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 넌 나를 낯설게 만들어 (42/120)

42. 넌 나를 낯설게 만들어

‘그렇다면 배후가 누구지?’

시녀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은 아닐 터. 하지만 배후에 대해 알아보는 건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인의 앞이 아닌가. 황자궁 소속 시녀와 관련된 독, 그것을 삼킨 황태자의 사람.

‘자칫 황자님이 배후로 지목될지도 몰라.’

어쩌면 황자궁의 수장인 제레미가 의심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자, 마음껏 고통을 토해낼 수도 없었다.

다수의 용의자 중 한 사람에 그칠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싫었다. 아인의 의심 어린 눈초리가 닿는 그곳에 제레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쿠키에 묻은 독이 맹독은 아니라는 거였다. 나를 죽일 목적으로 사용한 건 아니었는지.

“저는…… 괜찮습니다.”

아인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한 어지럼증이 덮쳤으나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황태자님 손은 괜찮으신지요.”

아인의 관심을 돌려놓기 위해 그의 안위부터 물었다. 아인의 눈동자가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등으로 닿았다. 조용한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고작 이 정도의 상처보다는, 네가 쓰러질뻔한 연유가 더 궁금한데?”

“……요 며칠 목걸이 때문에 밤잠을 설쳐 피곤했나 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어설프게 보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통을 감추었다.

부디 아인이 속아주길 바라며 시선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심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인의 의중을 내가 읽어낼 수 있을 리 없지.

“피곤이라……. 그럼 이 차를 한 잔 마셔보는 게 어떤가 황자비. 피로에 좋다고 하더군.”

아인이 손을 살짝 세우자 멀리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조용히 다가와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곧 테이블 위로 새로운 찻잔이 차려졌다.

나는 하얀 다기 안으로 알맞게 들어찬 연갈색의 홍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은은한 향 뒤로 쓴맛이 뒤따랐다. 카페인 함량이 높은 차인지, 독이 지나간 자리를 고스란히 따라 내려간 차가 속을 긁고 지나갔다.

‘으윽, 아프잖아!’

순간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 급히 숨을 참았다.

딱 죽기 직전까지의 고통을 참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쨍- 하는 찻잔 부딪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반면 아인은 조금의 잡음도 없이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재미난 연극을 지켜보는 듯한 아인의 표정에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둘이 차를 마시는 건 처음인가?”

“그……렇죠.”

서늘한 시선이 내 얼굴 곳곳에 닿았다 떨어졌다. 불안한 마음에 아인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안심하라는 듯 핏빛의 입술을 말아 올렸다.

“몰랐는데 꽤 흥미롭군. 황자비와의 티타임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아인의 목소리에 진득한 흥미가 배어 있었다.

‘흥미롭다고?’

아인이 지루함을 느껴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낭패감을 느끼며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대체 뭐가 흥미롭다는 거지? 내가 차를 마시는 모습이 웃긴가.

어차피 속이 너무 쓰려 더 이상 차를 마시지 않으려던 참이었다. 식어가는 차를 바라보는데 그사이 차를 한 모금 삼킨 아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차가 입에 맞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은은한 향이 좋고, 혀를 괴롭히는 쓴맛도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며 눈을 찡그리자 아인이 즐겁게 웃었다.

“그럼 마셔, 독이 든 것도 아닌데.”

독이라는 말에 눈동자를 우왕좌왕하다 떨리는 손을 차로 가져갔다. 찻잔이 당황한 얼굴을 가려줄까 하여.

쓴 홍차가 속을 적시자 이미 한차례 후벼 파진 위장이 요동을 쳤다.

억지로 머금고 삼키자 어느덧 찻잔의 반이 비었다. 더 이상은 못 마시겠다 생각하며 테이블 아래의 손으로 슬그머니 아랫배를 감쌌다.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 주기를 기다리던 그때였다.

아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힐.”

“네.”

황자비가 아닌 힐이라는 호칭에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가 나를 힐이라 부른다는 건 나를 그림자 기사로 대하고 있단 뜻이니까.

긴장한 채 그의 명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네게 독을 먹인 자를 찾아.”

“……!”

젠장! 내가 독을 먹은 걸 눈치챘었던 거야?

흠칫 어깨를 떨며 아인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엔 묘한 압박감이 묻어 있었지만, 입술은 고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일주일 줄게.”

“……!”

시한부 선고와 같은 낮은 울림이 귓전을 때렸다.

“그땐 독을 먹은 걸 숨긴 이유도 함께 들려줘야 할 것이다. 힐.”

아인이 우아하게 차를 머금었다. 모든 것을 발아래 두고 있는 듯 느른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감히 네가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는 듯 진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알고 있었나요?”

망연자실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인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지는 게 보였다.

“속아줄 걸 그랬나?”

내가 독을 삼킨 걸 눈치챘구나. 낭패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태연한 척 거짓을 연기했으니 신뢰도가 깎여나갈 게 불 보듯 뻔했다.

비단 신뢰도만 관련된 일이라면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제레미를 보호하기 위해 벌인 거짓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잘하고 있는 제레미까지도 나 때문에 의심받을지도 몰라.’

뭐라고 말해야 이 순간을 무마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 당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네. 속아주지 그러셨어요.”

“왜?”

그가 웃었다. 그러곤 재밌으니 어서 더 해보라는 듯 느긋하게 차를 들었다.

“독에 당한 걸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바보같이 독에 당해 약해져 버린 부하를, 황태자님은 가차 없이 버리실 거잖아요.”

버린다는 말에 아인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아래로 내렸다. 찻잔 뒤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곧게 다물어져 있는 게 보였다.

‘어떡하지? 이유가 그럴듯하게 들렸으려나?’

하지만 그의 반응을 채 살펴보지도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또 한 차례 극심한 두통이 몰려온 탓이었다.

“으윽.”

나는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차디찬 바닥으로 쓰러졌다. 놀란 시녀와 시종들의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렸지만 그것은 아인에 의해 제지되었다.

“모두 나가.”

아인의 한 마디에 궁인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텅 빈 온실 안엔 아인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뭐야, 왜 사람들을 물려? 진짜 나를 버리려는 건 아니지?’

덜컥 두려움이 몰려오자 마음 놓고 기절해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내 눈을 덮은 아인의 커다란 손을 덥석 붙들었다.

“지난번 약속, 기억하고 계시죠?”

뜨거운 숨과 함께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일로도 저를 안 죽이시겠다고…….”

마지막 힘을 짜내 겨우 뱉어낸 말인데, 아인은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하얀 셔츠 깃으로.

“약속, 지켜…….”

이 나쁜 놈아.

잦아드는 의식 사이로 아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 * *

아인은 기절해버린 힐레인을 바라보며 픽 하고 짧은 웃음을 흘렸다. 안 죽이겠다는 자신의 말에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는 언제고. 기절하기 직전에 당부하는 말투가 제법 간절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든 혼자서 고군분투 하던 아이였는데. 하지만 제게 매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아인은 생각했다.

저를 속이려 한 것은 꽤 괘씸했지만.

‘무엇 때문에 날 속이려 했느냐.’

머릿속으로 의문이 찾아들었다. 힐레인은 자신의 앞에서 독의 고통을 숨기려 했다. 버려질까 봐 차마 말을 못 했다는 앙큼한 변명을 남기며.

그간 수없이 버려진 그림자 기사들을 떠올려봤을 때 힐레인의 염려가 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장면 하나가 자꾸만 그의 의심을 부추겼다.

샨 크로비체에서 한데 엉겨 있던 두 남녀. 농염한 키스를 아낌없이 부어주던 여자.

아인은 그때 힐레인을 떠올렸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직감적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 코르티잔이 힐레인일 가능성은 몹시 희박하다. 아인은 명쾌한 이성을 따라 근거 없는 의문을 흘려 없앴다. 하지만 지금, 이상하게도 그때의 그 불쾌감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힐레인의 거짓말로 인해.

지금껏 힐레인은 제 명령을 벗어나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실이 달린 인형처럼 잘 움직여주었다.

가끔 특유의 엉뚱한 방식이 가미되기도 하고, 임무에 실패해서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과 연결된 것이 그간 묘하게 기꺼웠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차라리 제 앞에서 중독된 몸을 고쳐달라고 요구했다면 기분이 한결 나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개입을 막고, 생각을 숨겼다. 아인은 그 사실이 불쾌했다.

자신이 걸어놓은 실을 끊고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녀가 낯설었다.

지금 느끼는 불쾌감과 낯섦은 샨 크로비체의 여인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네가 아니잖아, 그렇지?”

밤바다처럼 차갑게 일렁이는 시선이 힐레인에게로 가서 닿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위를 배회했다.

“하아……. 아파.”

힐레인의 터져 나온 신음에, 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인이 천천히 손을 내려 그녀의 뺨을 감쌌다. 하얀 뺨 위로 손바닥이 닿자 보드라운 솜털이 그의 손을 간지럽혔다.

“넌 나를 참…….”

아인이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힐레인의 달뜬 숨이 아인의 피부에 닿았다.

“낯설게 만들어.”

아인이 힐레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반쯤 내리깔린 속눈썹 사이로 힐레인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인에게서 스며 나온 잔잔한 빛이 힐레인에게로 녹아들었다.

얼마간 힐레인에게 머물던 아인이 스르르 눈을 떴다.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잠든 힐레인이 보였다. 새근새근 내쉰 작은 숨에 향긋한 홍차 향이 배어 있었다.

아인은 잠에서 깨기 싫은 사람처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옷자락 사이에서 힘을 잃은 보석이 흘러나왔다. 힐레인의 몸에서 독을 빼내기 위해 사용한 마법의 돌이었다.

아직 힐레인의 체내에 독이 잔재하는 상태였지만 그는 더 이상 독을 빼내지 않았다.

남겨진 독은 힐레인에게 어떠한 부작용을 남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니, 늦게라도 치료해주면 그만이었다.

“이건 나를 속인 벌.”

그의 속삭임에 힐레인이 부당하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네게 독을 쓴 자를 탓하려무나.”

아인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 너머에는 미약한 광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자를 알아낼 수는 있겠느냐.”

아인이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탐스러운 연분홍빛 입술에 현혹되기라도 한 듯, 그가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말간 빛으로 반짝이는 힐레인의 입술 위로 섬세한 손가락이 스쳐 지나갔다. 힐레인을 가득 담아낸 아인의 금안이 어둡게 일렁였다.

“이번엔 진실을 가져와. 내 의심이 걷히도록.”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무미건조한 눈빛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