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를 미치게 만들 셈이야?
“나를 미치게 만들 셈이야……?”
남자가 백지 각서를 구기며 서늘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그걸 왜 구기냔 말도 못 붙여 볼 정도였다.
‘그나저나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야?’
눈을 가늘게 좁힌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면 속에 숨겨졌던 연보라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촛불의 빛을 받아 언뜻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황자님?’
나는 코를 살짝 킁킁거리며 몰래 그의 냄새를 맡았다. 제레미임을 증명하듯 상큼한 레몬 향이 느껴졌다.
‘진짜 황자님이잖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레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발 사이로 흘러나온 한 가닥의 하늘색 머리카락. 그럼 저 사람은 레틴? 두 사람이 샨 크로비체엔 왜…….
‘둘이 놀러 나온 거구나!’
나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놀러 나와도 하필 제국에서 제일 방탕하다는 샨 크로비체에 오다니.
게다가 여기는 단골이 아니고서야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두 사람 예전부터 뻔질나게 여길 드나들었다는 그 소린가?
당장에라도 제레미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미소를 지어냈다. 몰래 나온 거라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코르티잔으로 변장한 상태가 아닌가.
‘황자님은 나를 알아봤을까?’
막연한 의심이 피어올랐으나, 그건 아닐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만약 내가 힐레인인 줄 알았다면 그는 내게 접근할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피했겠지.
‘근데 샤샤한테는 왜 접근한 거지? 미치게 만들 셈이냐는 말은 또 뭐고?’
그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제레미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은 게임을 너무 못해.”
“……!”
제레미에게서 저런 돌직구 같은 말이 나오다니! 최애에게 묵직한 돌덩이를 맞은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항상 귀여운 백치미만 봐오다가 싸늘한 표정을 보게 되니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커흡, 내가 그 정도로 게임을 못하나? 못하는 게 답답해서 접근할 정도로?’
나는 입술을 꾹 문 채 게임판을 내려다보았다. 한 수만 잘못 둬도 질 게 분명한 위태로운 상황이다 보니, 어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답답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칫,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헤일이 심하게 잘하는 건데. 조금 울컥한 채 제레미를 올려다봤다.
“게임을 잘하든 못하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 물음에 제레미는 무언가를 고민하는듯하다 입을 열었다.
“차마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어. 참견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더군.”
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고? 천재가 보기엔 그 정도로 심각해 보이나? 그래도 꽤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종목이었는데.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자 제레미가 몸을 움찔했다.
“너무 기죽지는 말고…….”
“기 안 죽었어요……. 그리고 이건 잠깐 실수한 것뿐이에요. 곧 만회할 테니 저리 가서 구경이나 하시죠.”
“이대로면 질 게…….”
“거기 귀족 나리! 거참 참견이 너무 심하시군. 조금 있으면 끝나니 좀 비켜 서주시게.”
헤일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승리를 코앞에 두고 자꾸만 시간을 끄는 제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툭-!
그런데 스산하게 헤일을 노려보던 제레미가 갑자기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 도박판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꾸역꾸역 담아내고 있던 주머니는 약간의 충격에도 끈이 풀리며 내용물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오오-. 저것 봐. 금화야!”
금화도 보통 금화가 아니다. 꾸러미에서 촤르륵 쏟아진 금화는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이, 이걸 왜?”
좀 전까지 돈이 필요 없다고 말하던 헤일 조차도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이 여자 말고 나랑 붙지. 당신이 이기면 이 금화를 다 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저 여자에게 받기로 한 일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가 원하는 바를 한 가지 들어주는 거야.”
응? 지금 이 말은 노예가 되기 직전인 나를 구제해주겠다는 말인가? 왜?
의아한 생각이 들어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으로 내 어깨를 살짝 터치했다. 나는 살갗에 닿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표정을 굳혔다.
‘혹시 이 코르티잔한테 반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벚꽃 같은 머리카락에 하늘하늘한 드레스, 야한 화장까지. 심미안인 루와 유행을 선도하는 도베르가 꾸며준 샤샤의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 시선을 돌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루와 도베르도 예쁘다고 연신 칭찬해 주었지 않은가.
그렇담 혹시 울 황자님도 이런 샤샤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샤샤의 화려한 모습에 반했다거나.
‘샤샤에게 반하는 건…… 달갑지 않은데.’
그가 나를 구제해주는 상황인데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헤일 또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지 목소리를 드높였다.
“무슨 소리야? 게임을 새로 시작하자는 얘기야? 내가 다 이겨놓은 판인데 어림없는 말이지. 나와 게임을 하고 싶으면 이 판 끝나고 해. 자자, 손에 쥔 그 각서도 내려놓고!”
헤일이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한두 번만 수가 오가면 자신이 이길 게 분명한데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주변에 있던 구경꾼들도 그게 될 것 같냐며 비웃음을 흘렸다.
나는 제레미가 이대로 물러설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새로 시작할 거 없어.”
제레미가 눈으로 바도크 판을 슥 훑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 판 그대로 이어서 하지.”
“뭐?!”
“안돼!”
이해할 수 없는 제레미의 말에 나는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건 내가 봐도 완전히 진 판이라고?
제레미는 그런 나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더 이로울 텐데.”
“물론……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내가 양심이 찔려서 말해주는데, 이거 진짜 질 게 뻔한 판이라니까요? 뭘 잘 모르고 그랬나 본데 지금이라도…….”
“괜찮아.”
내 긴 설득에도 결국 제레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반면 돈에 홀린 헤일은 이제는 제레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얼굴이었다.
“내 수락함세. 자자, 그쪽 차례였으니까 두 사람이 한 번 자알 둬 봐.”
결국 내 만류 속에서도 게임이 시작되고 말았다.
‘황자님 눈엔 이게 이길 가능성이 있어 보이나?’
나는 끙끙거리며 게임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려봐도 돌파구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황자님은 뭔가가 보이나?
슬쩍 제레미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설핏 미소를 짓더니, 허공에서 헤매는 내 손을 지긋이 잡았다.
“손에 힘을 빼.”
“아?”
나는 제레미에게 손이 붙잡힌 채 어느 한 곳에 수를 두었다. 그런데 이럴 거면 그가 직접 수를 두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제레미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듯이 계속해서 내 손을 잡고 수를 뒀다.
이렇게 하는 게 재밌나? 아님 편한가? 제레미의 움직임에 따라 멍하니 수를 두고 있는데 그가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네?”
“아까 옆에 있던 그 남자와는 무슨 사이야? 꽤 친해 보이던데.”
제레미가 도박판에 시선을 둔 채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있던 남자? 루를 말하는 건가?’
제레미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루와 내가 무슨 사이지? 친구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베르처럼 비즈니스로 묶인 사이도 아닌데.
“응?”
잠깐 고민하던 사이 제레미는 다시 가볍게 수를 두고선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무슨 사이인지는 왜 궁금해하는 거야? 제레미에게 나는 그저 오늘 처음 본 코르티잔일 뿐일 텐데.
거액을 들여 구제를 해주겠다고 하지를 않나, 같이 온 남자에게 관심을 두지를 않나.
‘진짜로 샤샤한테 관심이 있나?’
그 순간 내 안의 덕심이 바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퇴폐 업소에서 마주친 것도 기가 막힌데…… 처음 본 코르티잔에게 정말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 남자 제 애인이에요.”
샤샤에게 관심을 두는 제레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애인이라고 답해버렸다. 그러자 제레미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애인? 아까 들었을 땐 남편도 있다고 하던데……?”
“있죠. 남편도 있고 애인도 여러 명 있고.”
충격을 받은 듯 그의 턱이 움찔했다. 그에 탄력을 받은 나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이런 여자니 관심을 끄라는 은근한 경고를 담아.
제레미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입술을 꾹 물었다.
“남편 한 사람으로는 만족을 못 해?”
목소리가 조금 날카롭게 들렸다. 비아냥대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결코 친절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직선적으로 파고드는 그의 시선에 나는 나쁜 여자처럼 보이는 것도 잊고 불쑥 진심을 말해버렸다.
“남편이 제일 좋긴 해요.”
다른 사람이랑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쩐지 덕심을 고스란히 내비친 기분이 들어 슬쩍 볼을 긁는데, 문득 제레미 또한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더니, 지금은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었다. 손 너머로 보이는 두 뺨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뭐지? 왜 쑥스러워하는데?’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쑥스러움을 느낀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런저런 추측을 더하고 있던 차, 문득 게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그 사이 말도 안 되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판이 뒤집힌 거야?’
제레미와 대화를 나누느라 그저 그가 움직이는 대로 수를 뒀을 뿐인데. 승자가 확정된 것처럼 보였던 게임은 이제 한 치 앞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유리해진 건가?
‘그렇게 신경 써서 두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는데. 어떻게 한 거지?’
잠시 후 제레미는 숨 쉬듯 쉽게 승기를 거머쥐었다.
“내가 이긴 것 같네.”
제레미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일과 눈을 마주쳤다. 제레미의 입가에 조용한 웃음기가 스며들자 헤일은 악마의 미소를 본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럴 수가…….”
“그럼 약속한 대로 이건 내가 처리하지.”
제레미는 백지 각서를 즉각 촛불에 태워버렸다. 역사상 최초로 황자비를 노예로 만들 뻔했던 백지 각서는 이젠 새까만 재가 되어 있었다.
“그래, 됐다. 됐어! 이거 원 재수가 더럽게 없구만.”
헤일이 의자를 주욱 밀어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제레미가 서늘한 목소리로 헤일을 붙들어 세웠다.
“아직 계산이 덜 끝났잖아?”
“윽……!”
레틴은 도망치려는 헤일을 붙잡아 거칠게 테이블 위로 몸을 눌렀다. 자신이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레틴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원하던 것을 이뤄.”
제레미가 턱을 괸 채 나를 쳐다보았다. 가면이 그려내는 화려한 곡선처럼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단, 내가 보는 앞에서.”
* * *
‘응? 저들은…….’
약 30분 전. 샨 크로비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베르는 뜻밖의 인물들을 보고 말았다.
‘그림자 기사들 아냐?’
무려 5명의 그림자 기사들이 샨 크로비체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두 명이었으면 샨 크로비체로 놀러 왔겠거니 싶겠지만, 5명의 인원이 동시에 움직여?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 도베르가 기사들에게로 접근했다.
도베르를 본 그림자 기사들은 의심 없이 임무 내용을 알려주었다.
“……황태자님이 곧 샨 크로비체에 오실 거라고?”
“예. 헤일이라는 자를 찾는다 하셨습니다.”
어? 안 되는데? 만에 하나라도 힐레인과 마주치면 어떡해……?
도베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가져오라 한 목걸이를 버젓이 목에 걸고 있는 부하를 보면 황태자님은 뭐라고 생각할까? 거기다 목걸이를 풀 수도 없는 상태라면?
힐레인의 상상처럼 목을 자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도베르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힐레인에게 알려야 해.’
도베르는 현 상황을 간단히 적어 종업원에게 쪽지를 건넸다. 10분쯤 지났을까? 다행히 쪽지가 잘 전달된 것인지 입구를 나오는 루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도베르는 루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다급히 몸을 숨겼다. 그의 시선이 샨 크로비체 입구로 향하는 한 남자에게로 고정되었다.
황금을 녹여 만든듯한 고아한 금발, 고혹적이면서도 피폐해 보이는 핏빛의 입술까지. 그가 아는 한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은 제국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런, 황태자님이 벌써 오시다니.’
입구에서 마주친 아인과 루가 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대화로 보였으나 그것은 도베르의 착각이었다.
“크윽!”
밖으로 나온 루가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곧 죽을 사람처럼 안색이 파래진 루는 끝내 차디찬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