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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내 최애가 이런 타락한 곳에 있을 리 없어 (33/120)

33. 내 최애가 이런 타락한 곳에 있을 리 없어

남자의 이질적인 분위기는 제레미를 연상시켰다.

‘설마. 아닐 거야. 우리 착하고 귀여운 황자님이 이런 타락한 장소에 있을 리 없잖아?’

머리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

그러다 순간적으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곧게 다물어진 입매를 봤을 때 좋은 감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꼭 화가 난 것 같은데?’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쳐다보는데, 문득 남자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응? 인제 보니 백금발이네. 내가 왜 우리 황자님이라고 착각했지?’

괜한 착각을 한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남자의 따가운 시선은 집요할 정도로 나를 쫓고 있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시선에 나는 다시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눈만 내리깔고 나를 쳐다보았다.

가면을 꿰뚫을 듯 직선적으로 파고들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시선이 숄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모습을 드러낸 둥그런 어깨로 향했다.

“후우…….”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가린 손에서 힘줄이 두드러졌다.

‘뭐지, 저 반응은?’

남자의 모습은 꼭 ‘이 아이를 어쩌면 좋나.’ 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의 심상찮은 반응에 옆에서 보고 있던 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 일행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어 보이는 눈싸움에 내 오금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루나. 우리 다른 곳으로 가요.”

루가 백금발 남자를 흘낏 쳐다보고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백금발의 남자가 몸을 움찔했다.

“루나?”

냉기를 머금은 스산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순간 가면 너머의 시선에서 푸른 섬광이 보인 것 같은 착각이 일던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백금발의 남자를 막아선 사람은 갈색 머리에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가 백금발 남자에게 뭐라고 짧게 중얼거리자, 남자가 입술을 꾹 물었다. 참기 힘든 것을 인내하는 사람처럼.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했다. 꼭 속상해하는 제레미의 얼굴을 마주한 것 같았다. 찝찝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뭐라고 말을 걸려던 그때였다.

“얼른…… 다른 곳으로 가요.”

루가 내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작게 읊조렸다.

하긴, 지금 내가 저 남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잠시 두 사람을 보며 망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시선에 설마? 하는 의심은 내 안에서 점점 더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돌아서 버린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의심을 잠재웠다.

‘울 황자님이 이런 타락한 장소에 있을 리 없어.’

* * *

정처 없이 도박장 안을 거닐다 문득 루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 헤일 같지 않아요?”

루가 가리킨 곳엔 잿빛 머리카락에 안대를 한 남자가 있었다.

루의 말대로 헤일은 한창 도박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다크써클이 껴 있고 볼은 핼쑥했다. 하지만 도박판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루를 데리고 헤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헤일인가요?”

“누구?”

“저는 도베르 하이만의 지인인 샤샤에요.”

헤일에게 다가가 도베르가 일러주었던 대로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국을 바라보는 듯 행복하게 웃던 헤일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도, 도베르?! 그 황태자의 개?”

분명 도베르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했는데. 반응이 왜 저래?

“황태자가 시켜서 왔나? 나, 나도 카논처럼 죽이려고……?”

황태자? 갑자기 황태자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의아함이 밀려들었지만 그가 계속 소리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이미 주변에 있던 몇몇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으니까.

‘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하지만 여기서 기절시켜 데려갔다간 이상하게 보일 테고. 그렇다고 말로 구슬릴 수 있는 상태도 아닌 것 같고.’

루가 보수를 주겠다며 설득에 나서고 있긴 했지만 성공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거기다 돈도 싫다는데 어떻게 설득한담? 어떻게 해야 헤일을 협조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에 잠겨 있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바도크’ 게임판이 보였다.

도박이라면 끔뻑 죽는 헤일. 마침 눈앞에 펼쳐져 있는 도박판. 그렇다면……?

“이봐요. 헤일.”

결심한 뒤 루와 옥신각신하고 있는 헤일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러곤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는 당신이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해주면 미련 없이 바로 떠나줄 거예요.”

“내, 내가 왜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쉬잇. 너무 흥분하지 마요, 헤일. 인생을 게임처럼 살아가시는 분이 오늘은 왜 이렇게 두려워하시는지 모르겠네?”

헤일의 어깨를 꾹 누르며 의자에 도로 앉혔다. 그러곤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어쨌든 지금은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그를 살살 구슬리는 게 우선이니.

“아, 아무리 그래도 난 대답해 줄 의무 없어.”

“누가 그냥 알려 달래요? 그러지 말고 우리 게임 한 판 하는 게 어때요? 내가 이기면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해주면 돼요.”

헤일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게임? 네가 나를 이기겠다고?”

“네. 제가 바도크를 좀, 아니 아주 잘하거든요. 이래 봬도 제가 진 적이 없는데. 어때요? 한 판 붙어 보는 게. 으음, 질 것 같아 무서워요?”

무조건 싫다고 바락바락 우기던 그의 얼굴에 흥미가 차오르는 게 보였다. 역시 도박중독자라 그런가. 도박과 연관을 지어 승부욕을 건드리니 꽤 잘 통하잖아?

“하! 무섭긴! 좋아. 한판 붙어보자고. 그런데 내가 이기면 뭘 줄 건데? 뭐가 걸려 있어야 게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이기면 샨 크로비체 한 달 숙박권. 어때요?”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한 거금인 건 확실해 보였다. 우리를 구경 중이던 몇몇 사람들이 ‘그거 웬만한 평민 10년 치 벌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와, 와오. 그게 그렇게 비싸?’

순간 손가락이 달달 떨렸지만 꾹 참아냈다. 그래, 어차피 숙박권을 사줄 일은 없을 테니까. 그도 그럴 게 수 싸움 중의 하나인 ‘바도크’란 게임은 내가 검 드는 것 다음으로 잘하는 일이었다.

‘고로, 내가 이겨.’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바도크 판 앞에 앉았다.

* * *

바도크는 거액의 돈을 걸면 도박으로 전락하는 게임이긴 했지만, 그래도 본질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수 싸움이었다.

나도 어릴 때 바도크를 자주 했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내내 비어 있었던 집에서, 동생 테이와 나는 바도크로 무료한 시간을 달랬었다.

그래서 바도크라면 꽤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어린 동생이긴 했어도 게임의 승자는 항상 나였으니까. 고럼, 고럼. 백전백승의 무패행진이었지.

하지만…….

“이거, 이거, 너무 쉬운데?”

첫판을 허무하게 져버린 쪽은 나였다. 애걸복걸해서 겨우 얻은 두 번째 기회도 방금 전 날려버린 상태였다.

“벌써 세달치 숙박권을 얻어버렸는데. 더 걸 거는 있어?”

헤일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놈은 밥 먹고 바도크만 했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잘할 수 있어?

“더 걸 게 없으면 이만 가볼게.”

헤일이 차용증을 팔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다급히 그의 팔을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니, 뭔 힘이 이렇게 세? 더 걸 거 없으면 간다니까?”

“지인한테 빌려서 드릴게요. 한 판 더해요!”

도베르한테 빌리지, 뭐. 그는 집안도 빵빵한 데다가 최고의 그림자 기사니 모아둔 돈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이 불쌍한 후배를 위해 일 년 치 연봉 정도는 빌려주지 않을까……?

“당신 지인은 벌써 내뺀 지 오랜데?”

반면 지인을 루로 착각한 헤일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루는 게임 중간부터 사라진 상태였다. 이곳 지배인이 쪽지 하나를 건넸는데 발신인이 도베르였다. 하지만 쪽지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묻은 듯한 와인 방울에 글씨가 번져 있던 탓이었다.

루는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며 직접 도베르를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 벌써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상태였다.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모르겠네. 이러다가 헤일을 놓치면 어떡해?’

조급한 마음이 들던 그때였다.

“뭐,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헤일이 비열하게 웃으며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종이 맨 위에는 [각서]라고 적혀 있었고, 중간부터는 공백이었다.

“이게 뭔데요?”

“백지 각서.”

“백지 각서?”

“모르는구나? 역시 이 바닥에서 초짜일 것 같더라니. 잘 들어. 백지 각서는 백지 수표 같은 거야. 일단 사인을 받아둔 뒤 내가 원하는 뭐든 적을 수가 있지. 뭘 적든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뭐야, 그러니까 이 공백에 뭐든 적을 수 있다는 말? 금전이나 물품, 어쩌면 신체까지도?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전에 이 각서를 쓰고 노예가 된 사람이 많았노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백지 각서는 일명 노예 각서로 불리기도 한다고.

‘만에 하나 지게 되면 도망갈까?’

퇴로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같은 사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여기저기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덩치도 산 만하고 각자 손에 든 무기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뭐, 도망가긴 글렀네.

점점 숨통을 조여오는 상황에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헤일을 바라보았다.

“……이거 꼭 써야 합니까?”

“싫으면 말고. 난 간다.”

“아 진짜! 쓴다, 써!”

목걸이를 풀지 못하면 여러 가지 꼬이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내가 아인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결국 나는 백지 각서를 손에 들었다. 샤샤라는 가명을 휘갈기려 하자 헤일이 서명은 못 믿으니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결국 지장까지 찍고 나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 이 게임 한 판에 운명이 달린 건가.’

물론 전 판도 그러긴 했지만, 이번 판은 목숨이 걸렸다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임했다. 확실히 돈이 걸려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지면 안 돼.’

그러기를 10여 분. 나는 눈앞에 있는 백지 각서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 수만 잘못 둬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

이래서 도박이 위험하단 건가? 시작할 때는 이길 것만 같아서 마구 무언가를 걸게 만들더니 끄트머리에선 차디찬 배신을 한다.

“쿡쿡, 무슨 생각해? 이미 진 것 같으니 너무 머리 굴리지 말라고?”

“닥쳐.”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위험한 내용은 안 적는다니까?”

헤일이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이미 자신이 이겼다는 듯 말하는 태도에,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 한 명이 말을 보탰다.

“가면 너머 얼굴이 눈 돌아가게 예쁘게 생겼을 것 같은데. 애인이나 되어달라고 해. 낄낄.”

“그럴까?”

헤일이 느끼하게 웃으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꺼져. 나 남편 있어, 이 미친놈아.”

집에 토끼 같은 남편이 있는데, 누구 앞에서 이런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야? 구경꾼을 매섭게 쏘아보자 눈치는 있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몇몇이 뒷걸음질을 치는 와중에, 뜻밖에도 한 남자가 좌중을 헤치고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

남자는 구경꾼들을 지나쳐 내가 있는 곳까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저 남자는.’

아까부터 묘하게 시선을 빼앗던 백금발의 남자였다. 이윽고 내가 있는 바로 앞까지 걸어 나온 남자는 게임판을 유심히 읽어내려갔다. 그러고선 백지 각서가 놓인 곳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게 아닌가.

“……?”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빼고 각서 쪽을 쳐다보는데, 문득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면 너머의 시선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의아함에 고갤 기울이자, 연 핑크빛의 입술이 벌어지며 청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위험한 놈을 상대로 백지 각서라니.”

남자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살갗을 파고드는 바람처럼 서늘했다.

“나를 미치게 만들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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