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 위험한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비켜라, 레틴.”
“…….”
레틴은 지금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누군가 제레미를 봤다간, 결코 백치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까.
“지금 어떤 표정 짓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
“방금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셨습니다!”
상처받은 듯한 레틴의 모습에, 제레미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잠시 후 손을 뗀 그는 한결 이성을 찾은 상태로 보였다.
“방금 전엔 미안해. 나중에 설명할 테니 지금은 비켜줘.”
“설명하실 수는 있고요?”
몰아세우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제레미의 절박한 눈빛에 레틴은 몸을 비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꼭 설명하셔야 합니다.”
반쯤 체념한 채 레틴이 그를 놓아주었다. 반드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 제레미를 쫓았다.
‘나도 모르는 걸 과연 설명할 수 있을까.’
제레미가 복잡한 표정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은 모두 지워지고. 그의 머릿속엔 오직 힐레인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 남았다.
* * *
얼마 후. 마지막 난관이었던 문지기 기사까지 제치고 제레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헉, 헉.”
너른 침대 위로 작게 솟아오른 몸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탓에, 하얀 이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컬스병이라니……. 대체 왜 그런 병이 걸린 거야.’
제레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조심스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혹여 제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고통에 짐을 보탤까 봐.
“…….”
힐레인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열에 들떠 안쓰러울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제레미는 가여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마력을 개방시켰다.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열을 삭히기 위해.
“…….”
자신의 손길에 놀란 것인지 힐레인이 몸을 굳혔다. 제레미는 그런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 다독여주었다.
“쉬이, 괜찮아.”
제레미가 서서히 상체를 숙였다. 아름다운 은빛의 머리카락이 힐레인의 이마에 닿자, 그녀가 몸을 움찔했다.
“다, 괜찮아.”
제레미는 살짝 떨리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가지런히 입을 맞추었다. 기도하듯 감긴 그의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잘게 흔들리며 은빛의 잔광을 남겼다.
* * *
반면, 힐레인은 저를 다독이는 손길에 심장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다, 괜찮아.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아버렸다. 영혼까지 어루만져지는 듯 포근한 위로를.
‘게다가 방금 전……, 그 감촉은 뭐였을까.’
이마에 닿았던 감촉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있어 보진 못했지만, 이마 키스를 받은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그, 그럴 리가……. 손이었겠지. 손!’
부끄러운 생각을 하다 달아오른 볼은 금세 열이 식어버렸다. 이마에 닿은 서늘한 손의 감촉 때문에.
‘황자님 손 되게 시원하다.’
이마에 닿은 그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이마의 뜨뜻한 열에 냉기가 식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제레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다.
‘으음, 이젠 좀 추워지려고 하는데…….’
볼을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길에, 열에 달아올랐던 몸이 금방 식어버렸다. 문제는 5분 정도가 지나자 몸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떡하지? 좀 더 견뎌 볼까.’
하지만 견디자고 생각한 지 몇 분 만에 나는 몸을 웅크렸다. 두 팔로 몸을 감싸는데 문득 침대에 앉은 제레미의 몸에 내 팔이 닿았다.
‘따, 따뜻하다. 손은 차가운데 팔은 따뜻해.’
추위를 견디지 못한 몸이 저절로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두 팔로 제레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꽉!
“…….”
“…….”
환자치고는 힘이 너무 셌죠……?
얼굴 위로 내려앉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끙끙 앓는 척을 시작했다.
“으음, 으. 너무 아프다. 완전 아프다.”
하지만 내 발연기가 오히려 제레미에게 확신을 심어버린 모양이었다.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슬쩍 실눈을 뜨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레미가 보였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냐 묻는 제레미의 표정이……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레미가 다시 한번 물었다.
“거짓말, 맞지?”
제레미의 묵직한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시선만큼은 매서웠다. 한 번만 더 거짓말했다간 지옥에 떨어지는 거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죄송해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으음, 많이 화났나? 슬쩍 눈동자만 굴려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
“……어엇.”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있는데 불현듯 제레미가 내 어깨를 잡아 침대에서 달랑 일으켜 앉혔다.
“이유.”
단 한마디 말했을 뿐인데. 어쩐지 곧바로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권위감이 느껴졌다.
“제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요.”
말을 하고 보니 지금 이 상황이 꼭 부모님한테 혼나고 변명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을 피하려고 하니까 이 방법밖엔 없을 것 같더라고요.”
여전히 엄한 표정의 제레미를 한 번 흘끗 쳐다본 뒤, 야단맞을 걸 걱정하는 아이처럼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손 뜯지 말고.”
제레미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에게 손이 붙잡힌 채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그런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저더러 손도 뜯지 말라 하시면…….”
불만 가득한 내 말투에 순간 제레미의 표정에 힘이 풀렸다.
어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웃으신 거죠?”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헤헤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색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지금 꾀병을 부린 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고? 그 사람이 누군데?”
다시 본론을 치고 들어오는 그를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 근데, 황자님이 오늘따라 말을 왜 이렇게 잘하시지? 지금 백치 연기 중인 게 맞긴 한가?’
백치 연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본래 제레미의 모습과 너무 자연스레 섞여 있어 조금 헷갈렸다.
“지금 제레미 말에 집중 안 하지?”
아, 본인 이름을 말했다. 백치 연기 중이시구나.
단순하게 결론을 내버리고는, 곧바로 그에게 집중했다.
“루 하버마스 대공이요.”
“그자는 왜?”
“……그냥 좀.”
이유는 말하기 곤란했다. 그러면 내가 대공의 목걸이를 훔친 것도 말해야 하는데.
황태자와 엮인 것도 그렇지만, 내가 물건이나 훔치는 사람이란 걸 알면 그가 얼마나 실망할까 싶었다.
눈이 삐죽이 올라간 제레미를 보며 나는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했다. 대화 주제를 다른 데 돌려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으으음.
“……추운데.”
“……뭐?”
“그냥 저 좀 안아 주시면 안 돼요?”
잠깐 맛보았던 온기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몸이 너무 춥고 한기가 도는데…….”
변명거리를 짜내느라 말을 못 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너무 추웠어.
어깨를 부르르 떨자 제레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추궁하는 건 체념했는지, 그가 내게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네!”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냉큼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단단한 가슴 위로 얼굴을 기대자, 따뜻한 온기가 볼 위로 스며들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두 번째 생에서, 심한 열감기에 걸려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제레미는 춥다고 칭얼거리는 나를 어르고 달래줬었다. 지금처럼 따뜻한 온기로.
‘어쩐지…… 두 번째 생에서의 황자님을 다시 만난 것 같이 느껴져.’
조금 더 욕심을 내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끙- 하는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 *
힐레인은 온기를 찾는 아기 새처럼 자꾸만 제 품에 파고들었다. 잠시 후 몸이 따뜻해지자 졸음이 쏟아지는지, 지금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태였다.
‘널 어쩌면 좋을까.’
자신의 품에 있는 이는 황태자의 첩자다. 경계해야 할 인물이지만, 어쩐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너에게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
한발 뒤로 물러서 거리를 둬야 마땅한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에게 다가가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우음…… 황자님.”
그런데 그때, 힐레인이 자면서 자신을 불렀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초승달 같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제레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힐레인의 입술에 닿았다. 말랑한 입술이 그의 손에 의해 살짝 눌렸다.
“그렇게 웃지 마…….”
제레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무언가에 굶주린 짐승처럼 탁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난 네게 충분히 빠져든 상태니까.”
그는 힐레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는 감정의 시작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굳이 시작점을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힐레인을 처음 만났던 순간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다라. 그는 그런 감정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첫눈에 마음을 내줄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이었던가?
하지만 우습게도 힐레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가슴 속 가득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전까진 몰랐던 사람인데, 맑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제게 다가올 때면,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로 감아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특유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찌를 땐 폐부 가득 봄을 들이킨 것만 같은 포근한 기분을 느꼈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은 황태자의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첩자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인데, 새삼 놀랄 일도 없는데.
하지만 자신했던 것과 달리, 그는 아무런 대비도 못 한 사람처럼 속수무책으로 꺾여버렸다.
그 후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날뛰는 마음을 자물쇠로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힐레인은 거침없이 문을 두드려댔다.
자꾸만 곁에 다가오고, 손을 내밀고, 웃어 보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녀는 자신의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우음.”
제레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힐레인이 제레미의 품에서 볼을 비볐다. 몸을 움찔한 그가, 힐레인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흑요석처럼 까맣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아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었나.’
지금 이 순간에도 넋을 놓고 힐레인을 바라보는 자신에게 허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내 부정해왔던 감정을 이젠 그만 인정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냥.’
제레미가 힐레인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뺨을 쓸려던 손은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이내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그냥 사랑해버릴까.’
제레미가 힐레인의 머리카락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잠을 깰 것을 염려한 건지,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네가 어떻게 행동해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러니 딱 한 번만 마음이 가는 대로.
이 위험한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 * *
‘좋은 향기…….’
눈을 감은 채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는 곳에 볼을 비볐다. 그러자 시트러스 향이 레몬 향과 섞여 코를 간질였다.
‘황자님 향기다.’
코를 킁킁거리자 부드러운 감촉을 자랑하는 ‘무언가가’ 움찔했다.
‘으응? 뭐지. 멀어지지 말라고.’
옅어지는 향이 아쉬워 두 팔로 그 무언가를 꽉 붙들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끙-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인내하는 듯한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