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아내가 만난 다른 남자
봄바람처럼 간지럽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되자 제레미는 소파에서 자겠다는 나를 달랑 들어서 제 옆에 눕혔다.
“오늘 어땠어?”
얼떨결에 그의 옆에 누운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았어요. 무척.”
음, 솔직히 말해서 아주 좋았지. 내 생에 이렇게 평화롭던 날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이런 게 행복인가?
‘만약 내가 첩자가 아니고 그의 진짜 신부였다면 매일 이런 나날을 보냈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달콤한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현실감만 일깨워주었달까.
나는 어느덧 까맣게 물든 밤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에는 황태자님께 보고를 가야 할 것 같은데.’
루 대공의 목걸이 임무 이후로 본의 아니게 나는 잠수를 탄 상태였다. 게다가 아인과 상의도 없이 컬스병에 걸렸다고 해버렸으니…….
‘컬스병을 믿으실 것 같진 않은데. 수상하다고 그림자 기사를 황자궁에 보내는 건 아니겠지?’
아인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러다 도베르가 오기도 전에 황태자에게 쓱싹-되는 거 아닌가 하고.
‘황태자님도 그렇지만, 루 대공은 또 어떡하냐. 언제까지고 컬스병이라 할 수도 없고.’
이리저리 벌여 놓은 일은 많은데, 이제 와 해결하려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이렇게 마냥 도베르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어. 황자님이 잠들고 나면 상황을 좀 살펴보고 와야겠다.’
마침 침대에 누워도 있겠다. 밤도 깊었겠다. 곧 잠이 들 것 같긴 한데.
제레미를 빨리 재워주자는 생각에 그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곤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 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장, 자장.”
“…….”
뜬금없는 내 자장가 소리에 제레미가 스르르 눈을 떴다.
“그대가 잠이 들면, 나 나비처럼 날아 그대의 이마에 꿈 가루를 뿌리고 가리.”
조곤조곤 자장가를 이어나갔다. 이래 봬도 어디 가서 노래 못 부른단 소린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포근히 잠들어요, 내…….”
내 사랑. 그다음 이어질 가사였다.
하지만 어쩐지 내겐 금기어처럼 느껴졌다. 말을 뱉고 나면 엄청난 죄책감이 들 것만 같은.
조용히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제레미가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린 채 나를 바라봤다. 그와 나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내…….”
다시 한번 자장가를 이어가려고 했으나 역시 같은 구간에서 막혀버렸다.
‘사랑이 아니야.’
수천 명의 피를 손에 묻힌 내가, 게다가 첫 번째 생에서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내가. 어떻게 그의 앞에서 거짓으로라도 사랑을 말할 수 있겠어?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건 맞지만 사랑은 아냐.’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곤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제레미의 시선이 얼굴로 콕콕 쏟아지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포근히 잠들어요, 내 사랑.”
심장을 가볍게 두드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연보랏빛 눈동자가 강하게 나를 옭아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슬퍼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홀로 지독한 상처를 받은 것처럼.
“오늘의 기억은…….”
그가 손으로 내 눈가를 살짝 덮었다.
“나만 가질게.”
그의 손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이전에도 느껴본 감각. 아마도 내게 기억 소거 마법을 걸고 있는 듯했다.
“잘 자. 힐레인.”
눈을 덮은 채로 그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봄기운처럼 스며든 그의 마력이 얼어붙은 내 머리를 강제로 수마에 빠뜨려버렸다.
* * *
눈을 뜨니 새벽녘이었다.
‘기억 소거 마법은 나한테 안 통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어제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들. 그것을 선사해준 건 제레미였다. 동시에 이를 앗아가려 한 것도 제레미였지만.
‘왜지?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 상냥하게 대해주신 거 아니었나.’
그렇다면 내 기억을 지울 리가 없는데. 실컷 잘 대해주고, 기억을 지워버리면 헛수고 아닌가.
‘뭐지, 대체.’
천재의 마음은 천재만 헤아릴 수 있는 건가. 내 머리론 아무리 고민해 봐도 그의 의중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황자님, 왜 그러신 거예요?’
답답한 마음에 잠든 제레미를 흘겨보았다. 천사 같은 모습에 화도 못 내겠고.
잠시 넋을 놓고 그를 구경하다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기척이 느껴지는데.’
어디선가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느껴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의.’
유달리 기척에 예민한 편임에도 지금만큼은 불청객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도베르 급의 최상위 그림자 기사들이나 가능한 움직임인데.
‘누구지? 황태자 측에서 진짜 자객이라도 보낸 걸까?’
긴장감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지난 생에서 황태자의 습격을 받았던 터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검…… 검부터 챙기자.’
침대 아래 고이 숨겨둔 검을 꺼냈다. 그러곤 제레미를 보호하기 위해 침대 바로 옆에 섰다.
‘차라리 황자님을 깨워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온다……!’
내가 기척을 읽었단 걸 눈치라도 챈 것일까? 동태를 살피듯 느리게 움직였던 상대방이 갑자기 속도를 높여 빠르게 접근해오는 게 느껴졌다.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었다.
‘테라스다!’
온몸의 감각을 집중하자, 기척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을 세운 채 테라스 밖을 나가자 은은히 내리비치는 달빛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까지 다룰 줄 알다니, 내 사랑은 대체 못 하는 게 뭐죠?”
익숙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나를 내 사랑이라 칭하는 놈은 루 대공, 한 놈밖에 없었다.
“루 대공?”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딩동댕.”
“……!”
언제 내 뒤로 온 거야? 화들짝 놀라 한걸음 크게 멀어졌다.
괜히 속기 마검사가 아닌 건가. 눈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완벽에 가까운 은신술. 상황만 아니었다면 제자로 삼아 달라고 애원했을지도.
“제자라. 당신 같은 분을 제자로 둔다면 저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
혹시 내가 입 밖으로 생각을 말했던가?
경악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 대공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목걸이를 통해 당신의 생각을 읽고 있어요.”
“뭐?!”
“목걸이를 걸어준 사람과 생각을 공유할 수가 있거든요. 근거리에서만 통하는 거긴 하지만.”
이런 젠장! 역시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뭐? 생각을 공유한다니. 내 머릿속이 대공에게 환히 들여다보일 걸 상상하자, 맨몸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 근데 공유라니? 나는 당신 생각이 안 들리는데?”
“그거야 마법으로 조절하고 있으니까요.”
“…….”
마법을 못 써서 이렇게나 억울한 상황이 올 줄이야. 게다가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그가 내 생각을 읽는 건 매우 곤란했다.
황자님이 백치가 아……. 아냐. 생각하지 말자.
“뭐죠? 비밀인가요?”
“맞아. 그러니 더 이상 내 머릿속을 읽으려 들지 말라고.”
이 해삼 멍게 말미잘아.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는데, 정작 욕을 들어먹은 당사자는 웃고 있었다.
“귀여워.”
“뭐라는 거야?”
욕을 했는데 웃다니. 변태 아냐?
“변태라…… 어감이 좋지 않네요. 그냥 유달리 섹시하다고 해주세요.”
“유달리 섹시는 또 뭐야?”
변태에 이상한 놈이다.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여기는 왜 왔지……? 혹시 목걸이 때문이야?”
알리바이를 들먹이며 시치미 뗄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당에 내가 무슨 알리바이를 댈 수 있을까. 그 거짓이 통할 리 없다.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거기다 당장에 나를 목걸이 도둑으로 몰아가면?’
내 고민을 읽은 것인지 루가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그건 당신에게 준 거니까, 이제 필요 없어요.”
응? 잠깐만. 루의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준 거니까 필요 없다고……? 이게 어떻게 준 거야? 내가 뺏어온 거지.
자신이 준 선물이라며 순순히 소유권을 포기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의아해졌다. 말이 안 되지만 그의 말대로 이게 선물이라고 치자.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게 덜컥 선물이라며 줄 물건이 아니지 않나? 황태자가 노릴 정도면 대단한 목걸이일 텐데.
그리고 정말 쿨하게 털어버릴 물건이라면, 굳이 이 밤에 찾아온 이유는 또 무엇일까.
“당신을 보러 왔죠.”
루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거 참…… 예쁘게도 웃는단 말이지.
“칭찬받으니 좋네요.”
내 머릿속을 들여다봤는지 루가 기쁘게 웃었다. 이거 원. 생각을 자꾸만 읽히니 불안해 죽겠네.
“칭찬한 적 없거든? 그리고 내 얼굴 보러 온 거면 이제 다 봤을 테니 나가 봐.”
어떻게 해서든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등을 떠밀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요.”
루가 서운하다는 듯 나를 보챘다. 그러곤 눈으로 각인이라도 하듯 시야 가득 내 모습을 담아냈다.
“저…… 이제 어쩌죠? 원래 제 눈엔 모든 여자가 다 아름답게 보였는데.”
루가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그가 있었다.
까만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색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황홀경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당신만 보여요.”
“…….”
“당신만,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요.”
내 볼을 향해 뻗은 손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눈에 힘을 줘 째려보자,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볼 대신 머리카락을 손에 그러쥐었다.
“세기의 바람둥이를 이리 만드셨으니, 책임을 져주셔야죠.”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도 솔직히 좀 헷갈렸다.
이상하다. 사랑의 묘약은 효과가 다 사라졌을 텐데.
“부작용인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여기서 활활-. 절대복종 상태는 풀렸지만.”
그가 내 손을 잡아 제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5cm도 안 되는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고, 손바닥은 심장 위로 닿아 있었다.
빠르면서도 일정한 울림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몸을 굳히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와 루 대공의 사이를 막아섰다.
“내 아내의 손은 나만 잡을 수 있어. 하버마스 대공.”
경고처럼 루의 이름을 읊조린 제레미가 다소 거칠게 루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기분이 언짢은지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내…….’
어찌 보면 평범한 단어인데. 제레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내라…….’
갑자기 아내라는 소릴 들으니, 상황도 잊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단어처럼 여겨지는 게…….
어쩐지 볼이 뜨뜻해지는 것 같아 손등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응? 왜 저렇게 보지.’
제레미의 어깨너머로 루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상심한 티를 여실히 내보이고 있었다.
‘아내란 말이 그렇게…… 좋아요?’
갑자기 목걸이를 통해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닌, 머릿속으로 바로 주입되는 느낌이었다.
‘질투가 나는군요. 한 번도 이런 감정 느껴본 적이 없는데.’
또 한 번 울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루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짝사랑은 해본 적 없거든요.’
그의 눈동자에 어린 선홍색 섬광이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묘약의 부작용이 이런 거야? 이거 좀 위험한 상태 아닌가.’
루는 들끓는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처음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미안……. 그거 사랑의 묘약 부작용 탓이야. 내가 해독약은 꼭 찾아다 줄게.’
속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여유만만하던 바람둥이 대공이 사랑을 갈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영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는 내 제안에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왜?’
‘이 사랑을…… 포기하기 싫으니까.“
장밋빛의 시선이 깊게 얽혀들었다. 차마 시선을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몸을 우뚝 멈춰서 있던 그때였다.
“힐레인.”
멈춰 있는 나를 깨운 건 제레미의 목소리였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표정의 그가 나를 뒤로 끌어당겼다.
나를 루의 시선으로부터 꼭꼭 숨기려는 듯이.
그러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두고…… 누굴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