스 하버마스예요.”
“힉.”
이시스의 소개에 도베르가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작게 ‘대사제 이시스!’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아!”
대사제 이시스라면 나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뛰어난 치료술로 최연소의 나이에 대사제직을 지낸 그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이었다.
“대사제시면…… 방금 전 그 빛은 치료술이었습니까? 루를 치료해주신 거 맞죠?”
다급한 내 물음에 이시스가 눈을 깜빡이다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 보시다시피, 말끔히.”
이시스가 살짝 몸을 틀었다. 그 뒤로 새근새근이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는 루가 보였다.
“……다행이네요, 하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힐레인 리야라고 합니다.”
“황자비님이셨군요. 결혼식에 미처 참석지 못해 송구…….”
담백하게 인사를 받던 그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내 목 부근이었다.
“그 목걸이는…… 카야의 돌 아닙니까?”
“카야의 돌……? 그게 뭔데요?”
“모르십니까? 그건 제가 동생에게 선물했던 성물…….”
이시스가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 순간 루가 있던 침대 쪽에서 이불이 사그락거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몸을 일으키고 있는 루가 보였다.
당장에라도 살아난 기쁨을 토해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루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 신이시여……. 죽어서 천국에 온 걸까요. 눈을 떴는데 루나가 곁에 있다니…….”
코를 훌쩍이며 우는 루를 보며 이시스가 다시 한번 더 웃는 얼굴로 ‘역시 내 아우님은 미친놈이에요.’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루의 귀에는 전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루의 울음을 그치게 해줘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너 안 죽었어.”
“……?”
루가 손에서 얼굴을 뗀 채 내 쪽을 쳐다보았다. 눈 때문에 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 한 번 더 소리를 높여 외쳤다.
“너 안 죽었다고!”
나는 눈물을 가득 매단 채 누워 있는 루에게로 다가갔다. 살아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그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하아……. 죽을 수 있다면 지금 이 타이밍이 제일 적기인 것…… 같네요.”
루가 내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기댄 채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등을 다독이는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하지만 감격의 포옹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흥얼거림처럼 가볍게 들려온 이시스의 한 마디에.
“곧 황실 기사들이 들이닥칠 텐데…… 이런 장면을 들켜도 괜찮나요, 황자비님?”
이시스가 눈을 가늘게 좁혀 미소지었다. 웃음기 섞인 그의 시선이 루를 안고 있는 내 팔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 루에게서 몸을 뗐다. 이건 친구가 살아난 기쁨 때문에…… 근데 잠깐만, 황실 기사들이 들이닥칠 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죠? 기사들이 올 거라니요?”
“제가 황실로 통하는 게이트를 억지로 열고 들어왔거든요, 5분쯤 지났으니 슬슬 게이트가 열린 곳을 알아내지 않았을까요?”
이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 뒤로, 놀란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힐레인!”
“응.”
나와 도베르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테라스 쪽을 향해 뛰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키는 건 상당히 곤란했다. 대낮에, 그것도 황자비가, 대공의 침실에? 무슨 추문에 휩싸일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도베르가 먼저 힘껏 도약해 키 큰 나무로 건너갔다. 평상시였다면 나 또한 거침없이 나무로 도약했을 테지만, 막상 테라스 난간에 발을 올리고 나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아까 전엔 어떻게 이 거릴 뛰었었지? 잘 안 보이니까 너무 무서운데?’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결국 방문이 열리고 말았다. 그제야 떠밀리듯이 난간에서 뛰어내렸지만 이미 기사들이 나를 발견한 이후였다.
“저기 탈출하는 자가 있다!”
등 뒤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일사불란한 진두지휘 하에 기사들이 나를 뒤쫓았다.
‘젠장. 여기서 붙잡히면 황자비 인생은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