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레미와 아인의 만남
“대공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샨 크로비체 입구에서 루와 마주친 아인이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루는 뜻밖의 인물을 만난 것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아……, 인사가 늦었군요.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그런데 이곳엔 어떻게 행차하게 되신 건지…….”
“샨 크로비체에 숨었다는 흉악범을 체포하기 위해 왔네.”
“직접…… 오신 겁니까?”
“번번이 놓쳤던 자라서.”
루의 질문에 여유롭게 답을 내놓던 아인이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루의 목 부근이었다. 아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루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았다.
‘너구나. 내 사랑에게 목걸이를 가져오라고 한 사람이.’
루는 들끓는 분노를 억눌렀다. 일전에 잠깐 힐레인의 생각을 읽었던 바로, 그녀는 아인의 수하 중 한 명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인의 뒤로 늘어선 다섯 명의 그림자 기사들을 보며 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창과 방패. 오직 물건으로 쓰이다 끝내는 녹슨 쇳덩이처럼 버려질 소모품. 루는 힐레인이 그러한 위치에 있단 사실이 서글퍼졌다.
아인의 곁에 있는 이상 힐레인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훔치라면 훔치고, 싸우라면 싸워야 하겠지. 매 순간 임무의 성패를 가늠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겠지.
루는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서늘한 눈동자가 아인에게로 향했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디 이번엔 그자를 붙잡을 수 있길 기도하죠.”
“…….”
루가 차가운 표정으로 아인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유한 사람이지만.’
루는 약지에 낀 반지를 돌렸다.
‘내 사람을 건드리는 자에겐 가차 없어.’
그리고 그 순간 루의 움직임에 생기를 얻은 반지가 반투명한 뱀의 형상이 되어 아인에게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목표물에게 천천히 독을 주입하는 마법 물품이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미약하게 중독시키도록 설계되어 있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들킬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아인이라는 것이었다.
“크윽……!”
샨 크로비체 밖으로 나온 루는 불현듯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무릎을 굽혔다. 고갤 내리자 다리를 깨물고 있는 뱀의 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인이 아닌 자신을 공격한 것도 기가 막힌데, 어떻게 된 일인지 물린 다리를 통해 다량의 독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독이 목표물을 바꾼 것도, 맹공을 퍼붓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방해가 끼어든 게 아니라면.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지탱한 루가 뒤를 돌았다. 멀리서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린 아인이 보였다.
‘당신이구나.’
아인을 담은 루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
아인은 바닥에 쓰러진 루의 모습을 음미하며 뒤를 돌았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 * *
나와 제레미, 그리고 헤일을 붙든 레틴까지. 우리 네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계속 따라오실 건가.’
제레미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듯 나와 헤일을 따라왔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2층까지 오면서 몇몇 남자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그때마다 제레미는 몹시 불쾌해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그는 아예 내 어깨에 자신의 겉옷을 걸쳐주기까지 했다.
“…….”
나는 물끄러미 어깨를 누르는 그의 외투를 바라보다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도 상냥하시네요?”
내 물음에 제레미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곤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의 10번째 애인이 될 수 있을까 해서.”
“…….”
정말로 샤샤에게 반했네. 그것도 아주 푹 빠졌어. 10번째 애인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나는 제레미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당신이 내 애인이 될 일은 없어요.”
“왜?”
“……나는.”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깊게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대충 머릿속에 떠오른 사실 그대로를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백치미를 가진 남자가 좋거든요. 근데 당신은 아냐.”
혀를 빼꼼 내밀어 보이곤 가차 없이 뒤를 돌았다.
“…….”
잠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던 걸음이 이내 내 뒤를 따랐다. 앞서 걷고 있었기에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걸음걸이가 아까보다는 가벼워진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우리는 2층의 조용한 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살벌한 미소를 띤 채, 레틴에게 붙잡혀 벌벌 떨고 있는 헤일에게로 다가갔다.
‘드디어 목걸이를 벗을 수 있는 건가?’
그동안의 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묘약을 먹고, 먹이고. 컬스병이라고 거짓말한 것도 모자라 코르티잔 변장까지. 아, 정말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지.
비릿하게 웃으며 비척비척 다가가자 헤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내……내게 묻고 싶은 게 뭐, 뭔데?”
나는 제레미가 꼭꼭 여며준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우연히 목에 걸었는데 풀리지가 않아서요. 잠금장치가 아예 없는 것 같아요. 마법 물품이라는데 혹시나 당신이 해답을 알고 있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뭐야, 그것 때문이었어?”
황태자와 별 관련이 없다는 걸 깨달은 헤일은 부쩍 안정을 찾은 모습으로 내 목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제발 목걸이 푸는 법을 알고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던 그때였다. 내 목걸이를 살피던 헤일이 갑자기 뒤로 넘어갈 듯이 깜짝 놀랐다.
“이거……! 이건!”
“왜요? 왜 그래요?”
뭐지 저 반응은? 이게 저렇게 놀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인가? 몸을 벌벌 떨고 있는 헤일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주었다. 헤일은 잠시 제레미와 레틴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별건 아니고.”
몸을 이렇게 떨 정도면 별 게 아닌 게 아닌데? 하지만 무엇이 두려운 건지 그는 계속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뭔데요? 말해주기 싫으면 이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이 목걸이 풀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건…… 착용자가 마력을 가지고 있어야 풀 수 있어. 마력이 없다면 착용자의 목숨이 다하지 않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을 거야.”
마력이 있어야 목걸이를 풀 수 있다고?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어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나 이러다 아인한테 죽는 거 아냐?
“그럴 리 없어요, 다시 한 번 보라니까요?”
하지만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 헤일이 정신을 잃었다. 그동안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았던 듯.
“엇……! 조심해요.”
비쩍 마른 가지 같은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그를 잡아주려 손을 뻗는데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제레미가 다가와 헤일과 나를 떨어뜨렸다.
“……?”
제레미는 헤일을 소파 위로 무심하게 내려놓은 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목걸이…… 내가 한 번 봐도 될까?”
“아뇨, 괜찮아요.”
보석 하나 박힌 평범한 목걸이긴 하지만…… 아주 눈도장을 찍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당분간 목걸이를 풀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목걸이를 손에 꼭 쥔 채 버티고 섰다. 잠시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제레미가 설핏 웃으며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이래 봬도 마법에 꽤 능통한데.”
그건 그렇지. 속기 마법사니까…….
“내가 그 목걸이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말에 속으로 심하게 갈등했다.
그는 천재 마법사니까…… 남들은 다 안 된다고 해도 그는 이 목걸이를 풀 수 있을지도 몰라. 아, 어쩌지. 보여 줘? 말아?
“잠깐 보여주는 건데 뭐 어때?”
“그……런가요?”
결국 제레미의 유혹에 넘어간 나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어쩌면 제레미가 짠! 하고 목걸이를 풀어줄 수도 있잖아? 만약 안 된다고 해도 흔한 디자인이라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열심히 합리화를 하고 있던 그때, 제레미가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레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쇄골 위로 닿은 낯선 감촉에 이상하게도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목걸이를 보여주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었나? 헤일에게 보여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는 가만히 시선만 올려 제레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입술밖엔 없었지만, 집중한 모양새가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치직-! 파츠츠!
기괴한 소리와 함께 목걸이를 잡은 제레미의 손이 검게 멍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제레미가 손에서 목걸이를 놓지 않았다. 손이 망가지든 말든 끝까지 해보잔 듯이.
당황한 나는 다급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뭐해요?! ……이, 이것 놔!”
“황자님!”
혼비백산이 된 레틴이 제레미를 부축해주었다. 나는 방금 전 상황에 잔뜩 놀라 어깰 떨어야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평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처 입은 당사자, 제레미였다.
“……안 되네.”
검게 멍이 든 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순간적으로 왜 그렇게 자기 몸을 함부로 쓰느냐고 욱할 뻔했지만, 샤샤의 입장에서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꾹 눌러 참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대신해 레틴이 제레미의 손을 꼼꼼히 살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황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손에 까만 멍이 들다니…… 아프진 않으세요?”
“별로…….”
저게 안 아프다고? 손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는데?!
화가 나 입술을 꾹 무는데 그런 내 행동을 오해한 것인지, 제레미가 시무룩하게 어깰 떨구었다.
“어쩌지. 내 힘으로는 잠금을 풀 수가 없어.”
지금 그게 중요해? 순간 화도 화지만 어이가 없었다.
천재들은 뭔가 사고방식이 다른가? 불가능한 걸 마주하면 손에 멍이 들든 말든 끝까지 해내고야 말겠단 오기가 돋고 그래?
“그냥 평생 차고 다닐 거야. 절대 안 풀어!”
이대로 있다가는 제레미에게 화를 쏟아낼 것 같아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차피 이곳엔 더 이상 볼일도 없고, 내가 사라져줘야 마법으로 치료하기가 더 수월할 테니까.
“잠깐만, 같이 가.”
“황자님! 헤일 이 자는 어쩌고…….”
“네가 잠시 지켜보고 있어 줘.”
레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레미는 기어코 나를 뒤따라 나왔다. 나를 붙잡아 세운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
“……?”
“그런 차림새로는 더더욱.”
제레미의 시선이 숄 밖으로 드러난 내 어깨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쩐지 나를 걱정해주는 듯한 모습에 기분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하……. 아직도 샤샤에게 관심이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확실하게 정을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문득 복도 끝 계단에서 아는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이런 데서 마주치니 신기하네요, 하하.”
이거 도베르 목소린데? 어디 갔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놀러 온 게 아니다, 도베르.”
잠깐. 옆에 누가 있나?
목소리를 들어보니 도베르는 현재 누군가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중인 듯했다. 누구랑 저렇게 얘기 중이야?
슬쩍 고개를 빼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문득 눈에 익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곧이어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한 하얀 피부와 턱선까지도.
‘황태자님이잖아?’
갑작스러운 아인의 등장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헉, 이를 어쩌지? 지금 내 뒤엔 황자님이 계신데!’
가면을 착용하고는 있었지만 가면이 제레미가 지닌 특유의 분위기까지는 가려주지 않아 불안했다. 게다가…….
‘아인은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데. 혹여나 제레미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조금의 위험이라도 남기고 싶지 않단 생각에 나는 후다닥 제레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손에서 문고리가 자꾸만 헛돌았다.
‘아, 안 되겠어!’
결국 문 열기를 포기한 나는 제레미를 데리고 복도 벽의 움푹 파인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소파와 협탁이 있는 그곳은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이었다.
“왜 여기……!”
내게 말을 걸려는 제레미의 입을 손으로 다급히 막았다. 다행히도 제레미는 나를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미치겠네!’
제레미는 어떻게 진정시켰다 쳐도, 황태자의 발걸음 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방 안을 수색해.”
“예!”
아인의 말에 그림자 기사들이 문을 벌컥벌컥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헤일을 찾나?’
문득 황태자의 이야기를 하며 벌벌 떨던 헤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보니 그가 괜히 그랬던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헤일과 함께 레틴까지 발각되는 게 아닌가 두려움에 떨던 그때, 레틴이 있었던 방문이 열렸다.
‘젠장……. 일이 꼬여도 이렇게 더럽게 꼬일 수가.’
꼼짝없이 헤일과 레틴이 발각될 것이라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없다고? 레틴이 헤일을 데리고 몸을 피한 건가? 방을 수색하고 나온 기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그런데 그때, 아인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아인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저곳에도 공간이 있다.”
아인이 가리킨 곳은 나와 제레미가 몸을 숨긴 공간이었다. 이윽고 기사들의 걸음이 가까워졌다. 이대로 가다간 발각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황자님의 모습이 드러나는 걸 막아야 해. 반드시.’
오직 그 생각 하나로, 제레미의 어깨를 소파 쪽으로 밀었다.
“……!”
소파 위로 드리워진 백금발,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 소파로 밀려난 제레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쉿.”
나는 그의 얼굴 양옆으로 손을 두었다. 그러자 내 세상이 온통 제레미로 가득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레미의 얼굴 위로 얼핏 당혹스러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짙은 그늘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빛을 잃지 않는 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등 바로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모든 망설임을 지우고 제레미와 입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