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절대복종의 묘약
혹시 시녀들의 초콜릿에 묘약이라도 들었던 건가?! 혼란에 빠진 채 루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달달한 꿀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이, 이것 놔!”
“쉬이, 가만히 있어요, 내 사랑.”
내…… 사랑? 이 인간,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닭살 돋는 별명까지 붙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초콜릿에 묘약이 들었을 거란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초콜릿을 다섯 개나 먹었지? 오, 세상에.
내 어깰 애착 인형마냥 꼭 끌어안은 루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좋은 말 할 때 좀 떨어져 봐. 내 힘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당신, 죽는다?”
스산하게 읊조리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못 빠져나갈걸요. 저…… 아무 데나 그냥저냥 널려 있는 검사는 아니거든요.”
젠장……. 속기마검사라 이건가? 이를 증명하듯, 아무리 힘을 줘봐도 루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품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리곤 온 힘을 다해 팔을 올려, 그의 입에다 사랑의 묘약을 꽂아 넣었다.
얼떨결에 묘약을 꿀꺽 삼킨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
“이 팔 당장 풀어.”
“넵.”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루가 내 말에 바로 팔을 풀었다.
‘와, 황태자가 준 이 약…… 혹시 절대복종의 묘약이었나?’
아까 전 시녀들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루를 쳐다보았다. 약의 효과인지 그의 현 상태는 ‘절대복종’이란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무얼 말해도 다 들어줄 것만 같달까.
‘그럼…… 지금 물어볼까?’
절대복종에 걸린 상태이니 어쩌면 내게 목걸이를 줄지도 몰랐다. 나는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착용한 목걸이. 나한테 줄 수 있어?”
그가 대번에 목걸이를 풀어 내게 내밀었다. 훈련을 잘 받은 대형견처럼.
나는 그의 손에 놓인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준다고? 진짜? 주겠다며 눈앞에 들이미는데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나한테 줄 거야?”
“물론입니다, 내 사랑.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거 정말 위험한 약이네. 황태자는 대체 이런 약을 어디서 구했대? 혹시나 황자님이 먹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주의해야겠는데?
“그럼 고맙게 잘 받을게.”
목걸이를 받아가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루가 장난을 치듯 다시 손을 거두었다. 어라? 다 잡은 물고기를 눈앞에서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준다며?”
“제가 걸어드리고 싶어요.”
“…….”
그냥 주면 안 되나. 떨떠름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뒤를 돌았다. 명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이겠지만, 이런 작은 부탁마저 거절하기엔 좀 미안해서 말이지.
하지만 나는 곧 괜히 그랬다는 후회감에 사로잡혔다.
‘윽. 간지러워.’
루의 손길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그의 손길이 솜털을 간질일 때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게다가 예민한 피부에 스치는 루의 손길은 너무도 관능적이었다. 대체 목걸이를 걸어주는 건지 목을 쓰다듬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렇다고 그의 손이 내 피부에 닿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꼭 피부에 그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느껴질까.
영겁 같던 불편한 시간이 지나고 루가 입을 열었다.
“다 됐어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음, 고마워.”
“고마우면 안아주세요.”
“컥, 뭐? 안아?”
“저를 안아주세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입을 맞춰요.”
그가 붉어진 눈으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여유만만하고 자신감 넘치던 표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내려간 눈꼬리가 애처롭게 보였다.
‘그냥 빨리 사라져줘야겠다. 어차피 한 시간 뒤면 약 기운도 없어질 테고…….’
“얌전히 말 잘 들으면 다시 와서 머리 쓰다듬어 줄게.”
“정말요? 그럼 저는 이제 뭘 할까요?”
“저기…… 침대로 가서 자고 있어.”
“네.”
그가 조용히 침대로 가서 일자로 누웠다. 자기 의지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모습에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내가 감기 걸릴까 봐 그래요?”
“으, 응?”
얼버무리듯 답하자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이대로 그를 보고 있다간 양심이 증발해버릴 지경이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잘 자. 기왕이면 내일 아침까지 푹.”
“네, 그럴게요. 내 사랑.”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평소 불면증에 시달린다기에, 잠들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사랑의 묘약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싶었다. 자라는 말에 바로 잠이 들다니.
‘미안, 미안합니다.’
곤히 잠든 그를 잠시 쳐다보다, 창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루의 목걸이가,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 * *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야, 어떻게 그분의 기사가 될 수 있겠느냐!]
양심의 가책이 심했던 탓인가.
루의 방을 빠져나오며,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래, 어릴 때나 다 큰 지금이나 나는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직업과 어울리지 않게.
그렇다고 마냥 착한 건 아니었고, 그냥 동정심이 잘 드는 그런 유형이었다.
한 번은 떠돌이 강아지에게 우유를 먹여준 일이 있었다. 할짝할짝 우유를 받아먹는 모습에 마음을 뺏겨 아버지와의 검술훈련에 지각했더랬다.
‘그때 야단 많이 맞았지.’
아버지는 내가 지각한 것보다 한낱 강아지에 동정심을 품었단 것에 더 화가 나 있었다. 그날 나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질을 당했고, 그 후로는 강아지를 볼 수 없었다.
나 때문에 강아지의 존재 자체가 사라졌단 사실은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아버지 앞에선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동정심이 들고, 가여운 마음이 들어도 꾹 눌러 참았다.
그때의 일은 훗날 그림자 기사 일에 많은 도움이 되긴 했었다. 사람을 베고 온 후, 방에서 눈물을 철철 흘릴지언정 결코 그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으니까.
‘딱 한 번 있었던가.’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딱 한 번 있었다. 17살의 어느 날, 그림자 기사 따위 이제 못 하겠다고 아버지께 선언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울며불며.
[헤렌 축제에서 폭탄을 터뜨리래요. 저는 못 하겠어요, 도저히.]
그때 내가 맡았던 임무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축제 날, 그것도 광장 한가운데에서 폭탄을 터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버튼 하나에 어린이, 노인, 어른 할 것 없이 죽어버릴 게 분명한데. 어떻게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안 하면 네가 죽는다.]
아버지의 손끝은 정확히 내 명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맹세의 보석’이 박혀 있는 그곳을.
[저는 죽어도 상관이 없어요.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나아요.]
[정신 차려라. 네가 그분을 돕다가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이 아비는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죽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 불복종으로 인한 죽음은 더더욱.]
평상시와 달리 아버지는 그날 나를 때리지 않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리만치 차분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폭탄을 터뜨릴 거란 걸.
헤렌 축제 당일.
나는 명령 불복종에 의한 죽음을 각오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아프단 변명이라도 해서 임무로부터 도망칠까도 생각해봤지만 내가 도망치면 어차피 다른 그림자 기사가 이 일을 맡게 될 터. 누군가 이 버튼을 누를 때까지 대역이 줄을 잇겠지. 그건 폭탄이 터지는 걸 관망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폭탄 버튼은 그 누구도 못 눌러. 내가 반드시 막을 거야.]
하지만 그날, 굳게 다짐했던 것과 달리 버튼을 누른 것은 나였다.
절대 그리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던 내가, 그 버튼을 눌렀다.
나는 그 일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할 것 같았다. 내게는 이름도 모르는 수천의 사람들보다는, 동생이 더 소중하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모순된 내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날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내 동생 테이를 광장에 데려왔다.
[아버지잖아? 테이를 왜 데려오셨지?]
테이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옆으로 뾰족이 겨누어진 한 자루의 단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검? 아버지?! 어째서 테이에게!]
테이의 바로 뒤에서 단검을 겨누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버지였다.
[눌러.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가 죽는다.]
그는 내 약점을 쥐고 흔들면서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두 자식을 지옥으로 떠밀고 있으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충성이 뭐기에.”
헛웃음을 지으며, 서글픈 옛 기억에서 깨어났다. 그러곤 찝찝한 기분을 떨치려고 일부러 다른 생각을 했다.
‘됐어, 생각해봐야 기분만 안 좋아질 뿐이지. 지금은 목걸이에나 집중하자.’
목에 건 목걸이의 펜던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흔들어도 보았다. 혹시나 미지의 힘이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을까 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네. 진짜 평범한 목걸이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황태자가 아무 능력도 없이 예쁘기만 한 목걸이를 가져오라고 할 리가 없는데.
시간만 많으면 따로 조사를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묘약의 효능이 떨어지는 30분 후면 루가 깨어날 테고,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당장 황자궁으로 찾아오겠지.
‘그전까지는 황자궁에 돌아가 있어야 알리바이를 댈 수 있어.’
루가 찾아오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방문을 열어줄 계획이었다.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하면, 내내 방에만 있던 사람에게 무슨 소리냐고 둘러대야지.’
시종복 차림을 한 채 창문으로만 들락거렸으니, 문지기들은 내가 내내 방에만 있었다고 증언해줄 테고. 루는 심증만 품은 채 쓸쓸히 돌아가야 하겠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범인으로 몰릴 확률은 극히 낮았다.
계획의 성공 여부는 내가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얼른 목걸이를 숨겨서 황자궁으로 돌아가야겠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 뭐야. 목걸이가 왜 안 풀리지? 잠금장치는 어딨는 거야.”
목걸이를 한 바퀴 더 휙 돌려보았다. 하지만 체인 그 어느 곳에도 잠금장치가 없었다. 심지어 연결된 흔적도 없이, 완전한 일체형이었다.
‘……대공이 목걸이를 어떻게 풀었더라?’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곤 루가 했던 것처럼 펜던트를 잡고 앞으로 쭈욱 당겨보았다.
‘안…… 되잖아?’
안 된다. 이리 해봐도, 저리 해 봐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택한 건 목걸이를 머리 위로 올려서 빼내는 것이었다.
‘난 대두가 아니야. 대두가 아니……! 흡. 흐읍!’
미리 말 해두지만, 난 결코 대두가 아니었다. 하지만 목걸이가 빠져나올 정도의 소두도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턱, 귀, 코가 빨개진 채로 목걸이를 손에서 놓았다.
‘하아…… 이를 어쩌지. 이러면 황태자에게 목걸이를 가져다주지도 못하잖아.’
훔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드릴 수는 없어요. 미친 척, 뻔뻔한 얼굴로 보고를 올리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그럼 목을 잘라야겠구나.’
상상 속 아인은 사악한 표정으로 끌끌 웃고 있었다.
‘으아악. 소름 돋아.’
두 손으로 목을 소중히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공한테 목걸이를 어떻게 푸는지 물어볼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랑의 묘약 효과가 다 떨어지기까지는 통상 1시간. 아무리 좋은 묘약이라 해도 효과는 1시간을 넘지 못한다.
나는 이미 여기까지 오는 데 30분을 소비해 버린 상태였다. 다시 또 돌아가려면 30분이 걸릴 텐데.
지금 가봤자, 묘약의 힘이 풀려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목걸이를 푸는지 물어도 안 가르쳐 줄 게 뻔하고…….
‘가르쳐주기는커녕 당장에 도둑으로 몰아가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 세상에. 나 이번엔 1년도 못 채우고 죽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