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가 널 두고 누구와
“하…… 이 상쾌한 공기, 맑은 하늘!”
황태자궁을 나오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죽다 살아난 탓일까? 온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보고하러 와 볼 걸 그랬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황태자궁을 빠져나오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고 과격한 기척이.
‘뭐지?’
황태자궁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던 기척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장 방향을 튼 무언가가 이번엔 나를 향해 돌진했다.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아무래도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재빨리 다릴 움직여 후원을 내달렸다. 평소 속도에는 좀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거리가 벌려지지 않았다.
‘빠르다. 대체 누구지?’
나는 나를 필사적으로 뒤쫓는 의문의 인물을 생각하며 눈을 찌푸렸다. 50걸음 정도 차이가 났던 거리는 어느덧 10걸음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러다 따라잡히겠어.’
아직 살았단 기쁨도 만끽하지 못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남들은 고생 끝에 행복이 온다는데, 난 왜 항상 고생 끝에 더한 고생이 오는 것만 같지?
스스로도 참 억울하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
어느새 나를 추월한 남자는 내 쪽으로 돌아선 채 팔을 벌렸다. 가속도가 붙어 멈출 수 없었던 나는 그의 품에 그대로 돌진하고 말았다.
“윽!”
남자가 나를 안은 채 바닥에 넘어졌다. 남자는 여기저기 쓸려 아플 텐데도 나를 부둥켜안은 두 팔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하아, 하. 대공?”
턱 끝까지 닿은 숨을 몰아쉬자 풀 내음과 함께 루의 체취가 섞여들었다. 뜀박질에 놀란 폐부를 달래듯 부드러운 향이 가득 스몄다.
이제 좀 숨이 진정되는 것 같아 그의 품에서 상체를 살짝 들어 올렸다. 초록빛 잔디 위로 흐드러진 검푸른 머리카락, 말갛게 빛나는 하얀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황자비님?”
루가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내 멍해진 정신을 깨웠다.
“그,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뒤늦게 항의하며 눈을 찌푸렸다. 루는 멍하니 찌푸려진 내 눈썹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내 볼에, 입술에. 그리고 팔과 다리로 천천히 내려왔다.
“다행이에요……. 무사해서.”
루가 내 허리와 등에 팔을 두른 채 꼭 끌어안았다. 깊은 안도감이 닿은 한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무엇이 그리 다행인지 계속해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던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배시시 웃었다.
“뭐가 다행인데?”
다짜고짜 나타나 맹수처럼 날 뒤쫓더니 이젠 또 다행이라니? 뭐가?
뒤로 물러난 나는 여전히 누운 채 웃고 있는 루를 웬 미친놈을 보듯 쳐다보았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 스스로 해명하고 싶어질 법도 한데, 루는 계속해서 배시시 웃기만 했다.
“헤헤. 하하하.”
“어디 잘못 부딪쳤나? 바, 바보가 된 건 아니지?”
“당신이…… 살아 있어서 너무 기뻐요. 하하하. 어쩌죠? 웃음이 멈추질 않아요…….”
아무래도 그에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의 웃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한 10초 정도 지났을까? 인내심이 바닥나려 할 때쯤 루가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당신이 잘못됐으면 어쩌나 하고…… 많이 걱정했거든요.”
“내가 왜 잘못돼?”
“그 목걸이…….”
루가 시선을 내려 목걸이를 응시했다. 붉은 두 눈 가득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목걸이 때문에 많이 곤란했죠? 미안해요. 몰랐다고 해도…… 당신에게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버렸어요.”
으흠?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사과를 받을 입장은 아니었기에 조금 민망해졌다.
“왜 대공이 사과해? 목걸이를 훔친 건 난데.”
“훔친 게 아니라 제가 준 거예요. 제가 걸어줬으니까요.”
“뭐…… 어쨌든 대공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자,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자 루가 사양하지 않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루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단정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신에게 본의 아니게 위험을 안겨주고 말았으니 반드시 책임을 지겠습니다.”
“뭐?”
“그 목걸이로 인해 비롯된 모든 위험으로부터 당신을 지켜 드릴게요.”
루가 내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맹세의 서약을 하듯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 위를 드리우며 섬세한 곡선을 그려냈다.
“……나를 지켜준다고?”
갑작스러운 루의 맹세에 당황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싶던 차, 불현듯 루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응?! 루 대공!”
다급히 쓰러지는 그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잠깐 동안 기절한 듯 축 늘어졌던 몸에 이내 힘이 들어갔다. 내 어깰 잡고 부스스 고개를 든 그가 머릴 짧게 흔들었다.
“으음, 죄송해요…….”
“어디 아픈 거야?”
“아뇨?”
아픈 걸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 루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자 그가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긁었다.
“방금 전에 넘어진 바람에 발목을 살짝 삐었나 봐요.”
“으이그. 그러니까 좀 조심하지. 숙소까지 부축해 줄게.”
아픈 사람을 이대로 놔두고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들었다.
“휴, 겨우 찾았네.”
“……?”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름한 그늘에서 도베르가 걸어 나왔다. 어디서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난 또 황태자님이랑 한바탕 한 거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타박하듯 가늘어진 시선이 루에게 닿았다.
“한바탕?”
“그런 게 있어. 근데…… 자기, 황태자님을 뵙고 오는 길이야?”
“네.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았답니다.”
손바닥을 쫙 펼치며 무사함을 드러내자 도베르가 그럴 줄 알았다면서 덩달아 기뻐했다.
“황태자님은 역시 널 아끼…….”
“도베르 경.”
도베르의 말허리를 자른 건 루였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발목이 좀 불편해서 그런데 부축 좀 해주실래요?”
“으응? 그, 그래. 내가 부축해 줄게. 하마터면 사윗감 앞에서 말실수할 뻔했네.”
도베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주섬주섬 루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힐레인 너는 이제 가 봐, ”
아픈 사람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다 도베르와 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대공을 잘 부탁해요.”
“응응. 자긴 어서 황자궁으로 가봐.”
* * *
힐레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루는 태엽이 다 돌아간 인형처럼 무릎을 꺾었다. 도베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기절한 루를 모로 안아 들었다.
곧장 황실 치료사에게 데려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고갤 저었다. 마침 황궁에 머무르던 때 독에 당한 북부의 주인. 귀찮은 뒷말이 많아질 게 분명했다. 루 또한 그걸 원하지는 않을 테고.
‘숙소에 데려간 뒤 몰래 판님을 불러야겠다.’
도베르가 루를 안은 채 나무 위로 도약했다. 가벼운 고양이 같은 몸놀림만 봐서는 그가 다른 사람을 들고 이동 중이란 걸 전혀 몰라볼 정도였다.
잠시 후 루의 방으로 들어온 도베르는 그를 침대 위로 가지런히 눕혔다.
“끙.”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던 루가 갑갑한 것인지 셔츠 깃을 붙잡았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단추를 보던 도베르가 짧게 한숨을 내쉰 채 다가갔다.
“갑갑해…….”
“네네, 갑니다요.”
침대 위로 올라간 도베르가 빠르게 그의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허리 부근까지 단추를 풀자, 슬며시 벌어진 셔츠 사이로 예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베르의 시선이 땀방울이 맺힌 복근에 닿았다. 스르르 올라온 시선이 머무른 곳은, 루의 몸에서 유일하게 메말라 있는 입술이었다. 힘겨운 숨이 오가는 그곳으로 도베르가 진통제 한 알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린 후, 시종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촛불을 켜놓기 위해 들어온 시종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초를 놓칠 뻔했다.
“……!”
시종의 커다래진 눈이 침대 위의 루와 도베르를 향했다.
시종이 든 붉은 촛불이 어지럽혀진 침대를, 엉망으로 풀어 헤쳐진 루의 셔츠를, 루의 복근 위로 놓인 도베르의 긴 손가락을 골고루 비추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드러난 시종의 얼굴을 보던 도베르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대공이 나 때문에 많이 탈진한 상태인데…….”
“……!”
시종의 뺨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물 좀 가져다줄래?”
“예, 옙!”
시종은 있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에 발을 디딘 사람처럼 빠르게 이곳에서 벗어났다. 채 닫히지 못한 문 사이로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넘어지기라도 한 듯.
“난 왜 이런 장난이 재밌지?”
도베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환자 앞이니 장난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좀처럼 쉽게 자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쿨…….”
반면 루는 앞으로 자신에게 ‘세기의 바람둥이’ 이후 어떤 별명이 생기게 될지 전혀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시녀들을 모두 물린 후 나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내가 선택한 옷은 턱밑까지 프릴이 달린 흰색 원피스였다.
‘목걸이가 잘 가려졌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하는데 문득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온종일 실내에서만 머무른 사람처럼 느른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 오셨어요?”
“응, 나 왔어. 신부야.”
제레미가 연분홍빛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평상시와 같은 미소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색기가 흘러넘치는 것만 같았다. 탐스러운 포도알 같은 입술을 보며 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적으로 키스 때가 떠올라 두 뺨이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쑥스러움에 목을 긁자 제레미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목 부근으로 닿았다. 목걸이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던 그 순간, 제레미의 시선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왔다.
그윽한 빛을 발하는 시선이 이번엔 내 입술로 고정되었다.
“무슨 생각해?”
그가 연분홍빛 입술을 비스듬히 말아 올리며 물었다. 촉촉한 빛을 머금은 미소가 짓궂게 느껴졌다.
“……무, 무슨 생각이라뇨? 나 지금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볼이 붉어졌기에.”
“그건……. 황자님께서 제 입술을 빤히 보시니까…….”
“불편했으면 미안. 순간적으로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제레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이, 이 남자 지금 뭐라는 거야?
‘혹시 오늘 그 일로 키스에 눈을 뜨신 건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물었다.
“농담이죠?”
“네가 싫다면…… 농담으로 해도 되고.”
저 모호한 대답은 뭐지? 게다가 저 야살스러운 미소는 뭐고?
‘내가 울 순진한 황자님을…… 쾌락의 길로 인도한 건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제레미는 처음 만난 낯선 여인일 뿐인 샤샤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 줬었다. 어디 그뿐인가? 당시 제레미는 키스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처음 만난 여자와 키스하는 것도 좋고, 첩자에게 키스하는 것도 좋아진 건 아니겠지? 상대방이 누구인지 관계없이 키스 자체가 좋아졌다거나!’
오, 세상에. 아무래도 내가 천사 같은 제레미를 타락의 길로 안내해버린 듯했다. 이제라도 바로잡고자 제레미에게로 다가가 그의 두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황자님.”
“응?”
“아무하고나 키스하고 그러면 안 돼요.”
“신부가 왜 아무나야?”
“아무나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껴두세요.”
훗날 제레미만을 위하는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신부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아끼라니.”
내 말에 제레미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듯.
“이담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을 때…….”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말을 가까스로 막았다. 이건 훗날 황자비 직을 내려놓은 뒤에 말해야 하는 이야긴데…….
하지만 내 얘길 반 이상 들어버린 제레미는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잠시 후 제비꽃처럼 여린 눈망울이 점차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섬세한 곡선을 그리는 눈매 끝으로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내가 널 두고 누구와 키스하겠어.”
“……!”
당황한 나를 직시하는 시선에서 적잖은 반항과 고집이 묻어나왔다.
“제레미는 한 사람과만 키스할 거야, 평생.”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풍성한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툭- 하고 떨어져 내리고. 별빛을 머금은 눈물이 내 입술 위로 떨어졌다.
그늘이 드리운 눈으로 촉촉해진 입술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천천히, 내 입술을 쓸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을 기억해놓으려는 듯 그의 움직임은 몹시도 느렸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어깨를 움찔하자, 입술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대신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볼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키, 키스가 아니었네.’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나는 모른 척 다른 쪽 볼을 그에게 내밀었다.
왜, 왜 그렇게 봐? 볼은 두 개잖아? 그럼 뽀……뽀뽀도 두 번이지.
잠시 후 부드러운 감촉이 다른 쪽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토마토처럼 붉어진 내 볼을 발견한 모양인지 제레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