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울었느냐?
아인이 손으로 내 눈가를 쓸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뜨겁게 달아오른 곳만 골라 느릿느릿 쓸고 지나갔다.
“울었느냐?”
모닥불 빛이 스며 황혼처럼 빛나는 그의 두 눈동자가 나를 강하게 붙들었다. 조금은 화가 난 것처럼 보여 나는 본능적으로 진실을 감췄다.
“아니요…….”
“지금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저 귀신 같은 사람. 거짓말인 게 그렇게 티가 나나?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울긴 했는데요.”
“왜?”
“그게. 그러니까.”
아. 생각하니까 또 눈물이 나네. 눈물을 참으려 애를 쓰자, 이번엔 턱이 움찔움찔 떨렸다.
“목걸이가…… 목걸이가.”
내 얼굴은 현재 울상에 밉상까지 더해진 상태였다. 도저히 못 봐 줄 정도인지, 그런 내 얼굴을 보는 아인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목걸이가 뭐 어찌 되었단 말이냐.”
“목걸이가…… 안 풀려요……! 크읍.”
아인의 두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아인의 시선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내 눈물에 닿았다.
“크흡. 흑흑.”
주군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게 창피해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러자 아인이 내 손을 저지했다. 옷으로 대강 닦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인이 제 손으로 내 눈가를 닦아주었다.
“……목걸이가 안 풀린다고?”
“네……. 흡. 흐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인이 한 손을 내 목 부근으로 옮겨왔다. 그러곤 꼭꼭 여며져 있는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톡톡 풀어냈다.
잠시 후 짙은 남색의 보석이 모습을 드러내고, 목 부근에 아인의 서늘한 손이 닿았다.
움찔하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걸이를 살피던 그가 이내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마법이 걸려 있군.”
“네……. 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루 대공이 걸어주겠다기에…… 끄흡, 무턱대고 그러라 했는데. 그런데…… 목걸이가 안 풀리더라고요. 크흑.”
눈물을 연거푸 삼켜내며 겨우 말을 끝맺었다. 흐릿한 눈으로 아인의 반응을 살피는데 뜻밖에도 그는 옅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컬스병이란 꾀병까지 생각해낸 것이냐.”
“크흑, 끕. 네? 네…….”
“그런데 넌 왜 우느냐. 따지고 보면 임무에 실패한 것도 아니거늘.”
“……제 머리를.”
“……?”
“제 머릴 자르실 거잖아요!”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곧 죽을 마당에 그에게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었다.
“그러곤 가차 없이 목걸이를 가져가시겠죠, 흑흑흑.”
“…….”
하지만 정적이 계속되자 슬금슬금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나는 손가락을 살짝 벌리고는 그가 어쩌고 있는지 살폈다.
‘……응?’
아인은 내가 움직이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내 손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대체 나는 네게 어떤 이미지인 것이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입가에 허탈해 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니.
‘뭐긴 뭐야. 폭군이지. 조금 순화해서 말하면 마음씨 나쁜 악독 상사.’
죽어도 그 말만은 못할 것 같아 가만히 입만 꾸물거렸다.
하지만 아인은 내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본 것처럼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자를 것이다.”
“……저, 정말요?”
“그 정도로 가지고 싶은 물건은…… 아냐.”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아인은 가볍게 임무를 거둬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상시 그는 정말 필요할 때 임무를 내렸고, 실패해서 돌아오는 그림자 기사들에게는 냉정한 벌을 내렸다.
그걸 알기에 어느 정도 각오를 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쉽게 용서를 해 준다고?
“정말…… 저를 안 죽이실 거예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구나.”
상대가 당신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지. 우리 제레미 님이 내 상사였어 봐. 그냥 ‘목걸이 안 빠져요, 우헤헤.’ 하고 말았을 거야, 내가.
‘응?’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턱 아래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아인이 한 손으로 내 턱을 받친 채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 모닥불의 붉은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스며들었다. 빛의 농간에 두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진 특유의 위험하고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짙어 보이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까.”
“……!”
뜻밖의 물음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러곤 조금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날 죽인 적이 있잖아…….’
아인이 직접 죽음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가 심어놓은 맹세의 보석 때문에 죽은 전적이 있지 않나.
더 정확히는 맹세의 보석이 주는 세뇌에 불복종해서.
맹세의 보석은 암살 임무에서만 특별한 기능을 발휘했다. 그 기능은 그림자 기사가 목표물에게 살의를 느끼도록 점진적으로 세뇌를 거는 것이었다.
처음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임무 수행이 더디어질수록 살의는 더 강해졌다.
제레미를 죽이라는 명을 받았던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제레미를 향한 살의를 강하게 거부했었다. 그리고 점점 더 견고해지는 세뇌를 못 견뎌 끝내는 보석을 스스로 깨뜨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목숨을 잃었다. 그게 바로 내 첫 번째 죽음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아인이 나를 직접 죽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인과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아인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내가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까.’라는 그의 물음에 조금씩 반감이 밀려들었다. 그 기저에는 배신감이란 낯선 감정도 깔려 있었다.
‘배신감? 내가 아인에게?’
나는 지금껏 아인에게 배신감은커녕 어떤 원망의 감정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나는 언제 버려도 상관없는 도구일 뿐. 그걸 알고서도 배신, 원망, 서운함 따위의 감정을 느끼는 건, 괜한 감정 소모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의외로 답은 쉽게 떠올랐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반응을 세심히 살피고 있는 아인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님이 회귀 전과 달라져서?’
여전히 냉혈한에 폭군 같은 사람이지만 지금 그에겐 예전과는 다른 인간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미세한 수준이지만 조금 더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졌다.
그래서일까?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꽁꽁 숨겨져 있던 감정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지금의 아인에게는 말해도 될 것 같다고 여긴 것인지.
“네.”
단조로운 목소리로 내뱉은 솔직한 대답에 아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황태자님은…… 언제든 제 목숨을 거둬가실 수 있죠.”
명치 쪽을 손끝으로 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인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명치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째……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진실을 꿰뚫는 듯한 물음에 나는 시선을 가만히 아래로 내렸다.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줄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꿈에서요?”
그래서 애매하게 말끝을 올리며 대답을 피해버렸다.
“꿈에서 내가 널 죽였다고?”
“네. 명령에 불복종해서요.”
정말 회귀 전보다는 그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서운함과 원망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제멋대로 입밖에 튀어나와 버린 걸 보면.
반면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거라 생각했던 아인은 답지 않게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제 입가를 쓸었다.
“나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어…….”
“……!”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니, 설마 예전의 기억이 그에게도 남아 있는 건 아니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아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인은 손에 잡히지 않는 기억 속을 헤매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는 혹여 그가 제레미와 관련하여 뭔가를 떠올릴까 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되면 나를 당장 황자비 임무에서 제해버리지 않을까? 아니지,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수도.
“꿈에서 저는 뭐, 뭐 때문에 죽었는데요?”
일단 확인해봐야겠단 생각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손은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보던 아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
“다른 건 다 꿈처럼 몽롱한데.”
조용히 말을 잇던 그는 문득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걸 떠올린 것인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차가워진 널 안고 있던 기억만은…… 아직도 선명해.”
아인이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옷을 마구 구기고 있는 내 손을 밀쳐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손을 겹친 채 가만히 있었다.
마치 따뜻한 체온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의아한 기분이 들어 먼저 손을 놓을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네 꿈에선 어떠했느냐. 무엇을 거부했기에 죽임을 당했지?”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레미를 죽이란 명을 거역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자 아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슬쩍 시선을 피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내 행동이 아인의 호기심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무엇이기에?”
아인의 재촉에 결국 나는 백기를 꺼내 들어야 했다.
“그렇게 알고 싶어요? 말해줘요?”
“그래.”
그래? 그렇게 알고 싶다면 뭐.
“수청이요.”
거짓이라도 말해줘야지, 뭐.
“황태자님의 수청을 거부했어요.”
어떻게 내 꿈에 와서 그럴 수 있냐며 눈을 부릅 뜨자 아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감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고 화를 내진 않을까? 유심히 표정을 살피는데 별안간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수청을 들라 했다는 말이지…….”
어째 저를 모함하는 내게 화가 난 것이 아닌, 꿈속의 자신에게 화가 난 말투였다.
어라?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신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황태자님을 골려 먹는 날이 오게 되다니. 이게 말이 돼? 도베르도 못해본 장난일 거라는 생각에 묘한 뿌듯함까지 밀려왔다.
“어찌나 조르시던지. 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쓰레기군.”
아인이 차갑게 눈을 빛내며 허구의 자신에게 쓰레기라고 욕했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내가 장난이 너무 심했나?’
이런, 아무리 아인이 편해졌다고 해도, 장난을 칠 사람이 있고 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는데. 뒤늦게 반성하며 고개를 숙이자, 아인이 내 턱을 받치며 자신을 보게 했다.
“네 무의식 중에 존재하는 나는 목걸이를 거두기 위해 목을 자르고, 수청을 들지 않는단 이유로 죽음을 내리는 파렴치한인 듯한데.”
“그건…….”
“많이 서운하군.”
서운하다고? ‘너 따위가 감히 그런 생각을 품어? 죽어!’가 아니고?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 아뇨.”
“차라리 지금 확실히 얘기해둘까 하는데.”
아인이 가만히 시선을 마주쳐왔다. 따뜻한 금빛이 감도는 속눈썹 아래, 내 모습을 올곧이 담아낸 금안이 보였다.
“앞으로 나는 그 어떤 일로도 네 목숨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힐.”
그의 말이 머릿속에 잘 입력되지 않아 몇 번을 더 되새겨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인이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것 맞지?
목이 잘리지 않은 것도 감지덕지한데 거기다 뜻밖의 약속까지 받게 될 줄이야.
그림자 기사들의 목숨을 가차 없이 거두던 그의 지난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이건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
정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인을 올려다보자 그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네가 거부하는 한 수청을 들라고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인이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웃으며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다정함이 서려 있다고 생각되는 건.
내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