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키스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아인으로부터 숨겨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제레미와 입을 마주쳤다.
이렇게 하면 제레미의 다리와 내 뒷모습 정도밖엔 보이지 않을 테니 정체를 들킬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샨 크로비체라는 장소 특성상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도 않을 테고.
다만 고민되는 게 있다면 제레미가 과연 내 키스를 받아줄까 하는 것이었다.
혹여나 나를 밀어내면 어쩌지? 제발 황태자님이 지나갈 때까지만은 참아줬으면 좋겠는데.
“음…….”
다행히도 제레미는 가만히 몸을 맡겨주었다. 잠시간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손이 부드럽게 내 허리를 휘감았다. 뒤에 사람이 있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제레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키스에 집중했다.
가만가만 입술 위를 두드리는 움직임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키스로 인한 고양감 탓인지, 아인으로 인해 빚어진 긴장감 탓인지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황태자님은 왜 안 가시지? 이 상태로는 내가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금방 지나갈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상할 정도로 주변이 고요했다. 혹여 무슨 낌새라도 눈치챈 걸까?
덜컥 몰려온 두려움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던 그때였다.
“황태자님.”
적막함을 깬 목소리의 주인은 도베르였다.
“헤일로 추정되는 자가 밖으로 도주한 것 같습니다.”
“…….”
아인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길지 않은 정적이었음에도 시간을 잘게 쪼개놓은 듯 길게만 느껴졌다.
“……가지.”
아인이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미친 듯이 요동치던 맥박도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간 건가?’
제레미에게서 살짝 몸을 떼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복도는 태풍이 지나간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하…….”
긴장이 탁 풀리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바로 하자 탁해진 연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뜨거워진 숨이 섞여들며 그와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 어쩌지? 얼굴을 못 쳐다보겠어.’
결과적으로 제레미를 지키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부끄러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도망갈까…….’
일단은 그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잔 생각으로 상체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시작했으면…….”
그가 손을 들어 내 움직임을 막았다. 한 손은 내 손목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볼을 부드러이 감쌌다.
“끝을 내야지.”
해갈을 호소하듯 바짝 메마른 음성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멍하니 입술을 바라보는데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제레미가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키자 자연스레 나는 뒤로 살짝 물러선 자세가 되었다. 줄어들지 않는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그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
나를 살짝 끌어당긴 그가 입술을 마주쳤다. 느릿느릿 파고든 시선이 허락을 구하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탁한 그림자가 드리운 시선에서 깊은 굶주림이 느껴졌다.
‘나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그때 제레미의 움직임이 갑자기 격정적으로 변했다. 내 무엇을 보고 허락이라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삐가 풀린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읍…….”
그는 오랫동안 굶주린 맹수처럼 나를 탐했다. 그러다가도 내가 버거움을 느끼고 주춤 뒤로 물러서려고 하면, 겁먹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어르고 달랬다.
모든 걸 내게 맞춘 그의 키스는 섬세하고 다정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 빠져들 정도로.
나는 몽롱한 상태에서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그의 살갗에 닿은 팔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 순간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본능 사이로 이성 하나가 고개를 빼꼼이 내밀었다.
‘이럼…… 안 되는데.’
욕망과 현실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미약하게나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 작은 움직임에 그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뒤로 물렀다.
“……?”
그는 명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는 충직한 기사처럼 가만히 내 입술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수십 번을 갈등하다 작게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솔직히 이만큼 말한 것도 용했다. 내 안은 여전히 본능과 이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이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간 본능이 이겨버릴 것 같단 생각에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지금 최선의 선택은 도망이었다. 아주 빠른 도망.
“갑, 갑니다!”
괴상한 인사를 집어 던지듯 내뱉고선 뒤를 돌았다. 그러곤 있는 힘껏 다리를 굴려 복도를 내달렸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단언컨대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속도였다.
* * *
끝내 헤일을 놓치고만 아인은 무리를 둘로 나뉘어 이동했다. 몇몇은 남아서 계속 헤일을 추적했고, 자리를 오랫동안 비울 수 없는 아인은 도베르에게 함께 성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도베르는 잠시 들를 곳이 있다며, 성문까지만 동행해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했다. 아인의 긍정적인 답에 도베르는 한 시름 내려놨다는 듯 속으로 깊게 안도했다.
‘대공한테 해독약을 먹이고 오긴 했는데…… 그래도 다시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쓰러진 루를 수습한 것은 도베르였다. 아인 몰래 루를 한 여관으로 옮긴 도베르는 상비약으로 가지고 있던 해독약을 루에게 먹였다. 딱 맞는 해독약이 아니라 완전한 해독은 어렵더라도 어느정도 효과가 있는 듯 보였다.
최소한의 조치를 마친 도베르는 루의 출입증을 들고 곧장 샨 크로비체로 향했다. 이번엔 힐레인을 지켜주기 위해서.
‘일복이 터졌구나, 도베르.’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샨 크로비체로 와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황태자님을 막지 않았으면 힐레인은 그 자리에서 발각되고 말았을걸?’
도베르는 복도 한 켠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키스를 하고 있던 힐레인을 떠올렸다.
‘근데 걔는 왜 거기서 키스를 하고 있었지?’
도베르는 아인의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은 혼이 반쯤 날아간 사람처럼 당혹스러워 보였다.
‘이게 뭔 일이래, 진짜?’
도베르는 혼란스러웠다. 목걸이를 풀라고 어렵게 샨 크로비체에 데려다 놓았는데.
힐레인은 풀라는 목걸이는 풀지 않고, 웬 남자 하나를 소파에 눕힌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농염한 키스. 그때의 그 충격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 힐레인…… 마냥 순수한 어린애로 봤었는데. 드디어 이성에 눈을 뜬 건가.’
사춘기를 맞은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다 큰 것 같아서 기특하기도 하고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사실 걱정이 제일 컸다. 아까의 그 박력을 보니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할지도 모를 일인데.
도베르는 자신이 성교육이라도 시켜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우리 힐레인……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아무나 막 붙잡고 키스한 건 아니겠지? 아까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도베르는 힐레인에게 깔려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렇다 싶은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나중에 꼭 내 앞에서 정식으로 소개하라고 말해야지. 이상한 놈이면 안 되는데. 적어도 나보단 검 실력이 좋아야 하고, 얼굴은 우리 황태자님보다 잘 생겨야 한다고. 황제처럼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는 바람둥이면 그 남잔 내 손에 죽는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향해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던 그때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릿속을 파고든 목소리의 주인은 아인이었다.
“도베르.”
“예, 황자님.”
“혹시 힐레인이 황궁 밖에 있느냐.”
“……!”
뜻밖의 질문에 티는 내지 않았으나 속으론 깜짝 놀랐다.
혹시 샨 크로비체에서 힐레인을 알아본 건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뜬금없이 힐레인에 대해 물을 리 없지 않나?
‘아냐, 그럴 리 없어.’
당시 힐레인은 가면을 착용 중이었고 아인에게 보인 거라곤 뒷모습이 다였다. 자신이야 뭐 힐레인의 인상착의를 미리 알고 있었으니 알아볼 수 있었다지만 황태자님은 그게 아니잖아?
도베르는 아인이 힐레인을 알아본 게 아닐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저 우연한 물음이었겠지. 그는 태연한 척을 가장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황자궁에 있을 겁니다. 컬스병 소란으로 되도록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도베르의 말에 아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부하 때문에 난감한 듯.
언제나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둔 것처럼 여유로워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도베르는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은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황태자님이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걸 실제로 보게 될 날이 오다니.’
도베르는 평소 제 주군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가시면 그보다 더 무서운 광경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게 여유, 무감정, 권태로움은 아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여유가 사라진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꽤 좋았다. 무엇보다도 목석 같은 아인을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 힐레인이란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목걸이 사건도 별 문제 없이 지나갈 것 같은데?’
단편적인 상황으로 유추한 결론이었으나, 도베르는 꽤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절대 네 목을 자를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던 것도 잠시, 도베르는 자신의 판단을 전면수정해야 할 위기에 빠졌다.
“카야의 돌은 잘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군.”
“카야의 돌……이요?”
카야의 돌이라면 아인이 예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마법의 돌 아닌가? 자신이 알기로 그는 꽤 오랫동안 돌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손에 거머쥐어야 할 물건처럼.
“그래. 그 아이에게 가져오라고 시켰거든, 카야의 돌이 박힌 목걸이를.”
목걸이라는 말에 도베르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러니까 지금…… 힐레인이 목에 걸고 있는 그게 카야의 돌이란 이 말……?’
오, 안돼. 도베르는 좌절했다. 아인이 오래도록 가지기를 염원했던 카야의 돌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황태자님이 힐레인을 아낀다지만…… 카야의 돌을 포기할 정도인가?’
도베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힐레인의 목숨이 위태로워……!’
* * *
그 시각 레틴은 헤일과 함께 샨 크로비체를 탈출해 여관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
‘황자님은 무사히 빠져나오셨을까?’
제레미가 속기 마법사이긴 하나 그를 홀로 두고 빠져나온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레틴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제레미가 무슨 일이 있어도 헤일을 빼돌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으니까.
‘그래도 황자님을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레틴이 헤일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자 의자에 묶여 있던 헤일이 몸을 움찔했다.
“너…… 너도 황태자 사람이냐? 날 죽일 거야?”
“아까 못 봤어? 황태자 사람들로부터 내가 당신을 구해낸 거!”
버럭 소리를 지르자 헤일이 몸을 움츠렸다. 그래도 저를 구해준 걸 아는지 최대한 레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하는 듯 보였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했지. 날 황태자로부터 지켜주었으니 그 대가로 내가 아는 정보를 다 말해줄게.”
“이렇게 쉽게? 거짓인지 알 게 뭐야?”
“나는 카야의 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있어.”
레틴이 헤일을 똑바로 주시했다.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내용이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레틴은 속는 셈 치고 헤일에게로 다가갔다.
“말해 봐. 거짓이면 죽는다?”
“……아까 그 코르티잔이 걸고 있던 목걸이. 그게 카야의 돌이야.”
헤일이 레틴에게 쉽사리 정보를 털어놓는 덴 이유가 있었다. 그는 카야의 돌을 소유한 자가 어서 빨리 밝혀져서 자신에게로 집중된 관심이 다른 데로 옮겨가기를 바랐다.
“사실이야?!”
“그래. 어쩌다 코르티잔의 손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해.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그 첩자가 목에 걸고 있는 게…… 카야의 돌이라니.”
레틴은 제레미가 귀띔을 해줘서 샤샤가 힐레인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 마주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하필이면 찾아 헤매던 목걸이까지 그 여자가 지니고 있었다고?
‘설마 카야의 돌이 이미 황태자의 손에 넘어간 상태인 건가!’
레틴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힐레인은 아인의 수하이니 그녀가 목걸이를 소유하고 있단 것은 카야의 돌이 아인의 수중에 있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아인에게 카야의 돌이 넘어가는 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인데.’
아니지. 아직 기회는 있어. 카야의 돌이 그 여자의 손에 있는 한.
“이봐, 그 여자가 걸고 있던 그 목걸이. 잠금을 풀 수가 없다고 했었나?”
“응. 마력이 있어야지만 풀 수 있는데 그 여자는 마력이 전혀 없는 모양이던데. 그럼 평생 목걸이를 풀 수 없어. 그 여자가 죽기 전까진.”
“……그럼 죽으면 풀 수 있다는 말?”
고개를 끄덕이는 헤일을 보며 레틴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가 황자비 임무 중인 그 여자를 당장에 죽일 것 같진 않고…… 그렇담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
레틴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 긴장한 탓인지 자꾸만 손바닥에 진득한 땀이 묻어나왔다.
“이봐. 그 말 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 알겠어?”
레틴은 이 사실을 제레미로부터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제레미의 상태로 미루어봤을 때 그는 힐레인이 죽는 걸 원치 않을 거다. 카야의 돌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다면 나라도…… 그 여자에게서 카야의 돌을 빼내 와야겠어.’
긴장감 탓인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제레미의 의견을 전혀 물어보지 않은 독단적인 행동. 그 뒤 무엇이 따를지 좀처럼 예측할 수가 없었다.
‘잘했다고 하실까? 혹은 그 첩자를 죽였다고 나를 원망하실까?’
레틴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예측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