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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독은 누구에게로 (40/120)

40. 독은 누구에게로

목걸이로 인한 고민이 모두 사라진 그 날 밤, 나는 기분 좋게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건 내게 허락된 평온이 아니라는 듯 무의식 사이로 악몽이 찾아들었다.

꿈의 첫 단락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 꿈이 악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수많은 밤을 걸쳐 닳도록 재현되었던 꿈이었기에.

하지만 악몽이 주는 공포감만큼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꿈에서 깨고자 부질없는 저항을 해 봤지만 머릿속엔 이미 3년 전의 폭발장면을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쾅! 쾅!]

내가 누른 버튼 하나에 수십 개의 폭탄이 광장의 바닥을 갈랐다. 평화롭던 축제의 현장은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쓰러진 부모를 옆에 두고 엉엉 우는 아이. 죽은 연인을 품에 끌어안은 사람. 건물 잔해에 깔린 주검들.

그 지옥을 구현한 악마는 나였다.

그리고 그 악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한 사람, 나는 동생 테이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품에서 인질로 사로잡혀 있었던 그 아이는, 내가 저지른 그 모든 악행을 다 지켜봐야만 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그랬다고는 말 하지 마. 나에게 위로받으려 하지 마. 나는 당신이 무서워.]

테이는 내게 차가운 말을 남기고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쯤 17살이 되었을 그 아이. 감히 보고 싶단 마음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또 미안했지만, 터져 나오려는 그리움을 참을 길이 없었다.

보고 싶어.

“……테이.”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제레미가 몸을 트는 게 느껴졌다.

‘황자님께 들키고 싶지 않아.’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하지만 마침 창밖에서 들려온 천둥소리에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하늘을 찢을 듯한 소음은 꿈속에서 들었던 폭탄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혹여 제레미가 볼까 봐 꾹 눌러 참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천둥소리는 계속되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모든 게 다 만족스럽고 평온했는데. 하늘까지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네 자리는 여기야. 하고 누군가 강제로 끌어내린 것처럼.

“그대가 잠이 들면.”

그런데 그때였다. 모든 게 다 괜찮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어깨를 감싸는 포근한 손길이 느껴졌다.

“나 나비처럼 날아 그대의 이마에 꿈 가루를 뿌리고 가리.”

제레미는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불러주었던 그 노래를.

조곤조곤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천둥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처럼.

“포근히 잠들어요.”

제레미가 떨고 있는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레미의 품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운 향에 어쩐지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던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익숙한 마력이 스미고 나는 그대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완전히 잠이 든 걸 확인한 제레미가 자장가의 마지막 가사를 불렀다.

“……사랑.”

떨고 있는 그녀에게 짐이 될까 차마 앞에서는 불러보지 못한 말이었다.

* * *

누군가와 함께 잠이 든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었나? 어젯밤 악몽을 단번에 날려버렸던 제레미의 자장가를 떠올렸다. 악몽에 시달린 나를 다독였던 목소리는 어둠을 가른 아침 햇살처럼 감미롭고 포근했다.

덕분에 악몽을 꾼 다음 날이었으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 꿈을 꾼 다음 날엔 항상 안 좋은 일이 따랐기에 온종일 마음이 불편하곤 했는데.

제레미에게 고맙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 마침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테이는…… 힐레인의 동생이지?”

그의 물음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테이 리야. 그가 내 동생이라는 사실은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신부의 동생 되는 사람이니, 제레미가 알고 있다 해서 이상한 일도 아니고.

하지만 테이에 관한 이야기는 내게 있어 금기였다. 가장 오랫동안 아물지 않는 상처였고, 흉터로 남는 것조차 거부한 곪은 상처였다.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더 이상 묻지 말아줘요.’

나는 온몸으로 거부반응을 드러내 보였다. 눈치가 빠른 그가, 내 분위기를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는 계속해서 질문을 이었다.

“그동안 생각만 하고 말은 못 했었는데, 신부 가족들을 황궁에 초대하는 게 어떨까?”

가족이라고 해봐야 얼굴도 안 보고 사는 아버지와 잃어버린 남동생이 전부였다. 한쪽은 절대 초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고, 한쪽은 연락도 닿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반응에 제레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런 관례가 있기도 하고……. 제레미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신부의 가족들이잖아.”

“괜찮아요, 챙겨주시지 않아도.”

“하지만 제레미가 대접을 해드리…….”

“필요 없다고요!”

소리를 지르자 제레미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풍성한 은빛 속눈썹이 잘게 흔들렸고, 연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난 나쁜 년이야.’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러버린 걸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뭐라고. 저렇게 상처받은 표정이란 말인가.

하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표정은 펴질 생각을 안 했다. 말투도 방어적으로 흘러나왔다. 잔뜩 날이 서서는.

“제 가족들은 제가 챙길게요.”

나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와 버렸다. 충격에 휩싸인 제레미만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

* * *

용기를 쥐어짜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땐 이미 제레미는 자릴 비운 뒤였다. 가슴을 누르고 있는 죄책감을 바로 덜어내긴 틀린 것 같았다.

‘나중에 꼭 사과해야지.’

무거운 마음을 누르며 책상에 앉았다. 그간 목걸이를 해결하느라 해야 할 일을 잔뜩 미뤄둔 탓이었다.

‘헤렌 축제가 이제 3주밖에 안 남았어. 힐레인, 집중해. 어떻게 황녀님과 황자님을 지켜낼 것인지 집중하라고!’

3주 뒤 있을 헤렌 축제에서 황녀는 죽는다. 어쩌면 제레미와도 연결되어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 미리 대비를 해둬야 하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는 거야?

결국 30분째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회귀 전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데 떠오르는 건 오직 황자님의 상처받은 얼굴뿐이었다.

‘그러게 왜 황자님한테 화를 내서는. 황자님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벽에 기대어 머리를 콩콩 박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중했던 머리통이 이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안 되겠어. 그냥 지금 바로 사과드리러 가자. 근데 뭐라고 하면 좋지?’

괜찮은 사과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센을 포함한 시녀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아기자기한 모양새를 한 쿠키였다.

“쿠키?”

“아침 식사도 거르셨잖아요, 차와 함께 간단한 요깃거릴 준비해봤어요.”

“나 먹으라고 일부러 준비한 거야?”

의아한 얼굴로 센과 시녀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아침을 거르면 그런가 보다 하고 무관심하게 넘기던 그녀들이 이렇듯 살갑게 다가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가 봐도 뜬금없다 싶은 것인지 센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컬스병을 이겨낸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잘 드셔야죠.”

“응? 나 걱정해주는 거야?”

“화, 황자비님이 돌아가시면 저희는 실직자 되라고요?”

내 직접적인 물음에 센이 볼을 붉혔다. 뒷배 없는 황자비라고 데면데면해 하더니. 그래도 내가 죽을까 봐 많이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알고 보면 참 정이 많은 사람이라니까.

“그런가? 하하. 잘 먹을게. 고마워.”

센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귀여운 쿠키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황자님과 함께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센을 불렀다.

“센.”

“네?”

“이것들 좀 바구니에 싸줄래?”

다과를 보며 용기를 얻었다. 함께 다과를 들며 사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힐레인은 손수 다과가 든 바구니를 들고 방을 나섰다. 황자비 정도의 신분이라면 시녀 한둘 정도를 데리고 외출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녀는 혼자 가는 게 편하다며 시녀들에게 자유시간을 주었다.

평민과 다름없는 남작가의 신분이었단 점과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아는 시녀들은 굳이 따라가겠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유시간을 만끽할 수 있으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주인이 자릴 비운 황자궁은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기사들은 중앙궁과 같은 삼엄한 경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고, 까다롭지 않은 주인을 모시게 된 시녀들은 여유를 부렸다.

그리고 이런 안온한 분위기는 낯선 이의 침입을 허락하기 쉬웠다.

관리가 소홀한 황자궁의 빈방,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간을 조용히 오갔다.

“시키는 대로 잘하였느냐?”

“예, 주신 것을 다과에 고루 섞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왜? 들키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것이 아니고……. 황자비님께서 다과를 바로 드시지 않고 바구니에 싸서 들고 나가셨습니다. 홀로 산책하는 걸 좋아하시니…… 후원에 나가서 드시지 않을까요?”

“뭐?”

그늘 속에 모습을 숨긴 자가 놀란듯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찾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래, 뭐. 어찌 됐든 황자비가 독을 먹기만 하면 되니까.”

검은 인영이 시녀에게 수고비를 건넸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챙긴 시녀는 꾸벅 인사를 한 채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 * *

제레미가 향한 곳을 물어물어 도착한 곳은 귀빈들이 머무는 남쪽궁이었다.

연회는 이미 끝이 났으나 남쪽궁은 귀족들로 가득했다. 남쪽궁을 한 달 정도 더 개방한 탓이었는데, 이는 먼 길을 달려온 지방 귀족들에 대한 황실의 배려였다.

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남쪽궁 정원을 둘러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황자님이 이런 데 올 리는 없는데.’

온갖 난잡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곳에 굳이 제레미가 행차할 이유는 없었다. 귀족들의 가십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고로 이곳에 제레미가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단 말씀.

‘젠장, 황자님이 여기 있다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기사에게 길을 물은 게 화근이었어.’

나는 마지막에 만났던 기사 한 명을 떠올렸다. 맹한 얼굴로 이곳을 가리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괜한 걸음을 했다 싶었다.

내친김에 루의 상태나 보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황자비가 낯선 남자의 방에 방문했다? 그만한 가십거리도 없지 싶었다.

우연히 마주치면 또 모를까, 일부러 찾아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도 봐. 귀족들은 아닌 척 시선을 비키다가도 종종 내게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다과 바구니로 향한 비웃음은 덤이었다. 어떻게든 귀족들과 연을 대보려 가져온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서커스 단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고위 귀족과 연을 맺어 나쁠 건 없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작가 출신인 나를 그들이 구태여 반길 필요가 있을까. 사교계 데뷔를 포기한 14살, 그때 이미 뼈저리게 느껴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배척당할 바에야 내가 먼저 배척해야지.’

물에 뜬 기름처럼 귀족들 사이를 빠져나가던 그때였다.

후웅-.

정원의 장미 향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탓에 머리에 쓴 모자가 벗겨지고 말았다.

‘이런. 괜히 썼어.’

하늘에 닿았다 떨어지는 모자를 야속한 시선으로 뒤쫓았다.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꼭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저러다 곧 귀족들 발아래로 추락하고 말겠지? 난 저들 앞에서 허리 숙여 모자를 주워야 하고.

‘그냥 확 버리고 가?’

내가 썼던 모자가 저들의 구둣발에 밟힐 걸 생각하니 찝찝함이 밀려와 할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팔랑거리며 날아가던 모자는 뜻밖에도 한 남자의 손에 안착했다.

‘저 사람은.’

화려한 귀족들 사이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서 있었다.

“루 대공…….”

“황자비님을 뵙습니다.”

루가 단정하게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든 바구니를 발견한 것인지 루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빛났다.

모두가 비웃기만 하던 바구니임에도.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습니다.”

루가 배 위에 손을 얹으며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그런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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