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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범인은 (43/120)

43. 범인은

분명 아인의 앞에서 의식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온실 안엔 간간이 새들의 울음소리만이 감돌았다.

나는 벤치에서 상체를 일으켜 몸을 살펴보았다. 묵직한 두통은 여전했지만, 아까와 같은 고통은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황태자님이 뭔가 조처를 해주신 건가?’

아인은 다친 그림자 기사를 버리면 버렸지, 돌볼 사람이 아닌데. 그의 예외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예외는 무슨, 단순한 변덕일 게 뻔한데…….’

어찌 되었든 한고비는 넘겼다. 앞으로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게 독을 먹인 범인을 찾아내는 거였다. 아인이 말한 일주일 내로.

‘우선 시에나에게 가봐야겠어.’

나는 테이블 아래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간식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이젠 내가 그녀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 * *

혹시나 도망쳤으면 어쩌나 했는데. 시에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을 물리고 단둘이 남았음에도 그녀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연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는 걸 보니, 죄를 짓긴 지었구나 싶었다.

“시에나.”

“네, 네?!”

“아깐 내가 너무 몰아세웠지?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순간 화가 났지 뭐야.”

“저, 저는 결단코 황자비님을 감시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아. 시에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

“사과의 의미로 이걸 주고 싶은데.”

“네?”

디저트 바구니를 열어 보이자 시에나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벌써부터 저런 표정이라니. 손도 안 대고 자백을 받아낸 기분인데.

“먹어볼래? 아주 맛있더라고. 눈물이 날 정도였어.”

그래,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

“…….”

쿠키를 집어 시에나의 앞에 내밀자 그녀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댔다.

“왜 못 먹어?”

“저, 저는.”

“여기에 독이라도 들었니? 안 먹으면 네가 독을 넣은 걸로 간주할게. 자, 먹을래, 말래?”

“자, 잘못했습니다! 황자비 마마.”

시에나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작은 몸을 떨며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한 편이라 주저하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직접 닥치고 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덤덤했다.

“네가 독을 넣었어?”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누가 시켰는지 말해.”

쿠키를 들고 손을 까딱거리자, 내가 그걸 먹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시에나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사실 이거 비슷하게 생긴 다른 쿠키인데.’

사실이야 어찌 됐든 시에나가 자백을 술술 해주니 만족이었다.

“누구야, 어서 말해. 10초 내로 말하지 않으면 이 쿠키를 네 입에 넣어 버리겠어!”

눈을 부릅뜨고 손에 든 쿠키를 건달 마냥 흔들어댔다. 그러자 겁에 질린 시에나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말할게요, 말해요!”

“자, 빨리 말해!”

“레, 레틴 에반스 경이요!”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내 멍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레틴이라고?’

레틴이 나를 싫어하긴 하지만 독을 쓸 정도인가? 첫 번째, 두 번째 생에서도 그에게 똑같이 미움을 받았으나, 이런 적은 없었기에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레틴은 단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제레미의 지혜와 명령에 의지해 움직였지.

‘그럼 황자님도 알고 있는 사실인가? 레틴에게 지시했다거나…….’

내가 무슨 생각을? 불경한 생각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고갤 저었다. 그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을 감시하러 온 적의 첩자. 객관적으로 보면 충분히 독살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말의 여지도 없이 그에 대한 의심을 지워버렸다.

‘우리 황자님은 절대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야.’

나랑 레틴이 자주 옥신각신하는 걸 보고 시에나가 지어낸 말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 * *

날이 밝자마자 나는 시에나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황자궁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젠장, 튀었나?’

만약 그런 거라면 매우 곤란했다. 아인 앞에 범인을 바쳐야 한다는 이유 말고도, 그녀가 절실히 필요한 덴 이유가 있었다.

‘얼른 나와서 레틴이 아니라고 말하라고!’

어젯밤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힌 생각 때문에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빨리 시에나를 잡아 다른 진범의 이름을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나가는 개가 시킨 거라고 말해도 믿어줄 테니, 제발 레틴은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시에나의 행방을 쫓았다. 황자궁 내 시녀들의 숙소, 세탁실, 요리실 등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분주히 움직이다 문득 황자궁 5층까지 올라와 보게 되었다.

이곳은 황자가 친우들을 초대할 때 그들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백치 연기를 하는 관계로 잘 쓰지 않는 곳이었다. 소홀한 관리로 가구 위를 덮은 흰 천에는 보얀 먼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숨기엔 딱 좋은 장소인데?’

막연한 기대를 안고 그녀를 찾아보았으나, 5층에선 사람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응?’

지친 몸을 기대기 위해 벽으로 손을 뻗었는데, 문득 손끝에 미세한 금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더듬거리며 금 사이를 만졌다. 그러던 중 그만 불룩하게 튀어나온 장식을 누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벽이 움푹하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조용히 밀려난 벽 사이로 작은 통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통로?’

호기심에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좁은 통로를 따라 열 발자국쯤 움직였을까? 벽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이랑 레틴인데? 여긴 그럼 황자님의 비밀 공간?’

이런 장소에서 나누는 대화라면 필시 비밀스러운 내용일 게 틀림없었다.

‘내가 들어도 괜찮은 내용일까? 아니면 어쩌지?’

짧은 고민 끝에 문틈 사이로 귀를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이 무슨 계획을 세우는지 알아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면 황자님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괜한 호기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는 내가 듣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독이든 뭐든 써보려 했으나……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죽이지 못했다고……?”

귓가에 파고든 레틴과 제레미의 목소리에 몸을 흠칫 굳혔다. 저게 무슨 말이지? 독을 써서 누구를 죽이려 했다고?

‘혹시 나……?’

혹여나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을 막고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죽이지 못했다는 내용 속 주어가 누군지는 듣지 못했지만 시기상 내가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시에나가 한 말도 있고.

‘날 죽이려 했다고? 그럼…… 내게 독을 쓴 사람이…… 황자님이었어?’

제레미는 독을 쓴 범인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땅이 꺼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모래성이 무너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 * *

황자궁 내부에 숨겨진 비밀의 공간, 그곳에 제레미와 레틴이 있었다.

궁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공간이었음에도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차분한 갈색빛의 가구와 꼭 필요한 것들만 비치된 공간은 주인의 성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제레미는 급한 일이라며 자신을 불러놓고, 다짜고짜 사과부터 하는 제 부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헤일을 놓쳤다고 보고드렸었는데…… 사실 거짓이었습니다.”

레틴의 고백에 제레미가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왜 거짓을 보고했는데?”

레틴이 제레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원래는 끝까지 비밀로 하고 첩자의 목숨을 거둘 계획이었다. 카야의 돌을 그에게 쥐여 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레틴은 힐레인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첩자에게 마음을 품은 제 주군 때문에. 뭔가 행동에 나서려 할 때마다 그의 실망한 얼굴이 발목을 붙잡았다.

황자비를 죽였다고 화를 내실까?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깊으면 어쩌지? 날 원망하시려나. 내내 갈등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레틴은 차라리 이렇게 고민만 하느니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반응이 안 좋으면 계획을 철회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은근슬쩍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모든 건 제레미의 의중을 떠본 뒤 진행해도 늦지 않을 터.

“……사실 목걸이를 빼내 오기 위해 황자비를 죽이려 했었습니다.”

“……뭐?”

“그래서 독이든 뭐든 써보려 했으나…… 결국 죽이지 못했습니다.”

“죽이지 못했다고……?”

레틴의 말을 반복하는 제레미의 시선이 서늘했다.

“내가 언제…….”

제레미가 잔잔히 눈을 내리깔았다.

고요한 정적을 지키는 그의 모습은 슬픔을 머금은 표정이 아니었다. 감정이 사라진 메마른 눈동자는 안이 텅 빈 조각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틴은 그런 제레미를 보며 덜컥 겁이 났다. 단단한 호수의 빙판 위로 자신이 균열을 그려낸 것만 같아서.

레틴은 머릿속의 계획을 수정했다. 그 첩자를 죽이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조금이라도 상황을 수습해보고자 레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제레미였다.

“내가 언제 그녀를 죽여달라고 했어. 말해 봐, 레틴 에반스 경.”

레틴을 차갑게 부른 제레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둠에 물든 한 쌍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레틴을 향하고 있었다. 고요한 분노 속에 목이 졸리는 듯한 압박감이 감돌았다.

“송구합니다, 황자님.”

레틴이 깊이 고개 숙여 제레미에게 사죄했다. 그나마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힐레인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를 한 상태라면, 그는 이렇게 제레미의 앞에서 서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제 주군의 분노는 컸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레미를 십 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 봐왔던 레틴은 알 수 있었다. 고요함 속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다는 걸.

레틴은 그가 분통을 터뜨리는 것보다 차갑게 분노하는 게 더 무서웠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함이 흐르고, 잠시 후 제레미가 몸을 움직였다. 그는 레틴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낮게 읊조렸다.

“나는 힐레인을 사랑해.”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차갑게 울렸다.

“……!”

“사랑하고 있어.”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찬물처럼 시린 빛을 머금었다. 그 속에 깃든 진심을 읽은 레틴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사랑하고 있다. 레틴을 옭아맨 건 힐레인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나 경고 따위가 아니었다.

굳이 레틴을 벌하거나 협박할 필요는 없었다. 다름 아닌 사랑 고백이, 레틴으로부터 힐레인을 지킬 방법이란 걸 제레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힐레인을 사랑해. 내 목숨보다도.”

제레미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더 이상의 부연은 거부한다는 듯,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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