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내가 아프다는 말에
기절해버린 큰 시녀 센. 그리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시녀들. 그 누구 하나 남아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사람이 없자, 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쯧. 거기 문 앞에 둘! 여기 이 시녀도 데리고 나가게나. 내가 부르면 필요한 것만 가져다주고 다시 나가면 돼.”
“예, 예!”
“그리고 황자비의 컬스병을 알리고, 그 누구도 이 방 근처에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도록.”
잠시 후 방 안에는 판과 나, 둘만 남았다. 남겠다 자처하는 시녀가 한 명도 없다는 게 꽤 충격이었는지, 그가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넌 어떻게 이리도 인덕이 없느냐. 네 빈약한 인맥에서 나를 제외하면 사막이로구나, 사막.”
“사막까진 아닌데요…….”
인덕? 으음, 보자 보자 인덕이라.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있는 인맥이라곤 비뚤어진 황태자와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도베르, 황자님은 아직 인맥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패스, 그리고…… 또 누가 있지?
음. 없네, 없어. 황량한 사막 맞네.
“괜찮아요, 대신 판님이 있잖아요, 헤헤.”
“으이구. 이러니 내가 못 본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
판은 내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다. 3년 전 임무로 인해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를 살려준 게 판이었다. 황태자의 부탁이 있었다고는 하나, 오직 황족만을 치료하는 최고위 치료사였던 그는 얼마든지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못 본 체하지 않고 도와줬다. 꼭 지금처럼. 일전에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뭐라더라? 아 그래, 사자한테 붙잡힌 새끼 양 같아 가여워서 치료해준 거라고 말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이유긴 했지만 어쨌든, 그 후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 나는 판을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며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굴었다.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괴팍하기로 소문난 판 영감은 점점 내게 곁을 주기 시작했고, 3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할아버지와 친손녀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헤헤, 늘 감사합니다.”
“……그렇게 웃지 말거라, 이놈아. 다음엔 안 도와줄 거야.”
“또 도와주실 거 알고, 으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꿀밤이 떨어졌다. 이마를 매만지며 항의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판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철부지 손녀를 보듯 쳐다봤다.
“쯧쯧. 그나저나 이번엔 또 무슨 일이냐? 갑자기 황자비가 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컬스병에 걸린 척은 왜 하는 게야?”
“다 임무 때문이죠, 뭐.”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냉큼 다 말 못 해?!”
판과 친해져서 좋은 점도 많았지만 약간의 불편한 점이 있다면 그건 잔소리였다.
“으악,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아요!”
“이놈이! 잔소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이대로 물러설 판이 아닌 걸 알기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혹시나 목걸이를 푸는 방법을 알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으나, 그 역시도 이런 목걸이는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왜 목걸이를 착용했느냐?! 그냥 그대로 황태자 놈한테 던져주고 올 것이지.”
황태자 놈이라는 말에서 낄낄 웃었다. 그러자 그가 지금 웃음이 나오냐며 내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아야. 그럼 어떡해요! 대공이 굳이 걸어주겠다는데. 저는 일반 목걸이인 줄 알았죠.”
“그놈이랑은 친하냐? 지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왜 너한테 걸어줘?”
“사랑의 묘약을 써서 그럴걸요? 꽤 비싼 약인지 ‘절대복종’상태가 되더라고요.”
“뭐? 절대복종?”
절대복종이란 말에 판의 표정이 묘해졌다. 나름 약에 대해 통달한 분인데, 시녀들도 아는 정보를 모르시다니. 아무래도 내가 그에게 지식을 좀 전수해줘야겠는데.
“왜 그 있잖아요. 비싼 묘약 중에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것도 있다던데요?”
“……그거 다 지어낸 말이다!”
무슨 허무맹랑한 말을 하느냐는 듯 그가 소리쳤다.
“네? 지어낸 말이라니요?”
“세상에 절대복종시키는 물약이 어디 있어? 그런 게 있었으면 황태자 그놈이 온 세상을 발밑에 뒀을 거다.”
세상에나. 듣고 보니 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충격에 입을 쩍 벌리자 판이 흉하다면서 손으로 닫아주었다.
“이런 순진한. 사랑의 묘약이라고 해봤자, 회유하는 데 살짝 도움을 줄 뿐이야.”
“회유요?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냥 대공한테 목걸이 좀 달라니까 바로 주던데…….”
“뭐? 그런 일이……. 잠깐. 그 묘약 내가 살펴보아야겠다. 남아있는 게 있느냐?”
그의 말에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한 방울 정도 남아있을 것 같긴 한데.”
“이리 줘.”
내게서 유리병을 뺏은 판이 이리저리 묘약을 살폈다.
“꽤 강력한 묘약을 쓰긴 했군.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절대복종을 시키는 물약은 없어. 자네 혹시 이 묘약을 다른 것과 섞지는 않았나?”
“아! 초콜릿.”
부랴부랴 시녀에게 받았던 초콜릿을 내밀었다. 판이 초콜릿을 반으로 뚝 쪼개자, 알 수 없는 액체가 주욱, 흘러나왔다.
“수면제도 좀 발라놓았어요.”
“겉엔 수면제가 발려 있고…… 안은 보자, 음? 이것도…… 사랑의 묘약인데?”
“네?!”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긴 한데. 너, 이거 어디서 났느냐?”
“시종으로 분장했을 때, 시녀한테서 받은 건데요?”
“쯧쯧. 벨타데인지 뭔지 그것 때문이군.”
“그럼 사랑의 묘약이 합쳐져서 대공에게 부작용이 생긴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네가 절대복종을 일으키는 약을 발견했을 수도 있겠구나.”
“네?!”
“이건 내가 들고 가서 따로 더 조사해 보마.”
하하하. 그러니까 지금…… 이것저것 온갖 약을 다 사용한 바람에 루가 절대복종 상태가 된 거라고?
순간 달콤한 꿀을 발라놓은 듯 보였던 루의 눈동자가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기를…….’
* * *
판이 나가고 얼마 후, 제레미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시끌시끌한 게 누구랑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듣기 위해 문으로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들어가게 해줘.”
“안 됩니다, 황자님. 황자비님께서는 컬스병으로 격리조치 되었습니다.”
“……황자님, 그냥 돌아가시는 게…….”
제레미는 문을 막아선 기사들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레틴이 만류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제레미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켜. 이럴 땐 더더욱 내가 같이 있어 줘야 해.”
감동이야. 컬스병이라는데도 꾸역꾸역 방에 들어오려 하시다니. 물론 이것도 연기의 일환이겠지만, 그래도 기뻤다. 컬스병이라는 말에 시녀들처럼 도망쳤으면 좀 우울했을 것 같단 말이지.
“꼭 들어가시겠다면 함께 감금조치 하겠습니다.”
“이런 건방진!”
이번엔 문지기 기사와 레틴의 말싸움이 시작됐다. 레틴이 매섭게 쏘아붙이자 기사가 위축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함께 격리하겠다는 말은 꿋꿋이 고수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자님이시라 해도 안 됩니다. 이 방에 들어가시면 최소 3일은 감금되어야 합니다.”
3일이나? 제레미가 그런 손해까지 무릅쓰고 나를 보러올 것 같진 않았다.
‘에잇. 잠깐 황자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네.’
아쉬운 마음에 문틈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혹여나 틈 사이로 우리 황자님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해서. 그런데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알겠어. 감금되어도 좋으니 제레미를 들어가게 해줘.”
“황자님!”
레틴이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문 너머로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이크!’
금방이라도 문이 열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곤란했다. 지금 나는 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는 상태였으니.
‘컬스병에 걸린 사람이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다들 뭐라고 할지!’
오직 이 상황을 무마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침대로 냅다 뛰었다. 제법 거리가 있어 힘들 줄 알았는데, 다행히 침대에 몸을 숨긴 직후 문이 열렸다.
“헉, 헉.”
아이고, 힘들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뛴 탓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이러면 이불이 들숨 날숨으로 들썩거릴 게 분명한데.
‘대화를 엿듣다 놀라 침대로 질주했다곤 절대 말 못 해. 그냥 이대로 계속 아픈 척해야겠다.’
어차피 컬스병이라 거짓말을 한 상태이니 아픈 척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헉. 하이고.”
그래서 일부러 끙끙거리는 추임새도 넣어주었다.
“…….”
제레미의 단정한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침대 한쪽이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끙끙거려볼까 생각하던 차, 불현듯 이마에 서늘한 촉감이 닿았다.
“……!”
“신부야……. 많이 아파?”
귓가에 부드럽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일제히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숨 쉬는 법마저도 잊어버린 채, 이마 위를 덮은 커다란 손에 집중했다. 이마가 만져지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속이 간질거렸다.
민들레 씨앗이라도 날아든 것처럼.
* * *
제레미가 힐레인을 만나러 가기 30분 전쯤. 그는 레틴과 함께 테라스에 있었다.
“레틴.”
제레미는 금빛의 샴페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촉촉이 젖은 연분홍색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슬쩍 옆으로 비킨 시선은 예리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카야의 돌에 대한 건 알아봤어?”
“안 그래도 지금 보고를 올리려 했습니다. 장소를 옮기시겠습니까? 아니면 방음 마법을 써주시겠습니까.”
연회장과 연결된 테라스인 만큼 언제 누가 들어올지 모를 일이었다. 레틴이 불안한 듯 주변을 살폈다.
제레미는 손을 허공에 살짝 쓸며 간단하게 그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방음 마법을 사용했어, 이제 편히 말해도 괜찮아.”
제레미가 샴페인 잔을 빙글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유리잔에 부딪힌 샴페인의 빛을 유유히 담아냈다. 금빛이 녹아든 연보랏빛 눈동자가 섬뜩하리만치 아름답게 빛났다.
“……카야의 돌에 대해 아는 자를 확보해두었습니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했던 레틴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정보를 두고 흥정을 하고 있는 중이라…… 쉽게 입을 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황자님께서 직접 가서 심문하셔야 할듯합니다.”
“그럼 지금 가지. 카야의 돌이 황태자의 손에 넘어가면 안 되니까…… 서둘러야 해.”
제레미는 레틴이 잡은 자를 마법으로 심문해 입을 열게 할 생각이었다. 백치 연기 없이 민얼굴을 드러내야 하겠지만 기억 소거 마법을 걸면 그만이었다.
“예.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레틴이 앞장을 섰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둘은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화, 황자님. 헉헉.”
제레미 앞으로 웬 시종 한 명이 달려왔는데, 다급한 표정이며 말투가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황자비님께서…….”
“……?”
“컬……컬스병에 걸리셨다고 합니다!”
시종의 말에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섭다는 둥. 옮기기 전에 당장 황궁을 나가야겠다는 둥. 여러 소리가 뒤섞여 혼란을 만들어냈다.
“황자비는 어디 있느냐.”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제레미의 목소리만이 침착했다. 레틴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런 때엔 저 귀족들처럼 소리를 지르는 게 더 백치 같을 텐데. 왜 저리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 보이실까.
“황자비님은 현재 황자궁에 격리되어 치료 중에 계십니다.”
“…….”
시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레미가 뒤를 돌았다. 그러곤 서둘러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자님!”
레틴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제레미를 쫓았다.
‘어디로 가시는 거야?’
카야의 돌을 해결하러 가기로 해놓고,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걸까. 게다가 저 표정은 대체 무어란 말이야.
“황자님! 잠깐만요.”
혼란에 빠진 레틴이 제레미의 팔을 붙들었다.
“왜?”
레틴을 향한 제레미의 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늘 미소를 그리고 있던 입술은 일자로 다물어져 있고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레틴은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카야의 돌부터 해결하고 가시지요.”
“……레틴.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해.”
“나중이라니요! 지금은 카야의 돌이 언제 황태자에게 넘어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입니다.”
나중이라니? 지금 카야의 돌보다 더 급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혹시……?
머릿속을 스친 한 가지 의문에 레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첩자가 아프다는 말에 이렇게 이성을 잃으신 겁니까?”
제레미는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보며 레틴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첩자 따위가 아픈 게 뭐라고 이렇게 열 일 제치고 가시는 거야?’
레틴은 답답한 마음에 도를 넘는 질문을 했다.
“설마 그 여자를 걱정하고 계십니까? 황자님을 감시하러 온 첩자를?”
레틴이 입술을 짓씹었다.
황태자의 충복, 힐레인 리야. 황태자가 대놓고 첩자로 보낸 그녀는, 틈만 나면 제 머리에 혼란을 가득 안겨주었다.
지금도 봐. 그 첩자를 걱정하고 있냐는 물음에 답이 없으시잖아. 레틴은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감정만은 아니길 바라며 두 팔을 벌렸다.
“못 가십니다.”
레틴은 처음 보는 제레미의 표정에 잠시 어깨를 움찔했다.
“비켜라, 레틴.”
일순간 제레미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