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남편과 둘만의 시간
‘끙?’
방금 무슨 소리였지? 이대로 다시 잠들려고 했는데, 궁금증이 스미자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떠서 소리를 낸 정체를 쳐다보았다.
‘와…….’
맑은 샘물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피부. 고운 실타래 같은 은빛 머리카락이 눈에 아롱거렸다. 햇살 아래 드러난 완벽한 이목구비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어떻게 사람이…… 아침에 봐도 잘 생길 수가 있지?’
무릇 사람이라면 아침엔 좀 붓거나 못생겨져야 하지 않나? 으음, 우리 황자님은 사람이 아니라 미의 남신이니 예외인가.
속으로 조용히 제레미를 덕질하던 그때였다.
“으음.”
은빛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곧이어 제비꽃을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동안 나를 보며 깜빡이던 두 눈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일어났어, 신부야?”
벚꽃잎 같은 연분홍빛 입술이 눈앞에서 움직였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제레미의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아함에 천천히 고개를 내리는데…… 세상에.
지금 나는 그를 침대 위 인형처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아니지, 꽉 보다는 마구 끌어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으, 으악!”
깜짝 놀라 그를 멀찌감치 밀었다.
순순히 밀려난 제레미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져 있는 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악……?”
“그게, 그러니까.”
“소리를 지를 정도로 내가 끔찍해……? 방금 전까지 내 가슴팍에 코를 묻고, 쿨쿨 자놓고선…….”
그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불만을 토로했다. 붉어진 눈가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세상에. 나 지금 황자님을 울린 거야?’
이런. 내 안의 향기 맡는 변태가 죽을죄를 저질러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좋은 향이 난다 해도, 뭐? 가슴에 코를 묻어?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즉각 사과를 건넸다. 첩자를 옆에 재우는 것도 기분 나쁠 텐데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얼마나 소름 끼쳤을까.
“너무 좋은 향이 나서 저도 모르게. 사과드릴게요. 진짜로 죄송해요.”
깊이 반성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제레미가 두 손으로 내 볼을 잡았다. 자신의 앞에서 고개 숙이지 말라는 듯이.
“좋은 향? 무슨 향이 나는데?”
제레미가 자신의 나이트가운의 깃을 끌어당겨 코를 묻었다. 그 탓에 가운 사이로 예쁘게 자리 잡은 근육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레, 레몬 향이랑! 시트러스 향이요.”
나는 다급히 그의 옷깃을 두 손으로 꾹꾹 여며주었다. 어후, 정신이 어질어질해서 원.
“신기하다. 그 향…… 힐레인한테서도 나는데.”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내 머리카락 끝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의 향을 맡듯 검은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내 향이 힐레인에게 옮았나 봐.”
“…….”
내 쪽에선 꼭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눈만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는데…….
빨려들 것 같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넋을 놓고 보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진정하자……. 아니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진정을 해? 미를 관장하는 남신이 바로 내 옆에 있다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어진 제레미의 다정한 목소리에, 심장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나대기 시작했다.
“신부야, 눈 떠야지.”
“…….”
그가 간지러운 목소리로 나를 살살 달랬다. 이 남자,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달콤할까. 나를 유혹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그렇게 유혹해도…… 나는 당신 편이란 걸 드러낼 수가 없어요!’
마음 같아선 그의 유혹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두 번째 생에서와 똑같은 결과를 맞을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는 사이, 촉촉이 젖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응? 힐레인.”
응? 잠깐만, 힐레인이라고?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건 이번 생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백치 연기 중일 땐 항상 신부야, 신부야. 하고 불렀는데. 갑자기 왜 내 이름을 부른 거지?
“방금…… 제 이름을 부르신 거예요?”
“응. 그러고 싶어서. 허락해줄래……? 하루만이라도 말이야.”
제레미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네, 네. 당연하죠.”
나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아니라 평생 불러줘도 괜찮은데.
긍정의 대답에 그가 사르르 웃어 보였다.
‘겨우 이름을 허락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기쁜 듯 웃는 걸까.’
그의 미소에 멍하니 따라 웃었다. 그 순간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완벽히 다르게 흘러가게 될 터닝포인트인 줄도 모르고.
* * *
평소라면 시녀들로 북적였을 황자의 방은, 나의 꾀병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레미와 단둘뿐인 공간.
나는 제레미와 단둘이 있는 것을 한 번도 어색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심장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심적으로는 오히려 편안하달까. 그도 그럴 게 2번을 회귀한 나는, 햇수로만 쳐도 벌써 3년째 그와 동고동락하고 있는 상태니까.
하지만 오늘은 좀 이상했다.
‘어, 어색해.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가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정확히는 컬스병으로 그와 내가 함께 격리된 이후로 그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 평소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던 백치미가 옅어진 건 물론이고…….
‘왜 자꾸 쳐다보시지?’
이따금 빤히 쳐다보는 것도 평상시엔 없던 모습이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읽는 중이었는데, 제레미는 책에 눈을 두는 시간보다 나를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책이 재미가 없으신가?’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불세출의 천재인 그가 보기엔 모든 책이 다 시시해 보이지 않을까?
‘그럼 내 얼굴 보는 건 재밌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녀의 손길을 받지 못해 헝클어진 머리카락, 불길할 정도로 새빨간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밌기보단 무서울 것 같은데.’
제레미의 시선을 의식하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누르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제레미가 책을 덮었다. 그러곤 평상시와 조금 다른 표정으로 나를 그윽하게 쳐다보는데…… 어라? 눈빛이 평상시와 다른 것 같은데. 뭔가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고, 당장에 일을 저지를 듯이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호, 혹시?!’
갑자기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로맨스 소설의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어떤 방해도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밀실, 결혼한 남녀, 신혼, 이글거리는 남자의 눈빛……? 공교롭게도 지금의 내 상황과 로맨스 소설의 상황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소설 속의 남자는 여자에게 키스했는데…….’
혹시 지금 이게…… 키스하는 무드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럴 리 없어. 황자님은 첩자에게 키스할 정도로 생각이 없지 않아.’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제레미를 꼬시기 위해 팜므파탈인 척 연기했던 것처럼, 제레미 또한 어떠한 목적으로 나를 유혹하려는 중이라면?
‘오, 세상에!’
갑자기 생각이 딱딱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컬스병이라는 데도 꾸역꾸역 방 안으로 들어온 제레미, 게다가 춥다는 내 말에 냉큼 품을 내주기도 했었지. 오늘은 촉촉한 시선으로 적극적인 유혹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말은…….
‘황자님이 나를 꼬시려 하고 있다……?’
순간 제레미의 찐덕후로서 기쁜 마음이 드는 동시에 걱정이 밀려왔다. 나는 유혹에 약한 사람이 아니지만, 상대가 제레미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나…… 제레미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 채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던 그때였다.
“힐레인.”
제레미가 고개를 기울인 채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휘어지며 야살스러운 눈웃음을 자아냈다.
아아, 항복! 항복할 테니 그만해. 그의 유혹에 항복한 나는 기합이 바짝 든 목소리로 답했다.
“네, 넵!”
그러자 제레미가 설핏 미소를 지으며 내가 있는 곳 가까이 다가왔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고 싶은 거……. 그의 의중을 이미 파악 완료한 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곤 속으로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생각하며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나랑 춤추지 않을래?”
이어진 제레미의 물음에 눈을 반짝 떴다. 젠장, 키스가 아니었어?
‘분명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단정한 몸짓으로 내게 손 내밀고 있는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마냥 예뻐 보이기만 했던 미소가 오늘따라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그 말 하려고 계속 저를 쳐다보신 거예요?”
“응? 제레미가 쳐다보는 거 알고 있었어……? 책 보느라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뾰족한 내 물음에 제레미가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볼을 붉힌 채 쑥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씩 기분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춤은 왜요?”
“우리 연회장에서 제대로 된 춤을 춰본 적이 없잖아.”
“그거야…….”
당신이 백치 연기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 않나?
갑자기 제대로 된 춤을 추자는 제레미의 의중을 파악할 길이 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힐레인.”
그가 연분홍빛의 고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러곤 한 손은 내게 내밀고 한 손은 뒷짐을 쥔 채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제레미는 그저 아름다운 신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야.”
아름다운 신부? 순간 거울 속에 비친 부스스한 머리 모양이 떠올라, 손으로 머리카락을 슥슥 빗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그마저도 예뻐 보인다는 듯 다정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 이 남자가 오늘따라 진짜 왜 이래?’
연이은 유혹 폭탄에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던 그때, 제레미가 허리를 숙인 채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완벽한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자태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추다 마다요. 이걸 어떻게 거절해?
“……좋아요.”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스르르 녹을 듯한 미소를 짓던 그가 가볍게 나를 끌어당겼다. 손으로 허리를 감고 눈을 마주쳐오는데…….
춤이란 게 이런 건가? 어색하면서도 부끄럽고 발가락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첫 스텝을 뗀 것은 그였다.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했다. 사교계 춤은 1도 모르는 나지만, 그가 굉장한 실력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앗.”
하마터면 실수로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내 자세가 크게 흐트러지자 그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
연약한 유리잔을 손에 쥐듯 조심스레.
“……!”
나를 새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그가 신기했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힘이 셀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저 하얀 셔츠 안에 대체 어떤 근육을 숨기고 있는 거야?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의 팔 위로 손을 살짝 미끄러뜨렸다. 그러자 손바닥 아래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와, 와오.
“힐레인. 지금 표정이 이상해지고 있어.”
제레미가 쿡, 하고 웃었다.
“제 표정이 뭐 어때서요?”
속으론 들켰다 싶었지만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그는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이 재밌는지 계속해서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랄까…….”
“뭐, 뭐요?”
“음, 그래. 꼭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 같아.”
“…….”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아주 정확한 비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