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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코르티잔 변장 (31/120)

31. 코르티잔 변장

절대 아니라고 100번쯤 해명을 늘어놓던 루는 이제 그만하라는 힐레인의 눈총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흐응.”

그런 루를 보며 도베르가 눈을 빛냈다. 머리가 좋은 탓에 별다른 설명 없이도 이미 상황 파악을 완료한 듯 보였다.

“역시 우리 자기라니까?”

도베르는 워낙에 헛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니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의 말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루는 ‘자기’라는 호칭이 영 이상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 황자비님을 자기라고 불러요?”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마 대공한테도 곧 자기, 자기. 할 거예요.”

내 말에 루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쯧, 저러면 도베르가 더 놀려먹으려 할 텐데.

아니나 다를까 도베르는 좋은 사냥감을 본 것마냥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냥 뒀다간 대화가 진행될 것 같지가 않은데.

“선배. 저리로 좀 가 있어요. 대공이랑 둘이서 얘기 좀 하게.”

“응? 뭔데, 나도오. 나도 끼워줘.”

나는 자꾸만 따라오려는 도베르를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루만 쏙 데리고 나왔다. 여기쯤이면 되겠다 싶어 고갤 돌리는데 문득 기대감에 젖은 루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대공에게 온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서예요.”

“아…… 난 또. 나한테 고백하려는 줄……. 흠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오늘은 존댓말이네요?”

그가 한 손에 턱을 괸 채 싱긋 웃었다. 바람둥이 시절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하는 행동 마다마다 유혹이 묻어 있었다.

“그땐 화가 나서 그런 거고……. 원래는 존댓말 잘해요, 저.”

“저는 당신이 반말하는 게 더 좋아요. 반말로 명령할 때, 얼마나 멋있어 보이는 줄 알아요?”

“…….”

“또 해주세요.”

그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명령해보라는 듯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절대 안 해. 무조건 존댓말 해야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루가 볼을 부풀렸다.

“칫. 반말이 더 섹시하다니까.”

“그런 이유라면 절대 안 해요.”

“으음. 반말, 반말. 반마알.”

“아, 싫다고! 안 한다고!”

“이미 하고 있는데요?”

“…….”

이러다간 계속 그의 페이스에 완벽하게 말려들 것 같았다. 정작 하려던 질문은 아직 꺼내 놓지도 못한 상탠데. 그냥 확 반말을 해버려?

어차피 이젠 존댓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루의 헤픈 웃음을 보고 있자니, 나오려던 존댓말도 쏙 들어갈 것 같달까.

“하아아. 네가 좋다고 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답하자 루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

그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볼과 귀가 붉어져 있었다.

게다가 뭐? 주인님?

아무래도 저건 묘약 탓이 아닌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그래, 내가 사람을 저 정도로 만들어놓진 않았을 거야. 원래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질문이 뭐예요?”

그가 헤헤 웃으며 턱받이를 했다. 이마 위로 감실거리는 머리카락 탓인가. 꼭 말 잘 듣는 대형견 같아 보였다.

“이 목걸이는 대체 어떻게 푸는 거야? 잠금장치도 안 보이는데.”

자초지종을 들은 루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잠금장치가 안 보인다니요? 이상하다. 그냥 풀고 싶다고 생각만 해도 잠금장치가 보일 텐데.”

루가 이리저리 내 목걸이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목걸이를 풀지 못한 루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안 되지? 내가 착용했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마법 물품이라 마력이 있어야 하는 건가…….”

“난 마력 같은 거 없어!”

“음…… 마력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요, 양과 질이 다를 뿐이지. 고로 당신에게도 마력이 존재한다는 말씀.”

“엉? 나한테 마력이 있어?”

내 말에 루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건 천재들의 영역인 줄 알았는데.

“그럼 나도 마음만 먹으면 마법을 배울 수 있겠네?”

“네, 지금 당장 배워볼래요?”

그의 긍정적인 대답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자, 그럼 마검을 소환해볼까요?”

“응?”

보통 초보들은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하지 않나? 다짜고짜 시작부터 마검이라니. 불신의 눈초리로 루를 쳐다보자 그가 아주 간단하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참고로 저는 5살 때 마검을 만들어 냈답니다.”

5살? 다섯 살배기도 마검을 만들어 냈다 이거지?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조금씩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저 정도 천재면, 마법을 금방 배우는 비법 같은 걸 알고 있지 않을까?

“잘 봐요.”

“응응.”

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시범을 보일 모양인데. 나는 그의 손에 집중하며 눈을 부릅떴다.

“자, 이렇게.”

잠시 후, 눈 깜짝할 새 그의 손에서 마검이 형성되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붉은 빛의 마검이.

“응응. 그리고?”

“이게 다예요. 쉽죠?”

그게 다라고?

아무래도 천재는 둔재를 가르치는 법은 모르는가 보다. 별 거 아니라는 듯 나를 보는 시선에 주먹이 울었다.

“응. 되게 쉽네.”

“그렇죠? 이제 힐레인이 해봐요.”

“그래! 자, 잘 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손바닥을 쫙 펴서 보여줬다. 그러곤 있는 힘껏 주먹을 쥐어서 그의 얼굴 바로 앞으로 훅을 날렸다.

“와, 와아.”

자신의 바로 코앞에 멈춰 선 주먹을 보며 루가 탄성을 질렀다.

‘내가 주먹이 좀 멋있긴 하지.’

뭘 저렇게 탄성까지 지르는 거람? 속기 마검사의 칭찬에 묘하게 기분이 들뜨려던 참이었다.

“주먹이 어쩜 이렇게 작죠? 여리고, 예뻐요.”

뭐야?

나는 그의 말에 얼굴을 확 구겼다. 맞으면 뻑 갈 뻔했다. 무시무시한 주먹이로군요! 이런 류의 칭찬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작고, 여리고, 예쁘다고?

“대체 어디가? 나 여자치고는 손이 큰 편이라고?”

“아니라니까요? 봐요, 되게 작고 소중해요.”

루가 내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커다란 손이 내 주먹을 한입에 삼키듯이 덮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작고 소중하다니……. 대공이 내 과거를 모르니까 저런 얘기가 나오지.’

지난날, 나는 이 두 손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베어냈었다. 검을 놓칠 시엔 마지막 무기로 주먹을 내질렀고.

피가 곳곳에 스민 손의 어디가 작고 여리다는 걸까.

내 표정이 이상해졌는지, 루가 내 손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냐.”

내 말에 그가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으음, 이러다 생각을 읽힐 것 같은데.

내 어두운 과거를 누군가 속속들이 알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우리 황자님 경고 못 들었어? 내 손은 우리 남편만 잡을 수 있다고.”

내 말에 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남편……. 나도 남편이라 불리고 싶다. 나도 아내라고 불러보고 싶다.”

하지만 시무룩해진 것도 잠시. 그가 느릿느릿 눈동자를 들어 올려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콤한 사탕 같은 진홍빛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애원하듯 그윽해졌다.

‘장난을 칠 땐 쳐내기 쉬운데. 저렇게 진지할 때는 좀 어렵단 말이지.’

저런 얼굴, 저런 자태로 쳐다볼 땐 아무리 나라 해도 속절없이 시선을 사로잡히고 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르면 되지.”

가벼운 내 대답에 루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꼭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표정이네.’

나는 피식 웃다가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미래의 네 신부한테.”

내 말에 그가 가만히 눈을 좁혔다. 그 표정을 지켜보다,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죠?”

“그럼! 미래의 아내한테는 마음껏 불러줘.”

“……아내야. 크흡.”

미래의 신부한테 부르라고 했더니, 그가 엉뚱하게 나를 보며 아내라고 말했다.

“아내…….”

다시 한번 더 아내라 말하던 그가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저가 불러 놓곤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보고 있는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진짜 세기의 바람둥이 맞아?’

천연기념물 수준으로 순진한 행동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를 보고 있으면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년을 보는 것 같았다.

“맞아요, 예전까진 분명.”

“근데 왜 이렇게 순진하실까.”

“잘 모르겠어요, 저도. 그날 당신의 묘약이 내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야?”

“……다 처음 같아요. 이전 일은 전부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 같아.”

그가 내 손을 붙잡은 채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을 잡는 것도 처음 같고……. 저 지금 새하얀 도화지예요.”

그가 내 손등 위에 살포시 자신의 볼을 가져다 댔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 위로 살랑거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된 하얀 얼굴엔 뇌쇄적인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당신이란 사람이 그림을 그려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순진하다는 거 취, 취소!”

나는 곧바로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자꾸만 그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내가 당황스러웠다.

‘이래서 선수, 선수하는 구나.’

그의 연애 기술은 아마도 세계 1위가 아닐까.

순진한 얼굴로 자연스레 파고들어서는, 몰래 머릿속에 각인을 시키려 든다. 제 잘난 얼굴을.

“그…… 어쨌든 지금 네 선에서는 목걸이를 풀어줄 수가 없단 말이지?”

“네에. 그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하아…… 나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 결국 샨 크로비체로 가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저…… 대공. 또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이지.”

“얼른 말해봐요.”

“혹시 샨 크로비체 출입증은 있어? 좀 빌리고 싶은데.”

“샨 크로비체요? 없어요!”

샨 크로비체란 말에 루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절대 없다고 잡아떼는 모습이 매우 수상해 보였다.

“저는 그런 곳에 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예전에 한 번, 아니 몇 번 가보긴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놀고 오기만 했는데…….”

루는 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끝도 없이 해명을 달았다.

“응, 알아. 알아. 어쨌든 출입증이 있다는 말이지?”

루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저는 순진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예전의 그 루가 아니란 말이에요.’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새로 태어난 루 씨. 나한테 출입증 좀 빌려줄 수 있어?”

“빌려줄 수는 있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지. 뭔데? 으음…… 내가 별로 가진 건 없는데. 아! 다음 달 월급이라도 줄까? 동전 하나 안 남기고 다 줄 수 있어.”

“…….”

내 물음에 루는 ‘제가 정말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아요?’라고 물으며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아, 대공의 입장에선 내 월급이 너무 보잘것없으려나.

“그럼 이……일 년 치 연봉?”

내 말에 루가 ‘내 완벽한 그녀는 무드가 없어.’라며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아내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안 돼.”

딱 잘라 거절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했다간 괜한 오해를 살 게 분명했다. 게다가 나만 욕을 먹으면 모르겠는데, 우리 황자님까지 가십거리가 될 거 아냐.

“아내라고 불리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거야…….”

제레미한테 들었을 때 좋은 거지.

속으로 뒷말을 삼켰지만, 루는 이미 다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잠시 시무룩해지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일부러 밝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여신님?”

“패스.”

“여보.”

“안 돼.”

“쳇. 다 안 된다고 그러면 어떡해요?”

“평범한 거! 남들이 들어도 오해 안 할 말로 불러 달라고.”

“그럼. 루나.”

“루나?”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제시한 단어 중에 가장 평범한 것 같아, 마지막엔 그렇게 부르라고 말해주었다. 대체 무슨 뜻이기에 저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이지?

* * *

숙소로 간 루는 잠시 후 나와 도베르가 있는 후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출입증은 이게 다라며 두 장을 보였다.

하나는 루 하버마스라고 적힌 골드 색 출입증이었고, 다른 하나엔 분홍색의 화려한 글씨체로 ‘샤샤’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건 어쩌다가 만들게 됐고…… 이건 또…… 어쩌다가 주웠어요…….”

루가 시무룩한 얼굴로 머뭇머뭇 분홍색 출입증을 내게 건넸다. 저러다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라 그에게 연신 ‘잘 주웠다.’, ‘복덩이다.’라며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샤샤라고 적혀있네?”

“네. 샨 크로비체에서 일하는 코르티잔의 출입증이에요.”

“응? 손님 출입증이 아니고 코르티잔……?”

고개를 기울이자 루가 묘한 표정을 한 채 미소를 지었다.

“황자비님이 코르티잔으로 변장해 주셔야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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