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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예쁜 내 머리통 (37/120)

37. 예쁜 내 머리통

황성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루, 도베르 두 사람과 함께일 땐 몰랐는데 홀로 걷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그나저나 두 사람 다 어딜 간 거야?’

대기하고 있겠다던 도베르는 뜬금없이 아인과 등장하더니 그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루 또한 도베르에게 가보겠다 말한 뒤 사라졌고.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으나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었다. 두 사람 다 무시무시한 실력자들이라, 어디 가서 해코지를 당할 위인들도 아니었다.

‘그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내 코가 석 자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는데 진척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 선에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끝내 목걸이를 풀지 못했어.’

계속 이 상태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목걸이를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몰라! 그냥 황태자님에게 가자.’

그래,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계속해서 속만 졸이느니 그냥 화끈하게 질러버리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고.’

한 걸음 뒤가 절벽이다 보니 사람이 매우 긍정적이게 되는 장점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태자궁이 가까워지자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댕강댕강…….’

황태자궁 정원에 우두커니 선 채 목을 쓰다듬었다. 울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하며 목을 쓰다듬은 지도 벌써 십 여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처럼 유능한 사람을 잃으면 후회할 거라고 말할까?’

하지만 대담하게 내 자랑을 늘어놓기엔 양심이 찔렸다. 전투력에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그 외 감시, 계략, 두뇌 싸움에는 모자란 부분이 너무 많으니.

‘아니면 미래를 알고 있으니 죽이지 말라고 할까?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지만…… 평년기온 같은 건 알려줄 수도 있는데.’

평년기온이라. 생각해보니 너무 쓸데없다. 아인이 농부도 아니고.

나는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울 겁니다’라고 보고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내 보고에 차가워진 아인의 표정도.

‘희극이 따로 없네, 에휴.’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내쉬자 마침 바닥에 고인 웅덩이로 내 얼굴이 비쳤다.

“예쁜 내 얼굴…….”

우는 바람에 눈이 퉁퉁 부어버렸지만, 그래도 내 얼굴이라 예쁘기만 했다.

‘아담한 수박 같은 머리통. 성능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소중한 내 머리통.’

예쁜 내 머리통아. 몇 시간 뒤에도 계속 나와 함께여야 해?

* * *

아인과 헤어진 도베르는 곧장 루가 있는 여관으로 왔다. 침대 위에는 도베르가 눕혀 놓은 그 모양 그대로 누워 있는 루가 있었다.

‘설마 죽은 건가?’

가까이로 다가가 루를 살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과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도베르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주었다.

“도베르…… 경?”

도베르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루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걸 보니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듯 보였다.

“의원을 데려왔어.”

잠시 후 의원이 루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의원은 심각한 얼굴로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내 영역 밖이군.”

의원이 뭐라고 답할지 알고 있었다는 듯 루의 표정은 침착했다. 의원은 고통을 어느 정도 줄여줄 것이라며 약을 몇 알 주고는 떠났다. 많은 양도 아니었다.

곧 죽을 거라는 걸 돌려서 얘기하는 것만 같아 도베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베르는 루가 꽤 마음에 든 상태였다.

놀려먹기 좋은 유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힐레인에게 맹목적인 게 좋았다. 솔직히 힐레인의 짝으로 몰래 점찍어 두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별을 가지게 될 줄이야. 도베르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스몄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루가 가볍게 말을 꺼냈다.

“저 안 죽어요.”

“……응?”

“제가 아플 때마다 열 일 제치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쿨럭. 전 그 사람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죠.”

루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말을 너무 많이 한 건지 조금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자, 일단 약부터 먹어.”

약을 먹은 루는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의원이 곧 죽을 사람이라 생각하고 아주 독한 진통제를 주고 간 모양이었다.

“힐레인은요?”

“대공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힐레인 걱정이야?”

“어쩔 수 없어요. 제가 머리가 꽤 좋은 편이라서 이 안에 공간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방대한 공간을 모두 힐레인이 차지하고 있어요.”

루가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이 대책 없이 맹목적인 멍멍이 같으니라고. 도베르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루를 바라보다가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놓았다.

“목걸이는 끝내 풀지 못했고 헤일은 놓쳐버린 상태야. 지금은 다 포기하고 황궁으로 돌아간 것 같아.”

“이런.”

루가 턱을 쓸었다. 몸만 정상이라면 당장 헤일을 찾아내 그녀의 앞에 대령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그 목걸이 말이야.”

“네.”

“그거 카야의 돌이었어?”

이미 아인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목걸이의 주인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웬걸? 루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표정이 되었다.

“카야의…… 돌이라뇨? 그거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성물 아니에요?”

“엥?”

“그 목걸이는 그냥 선물 받은 건데…….”

말꼬리를 흐리던 루가 돌연 표정을 굳혔다.

평범한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었다면 카야의 돌일 리가 절대 없다고 말했을 테지만, 선물한 자의 평상시 행실을 떠올려 보니 그런 확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시스 이 형 새끼가…….”

항상 부드러운 존댓말만 쓰던 루의 입에서 꽤 강한 된 발음의 욕이 스며 나왔다.

“형? 친형? 혹시 대사제 이시스?”

“네……. 그 목걸이 형님이 준 거거든요…….”

루는 평소 친형인 이시스로부터 받는 선물이 많았다. 힐레인에게 준 목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루가 형으로부터 받는 선물들 대부분은 ‘전설의-’, ‘성물-’, ‘00 지역의 보물’이란 칭호가 붙었다.

루가 예뻐서 주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그 중엔 숨은 의도를 가진 물건들도 몇 개 있었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루가 12살 때쯤이었나. 당시 17살이었던 이시스는 신성제국의 사제직을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작스레 본가로 돌아온 이시스는 별 설명도 없이 루에게 성물 하나를 건넸었다. 루는 제 형이 준 거라며 그것을 품에서 애지중지했었다.

하지만 알처럼 생긴 성물은 며칠 후 쪼그라들기 시작하더니 아예 터져버리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고대 악마를 봉인한 성물이었다.

자칫 악마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이었으나 이시스는 ‘역시 내 아우님이 이겼네요.’라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제 동생의 마력에 눌려 악마가 쪼그라들 걸 예상했다는 듯.

그날 이시스는 마검사였던 어머니로부터 아주 호되게 혼이 나고야 말았다. 루는 사람이 웃는 얼굴로도 울 수 있단 걸 알았다.

그 후 이시스는 루에게 안전한 선물만 보냈다. 한동안 잠잠했던 탓에 루는 이시스의 엉뚱한 전적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되는 거였다.

형은 세계 제일의 또라이라는 걸! 언제든 또다시 이상한 물건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인 걸!

“그거…… 진짜 카야의 돌일지도 모르겠어요.”

돌에 눈이 먼 자들로부터 성물을 지키긴 지켜야겠고, 신전은 영 믿지를 못하겠으니 골칫거리인 카야의 돌을 제게 던져준 것일지도 몰랐다.

속기 마검사씩이나 되는 녀석이 어디 가서 물건을 뺏기고 오진 않을 거라 판단했겠지.

앞뒤가 착착 맞물리자 루의 얼굴이 절망에 물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은 그저 목걸이를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했을 뿐인데. 그게 하필이면 카야의 돌이었다니.

카야의 돌은 신의 권능이 깃든 만큼 이를 얻고자 혈안이 된 사람들도 많을 터. 소지하는 자체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컸다.

즉, 지금 힐레인은 많이 위험한 상태란 뜻이었다.

“황자비님은 지금…… 위험한 거 맞죠?”

“조금…… 아니, 많이? 만에 하나지만, 최악의 경우엔 목이 잘릴지도.”

머리가 복잡했던 도베르는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뒤늦게 입을 가렸지만 이미 루가 들어버린 후였다.

“목이 잘린다니, 누구에게 말입니까?!”

루의 시선이 잘 벼리어진 검처럼 예리해졌다. 일순간 그의 주변으로 붉은 마나가 들끓는 용암처럼 피어올랐다. 아픈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황태자?”

루가 이를 갈았다. 힐레인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쉽게 손에 쥐고 흔드는 자라면 황태자, 그놈밖엔 없었으니까.

“꼭 그렇다는 건……!”

루는 도베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그 시각, 나는 아인에게 보고를 올리러 와 있었다. 울다가 그쳤다가, 수없이 많은 고민과 번뇌를 거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왔느냐, 힐.”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아인은 벽난로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벽난로의 붉은빛에 물든 금발이 마치 저녁 해를 삼킨 것처럼 고혹적으로 빛났다.

‘오늘도……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네.’

그는 모든 것이 자신과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듯 느른한 표정이었다. 풀어진 셔츠와 정돈되지 못한 머리카락이 그의 퇴폐미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그의 붉은 입꼬리 끝엔 서늘한 냉소가 묻어 있었다. 저럴 땐 필시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다는 뜻인데. 날을 잘못 잡은 건가?

낭패감에 입술을 꾹 물자 아인의 냉소가 짙어졌다. 느릿느릿한 시선으로 내 표정을 읽어내려가던 그가 입을 열었다.

“보고하러 온 것이냐. 아니면 두 번째 임무의 성과를 가져왔느냐.”

“후자입니다…….”

아인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곧게 파고드는 한 쌍의 금안을 마주하자, 순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이미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 호랑이 굴에 들어와 버렸으니, 이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고를 올려야 할 차례였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 루에게서 목걸이를 빼내온 과정들. 되도록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물론 샨 크로비체에서의 일과, 목걸이가 안 풀린다는 이야기만 쏙 빼고. 겁이 나서 제일 뒤로 미루긴 했지만…… 어쨌든 이것도 말해야겠지.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서 채 올리지 못한 보고를 하기 위해 입을 뗐다.

‘목을 댕강- 하진 않겠지……?’

내 상태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챘는지, 그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목걸이가, 그러니까 잠금이…….”

“잠깐.”

그런데 그때 아인이 한 손을 들어 올려 내 보고를 막았다. 나는 어렵게 열었던 입을 다시 꾹 다물어야 했다.

‘이제 좀 용기가 나려던 참이었는데……!’

원망기를 살짝 담아 아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가 내게로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이리로.”

가까이 오라고? 내게로 향한 커다란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다, 최대한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엇.”

그런데 갑자기 아인이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무방비 상태로 그에게 당겨진 나는 아인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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