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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바람둥이의 일편단심을 얻다 (20/120)

20. 바람둥이의 일편단심을 얻다

‘설마 내가 황자비인 걸 알아본 거 아냐?!’

깜짝 놀라 가발을 양쪽으로 쭉쭉 잡아당겼다.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자 함이었으나, 그다지 소용은 없어 보였다.

그 사이, 시녀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를 어쩌지? 황자비가 왜 시종 차림이냐고 물으면…….’

시녀들의 시선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긴 침묵 끝에 시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시녀의 볼은 한여름의 복숭아만큼이나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 가까이…… 있었네요.”

시녀 한 명이 입을 열자, 다른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있었어요. 가까이에.”

“그런데, 저분은 누구실까요?”

시녀의 한 마디에, 다른 시녀들이 봇물 터진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들키지 않은 건가……?’

부담스러운 시선은 여전했으나, 황자비인 걸 알아차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중얼거리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남장한 것을 생각하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아하하. 안녕하세요?”

“어머, 목소리도 고우시잖아. 중성적인 목소리야.”

“당신은 어디 소속이죠?”

“이름은요?”

갑자기 시작된 추궁에,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음…… 이름은 힐이고, 황자궁 소속입니다.”

“황자궁 소속…… 그래서 우리가 몰랐구나.”

“저…… 혹시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뇨…….”

남편은 있지만.

“들었어? 없으시대.”

“어머, 왜 없으시지?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나는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시녀들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뺐다.

“저희가 무서우세요? 오호호.”

“무서워하지 마세요. 우리, 대화나 할까요?”

“그, 그럽시다.”

대화하자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대공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녀들과의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사실 뭐, 내가 무슨 말만 해도 꺄르르 웃어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화제를 하버마스 대공으로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저, 아까 하버마스 대공에 대해 이야기하시던 걸 들었습니다.”

“어머. 그분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예, 뭐 조금. 어딜 가나 하버마스 대공 이야기인데, 사실 저는 그분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내 물음에 시녀들이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갔다.

“그분은 북부의 주인이에요. 이름만 주인이 아니라, 북부의 사나운 괴수들을 잠재운 진정한 주인이시죠. 여기서는 제국민이지만, 북부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어요.”

“그래요? 폐하께서 계시는데 대공이 왕으로 추앙받고 있다니…….”

“그래서 늘 폐하의 견제를 받고 계시죠.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견제가 덜했을 텐데, 루 대공은 북부민들에게 인기도 많거든요. 순전히 본인의 능력만으로 얻게 된 인기죠.”

“능력이라면……?”

“어머, 모르세요? 그분, 속기 마검사시잖아요.”

속기 마검사?

“속기 마검사…… 그거 엄청나게 대단한 거잖아요!”

흥분해서 두 볼이 다 뜨거워졌다. 검사라면 누구든 힘을 추종하기 마련이고, 그 힘의 최상위에 있는 자가 바로 마검사였다.

게다가 마검사만으로도 놀라운데 속기 마검사라니!

“속기 마검사면 원하는 때 바로 마검을 구현할 수 있는 거 맞죠?”

“맞아요. 그래서 그분이 대단하시다는 거예요.”

마법사들 중 물질을 통해서만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자들은 마검사나 연금술사가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검사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어 폭발적인 힘을 얻는데, 그 힘은 가히 하나의 군대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마검사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속도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검에 마력을 불어넣기 위해, 열에서 열다섯 줄 가량의 마법 수식을 외우고 적용해야 하니, 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가. 게다가 전투 중 마검의 성능이 떨어지면 또다시 마법을 걸어야 한다.

이러한 단점을 모두 극복한 것이 바로 속기마법사였다.

그들은 비상한 머리로, 바로바로 수식을 적용해버린다. 보통 1초 내외로 마법을 구현해버리니, 최강자 중의 최강자라 할 수 있었다.

‘루 대공이 속기 마검사였다니……. 전혀 몰랐어.’

회귀 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이야기였다.

사실 지금껏 황자님 지키기에만 급급했기에, 북부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몰랐다. 게다가 첫 번째, 두 번째 생에서 대공은 아예 등장 자체를 안 했었으니 완전히 관심 밖이었달까.

‘처음 듣는 이야기라 놀란 것도 있지만…… 존경해 마지않던 속기 마검사가…… 바로 ‘그 대공’이라니.’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솔직히 충격이 컸다. 흐물흐물한 바람둥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대공이 속기 마검사였다니?

그 후로 시녀들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바람둥이도 속기 마검사라는데…… 그동안 뭐 하고 살았니, 힐레인.’

나는 지금껏 남자친구도 안 사귀고 검술에만 몰두해왔는데.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는 그런 놈이 속기 마검사라니!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니……. 둔재는 웁니다.’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시녀들의 쉬는 시간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 품에는 초콜릿 상자가 가득 들려있었다.

“힐 씨에게 드릴게요. 사랑은 가까이 있는 거니까.”

“꺄하하, 얘가 뭐래.”

“또 봐요, 힐 씨!”

시녀들은 부끄러운지 서로를 토닥토닥 때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품 안에 콕 박힌 초콜릿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게 내 생에 첫 벨타데이 선물임을 깨달았다.

나 지금…… 첫 벨타데이 선물을 여자한테 받은 거야?

‘힐레인…… 참 불쌍한 청춘이로고.’

쓸쓸히 고갤 떨구었다.

* * *

한 시간 뒤. 나는 대공의 방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 방은 비어 있었다. 이런 행운이 있나 싶어 열심히 방을 뒤졌지만, 결국 목걸이를 찾지 못했다. 제발 방에 있기를 바랐는데. 아무래도 대공이 착용하고 간 모양이었다.

‘하…… 진짜 매일 착용하고 다니는 건가? 그나저나 속기 마검사한테서 어떻게 물건을 뺏어오지.’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때에도 임무가 허무맹랑하다 생각했는데. 솔직히 속기 마검사는 너무하지 않나? 한숨을 푹 내쉬며 호주머니 속에 든 사랑의 묘약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이걸 사용해야 하나.’

사랑의 묘약을 먹이면 목걸이를 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꺼림칙했다. 사랑의 묘약은 부작용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일단 수면제부터 사용해보자.’

고민 끝에, 아까 시녀들에게서 받았던 초콜릿 상자를 뜯었다.

‘대공에게 수면제 그대로 먹이는 건 어려울 테니, 초콜릿에 발라서 줘야겠다.’

뚜껑을 열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초콜릿이 보였다. 대체 이런 걸 왜 나한테 준 걸까. 보기만 해도 아까운걸.

아기자기한 모양의 초콜릿들은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들었을지 생각하니 죄책감이 살짝 들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범죄에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모르셨겠죠.’

속으로 짧게 사과를 한 후, 묘약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겉과 속에 골고루 수면제를 부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수면제 초콜릿을 접시에 가득 담고서 티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렇게 루 대공의 방 안에서 대기하기를 한 시간. 인내심이 바닥을 보여가던 그때, 대공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구석에서 청소하는 척했다. 다행히 그는 전혀 내 쪽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 목걸이인가.’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검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보였다. 황태자가 내린 임무의 목표물이었다.

그나저나 항상 목에 걸고 있는 건가? 저번에도 목에 걸고 있던데. 대체 얼마나 소중한 목걸이기에 매번 볼 때마다 착용하고 있는 걸까. 황태자까지 노릴 정도면…… 대단히 귀한 물건이겠지?

임무의 난이도가 쭉쭉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패할 확률이 높긴 했지만 성공만 한다면 이건 대박이다.

굳건한 충성심을 보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아인의 신임을 얻을 절호의 기회다. 그럼 아인은 제레미에 대한 내 거짓 보고도 굳건히 믿게 될 거고, 우리 황자님은 더더욱 안전해지겠지?

‘갑자기 루 대공이 황금덩이로 보이는 것만 같아…….’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루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아아, 피곤하다.”

연회에서 진탕 놀고 왔는지 그는 녹초 상태였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곤하신 것 같은데, 따뜻한 차와 초콜릿을 드시는 게 어떨까요?”

그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눈치챈 기색은 없어 보였다.

“차랑 초콜릿? 좋지. ……부탁할게.”

잠시 후 나는 수면제 초콜릿이 든 접시를 탁자에 놓았다. 그러곤 얼굴을 알아볼세라 멀찌감치 떨어졌다.

“고마워.”

고맙다니……. 생각지도 못한 인사에 어쩐지 양심이 아팠다. 하지만 이미 초콜릿은 루의 입속으로 돌진 중이었다.

‘이제 곧 잠들겠지. 3, 2, ……1.’

곧바로 곯아떨어지는 수면제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눈은 말똥말똥해 보였다.

‘뭐지? 아. 하나 더 먹는다.’

초콜릿이 제법 맛이 좋았는지, 루가 한 개를 더 입에 물었다. 그러기를 5개째, 나는 눈을 찌푸리며 루를 지켜보았다.

‘왜 안 자?’

루가 잠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그 순간. 루는 잠을 자는 대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초콜릿이 맛있네.”

“……그, 그렇습니까?”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그가 있는 쪽에서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이 초콜릿에서 내가 잘 아는 맛이 섞여서 느껴진단 말이지.”

“……무슨 맛이요?”

그가 초콜릿을 손안에서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내가 어릴 때 먹었던 수면제 맛이 느껴져.”

“……!”

그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독한 불면증이 있었거든. 그래서 웬만한 수면제는 다 먹어봤어. 그 말은…… 내가 대부분의 수면제에 내성이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수면제 효과가 없었던 거구나……!

하필이면 그가 수면제 과다 복용자였다니. 혹시나 그럴 일을 대비해 제법 강한 수면제를 사용했는데. 평소에 얼마나 독한 약을 먹어대면 이게 안 통한단 말이야?

“왜 말이 없어? 정말 수면제 맛이 난다니까? 못 믿겠으면 하나 먹어볼래?”

그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초콜릿을 내 쪽으로 건넸다. 분명 웃는 얼굴이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몹시도 화가 났다는 사실을.

“저는…… 잠이 많아서 그런 거 없이도 잘 잡니다…….”

뭐라는 거야?

나는 횡설수설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다섯 걸음만 더 가면 뒤에 창문이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변장 중이라 내가 황자비인 것도 모를 게 분명해. 일단은 철수하는 게 낫겠단 생각에 뒤로 한 걸음을 더 물렸다.

“잘 자서 좋겠네. 음, 그건 좀 부럽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던 루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게 걸어오던 그가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마력을 잔뜩 머금은 마검이 허공에서 등장했다. 검신 주변으로 붉은 마력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저게 속기 마검사?’

순간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 루의 주변을 몰아치는 마력의 기운과. 아찔할 정도로 멋있는 검신까지. 검사인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감상은 여기까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는 다급히 창문틀에 발을 올렸다. 그러곤 아래로 도약하려던 그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루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윽!”

거친 손길에 이끌려 상체가 강제로 돌려졌다. 고개를 들자 루의 얼굴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있었다.

“……!”

가까이에서 마주친 선홍색의 눈동자에 광기가 넘실거렸다.

“아…….”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그의 광기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강하게 쥔 손에도 힘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당신은.”

루는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려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제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러곤 다른 한 손으론 내 턱을 받쳐 올렸다. 얼굴 곳곳을 누비는 시선이 뜨겁고 예리했다.

‘날 알아보려나.’

아무리 시종복 차림에 가발까지 썼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못 알아볼 리 없지.

‘이제 이를 어쩌면 좋지? 정체도 다 들통난 것 같고…….’

온갖 생각이 스치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그때, 불현듯 느리고 간지러운 감촉이 볼을 통해 느껴졌다.

“몹시도 아름답군요. 내 사랑.”

내 뺨에 닿은 건 루의 손가락이었다. 내 볼을 관능적으로 쓰다듬던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였다. 방금 전 노기가 가득 서렸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 존댓말? 혹시 이런 상황에서까지 바람둥이 기질을 보이는 건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러자 루가 쿡, 웃음을 흘리며 내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펴주었다.

“찌푸려도 예뻐요.”

“뭐라는……!”

그가 다짜고짜 내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던 나는, 그의 품에 폭하고 감싸지듯 안겨버렸다.

“다 예뻐 보여서 죽을 것 같아요.”

다 예뻐 보인다고……? 대공의 상태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일전에 내가 묘약을 먹고 레틴을 끌어안았던 때랑 너무 비슷하잖아?

‘뭐, 뭐야. 혹시 시녀들의 초콜릿에 묘약이라도 들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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