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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잠자는 맹수의 입술을 만지려다 (18/120)

18. 잠자는 맹수의 입술을 만지려다

‘아무것도 안 발랐…… 응?’

아인의 몸에 손을 댄 순간 갑자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바닥이 위로 올라오는 것 같고, 다리는 구름을 디딘 것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왜, 왜 이러지.’

더는 몸을 지탱하기가 어려워 뭐라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곧바로 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기에.

“……!”

그런데 그때 허공을 향해 뻗은 손에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인의 손이었다. 그는 손목을 붙들어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었다.

“…….”

하지만 중간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 그가 내 몸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읏.”

어지러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문득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간신히 눈을 뜨자, 아인의 얼굴이 바로 지척에 보였다.

나 지금…… 이 냉혈한 품에 안겨있는 거야? 놀랍게도 아인은 비틀거리는 나를 자신의 위로 넘어지게 한 상태였다. 그 탓에 지금 나는 그의 가슴에 볼을 밀착한, 다소 민망한 자세를 취하는 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에게서 몸을 떼고자 다급히 상체를 드는데, 아인의 두 팔이 나를 단단히 고정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갤 들자, 피식- 웃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가 보였다.

“너도 참.”

나를 타이르는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르게 부드러웠다. 내가 아는 아인이 맞나 싶어 쳐다보자 그가 낮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손에 감았다.

“왜 내게 손을 대었느냐. 겁도 없이.”

아인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내게 손을 댈 때마다 어지러움이 조금씩 잦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마법입니까?”

“응. 여기 걸어두었던 마법이 발동한 듯한데.”

그가 손을 들어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짙은 녹색의 보석이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그 반지에 있는 보석…… 마나스톤인가요?”

마나스톤은 마법이 깃든 특수한 광물이었다. 연금술에 능통한 마법사만이 만들 수 있었기에 몹시 희소했고 가격도 굉장히 비쌌다.

하지만 아인에게 마나스톤이란 그리 희귀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발에 밟힐 정도로 차고 넘치는 상태랄까.

그 이유는 아인이 바로 그 ‘연금술에 능한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저 마나스톤도 그가 숨 쉬듯 쉽게 만들어 낸 결과물 중 하나겠지.

“무슨 마법을 걸어두셨기에…… 이리도 어지러운 거죠? 저는 별로 한 짓도 없는데.”

‘별로 한 짓도 없다’는 부분에서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감히 황태자의 입술을 만지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누가 본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아인도 방금 깬 것 같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모를 거야. 그러니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는 게 좋다고.’

당당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아인의 눈동자에 흥미로움이 가득 담겼다.

“누군가 허락 없이 내 몸을 만지면 마법이 발동되도록 설계해 놓았지.”

“아…… 곤히 주무시고 계시기에 어깨를 흔들었을 뿐인데…… 살벌하네요, 하하.”

“어깨를 흔들었다……?”

“네, 하하. 그렇다니까요? 어깨만 아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그런데요, 황태자님을 만지면 뭐 어떻게 되는데요?”

“안 듣는 게 좋을 거다.”

내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빗어 내리며 그가 웃음을 흘렸다. 안 듣는 게 좋을 거라니. 얼마나 무시무시하기에 저러는 거야? 죽기라도 하나?

‘그럼 나 혹시…… 입술 한 번 건드린 죄로 황천길 갈 뻔한 거……?’

화들짝 놀라 그의 몸에서 손을 뗐다.

될 수 있다면 상체도 떨어트려 놓고 싶은데……. 하지만 이 남자. 내 머리를 빗는 데 재미가 들린 것인지 날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러다가 저 비명횡사하는 거 아녜요? 밀착한 상태잖아요.”

안 그런 척하려고 했으나 말끝이 살짝 떨려서 나왔다. 그러자 머리 위로 쿡쿡- 하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허락한 사람은 괜찮아.”

“허락한 지 안 한 지 그 반지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널 만지고 있으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 만지는 게 허락의 의미란 말이지? 그래서 계속 반지 낀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거구나. 왜 자꾸 쓰다듬나 했더니.

그 말이 사실인지 마법에 의해 충격을 받았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거참, 살짝 만졌는데 이 정도라니. 무시무시한 물건일세.

“그 반지 때문에 방금 저 죽을 뻔했네요.”

“그러게 내 입술은 왜 만진 것이냐.”

아……. 입술 만진 거 알고 있었구나. 괜히 변명했네, 젠장. 다 틀려먹었어.

“…….”

조잘조잘 잘 떠들던 입을 닫고 가만히 있자 아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만졌냐니까……?”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술이 고혹적으로 빛났다.

‘예뻐서 만졌습니다. 립밤이면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려고 했고요.’

사실대로 말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냥 조용히 있는 쪽을 택했다.

“응?”

“……잊어버렸어요. 하아, 머리가 너무 아프네요.”

슬쩍 말을 돌리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저 이제 내려 주십쇼.”

“아직 머리가 아프다며.”

“이제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잊어버렸던 기억도 돌아왔겠군?”

그의 물음에 나는 내 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냥 좀 넘어 가주지.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가 쿡쿡거리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진짜 일어나도 되겠어요.”

아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그의 품에 계속 안겨있는 것도 머쓱해졌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의외로 그는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음음.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냉큼 자세를 고친 나는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더 이상 곤란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아인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내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른 임무를 맡기려고. 겸할 수 있겠느냐.”

나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임무든 닥치는 대로 맡아야, 그가 나를 더 신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찾아야 하는 물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이거.”

그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검푸른 색의 목걸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거……. 어디서 봤는데요.”

밤바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검은빛을 띠고 있는 보석. 예사롭지 않은 빛깔이기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목걸이를 누가 착용하고 있었더라? 연회장에서 본 건 확실한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봐서 그런지 조금 헷갈렸다.

“하버마스 대공의 목걸이다. 그가 항상 목에 걸고 있지.”

“아! 맞아요. 착용하고 있는 것 봤어요.”

어디서 봤는가 했더니. 루 대공의 목걸이였구나. 나는 내 눈썰미에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곧,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저. 혹시 이번 임무가…… 대공의 목걸이를 가져오는 겁니까?”

“맞아.”

그의 차분한 금안이 나를 향했다. 마치 아주 쉽지? 라고 묻는 것 같아 주먹이 울었다.

“혹시 죽여서 가져와야 하는 겁니까?”

“아니.”

“…….”

산 사람의, 그것도 항상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를 가져와라?

‘댁은 할 수 있어요?’

소리 없는 물음이 내 안에서 메아리쳤다. 매번 난이도가 높아지는 악독 상사의 임무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 * *

임무가 어렵다고 징징거리자 아인은 마지못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에게 받은 것은 고작 작은 유리병 하나였다. 아인은 되도록 쓰지 말라며 뭐가 들었는지도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설마 독살 밀명인가?’

새끼손가락 크기 정도의 유리병. 그 안에 든 물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인이 준 거라 그런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근데 분명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독은 아닐 테고. 뭐지?’

어쩌면 독살보다도 더 어려운 미션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목걸이도 아니고, 하버마스 대공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를 어떻게 훔쳐?

‘황태자 네가 직접 훔쳐보시던가!’

씩씩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떻게 훔치라고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고! 뭐…… 그런 거 생각하라고 비싼 돈 주고 그림자 기사를 고용하는 거긴 하겠지만.

‘이 물약을 먹으면 목걸이를 벗어 던지고 싶게 만드나.’

물론 그런 약이 있을 리는 없겠지. 나는 작은 유리병을 눈앞에 흔들어보았다. 끈적거리는 액체가 벽을 타고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에잇, 몰라. 살짝 맛만 보자.’

혹시 몰라 새끼손가락에 살짝 묻혀 맛을 보았다.

‘단데? 향기도 좋고.’

물약에선 달콤한 과일 향과 함께 단맛이 느껴졌다. 그 외에 이상한 느낌도 전혀 없고. 아인은 나한테 이런 걸 왜 준 거지? 왠지 더 꺼림칙해져서 약을 쓰는 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아인도 되도록 쓰지 말라고 했고.

어찌 됐든 목걸이만 챙기면 되는 거 아닌가. 쉽지는 않겠지만, 모르는 물약을 쓰는 것보단 낫겠지, 뭐.

‘그나저나 루 대공의 목걸이는 왜 가져 오라고 하시는 걸까.’

이유라도 좀 알려주지. 가져오라고 말만 하면 어쩌란 것인지. 아무래도 아인에게 말하다 죽은 귀신이 붙은 게 분명하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을 생각하던 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틴입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레틴이 무슨 일이지? 나는 다급히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품 안으로 숨겼다.

“……들어와.”

“황자님께서 두고 가신 게 있어서, 제가 대신 가지러 왔습니다.”

내 시큰둥한 대답에, 그보다 더 시큰둥한 표정의 레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를 본 순간,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무 잘 생겼어…….’

뭐야?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미쳤나 봐. 레틴놈을 보고 잘 생겼다고 하다니.

하지만 그 순간 또다시 현기증이 일었다.

‘저 물빛을 품은 듯한 머리카락을 봐. 날렵한 턱선, 떡 벌어진 어깨 하며…… 고놈 참 잘 생겼다…….’

레틴을 보자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졌다. 나는 구름 위를 걷고 있는데, 구름 위에 태양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태양과 레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태양처럼 영롱하고, 아름답고, 또 눈이 부시고…….

‘뭔 개소리야? 나 미친 거 아니야?’

레틴에게 멍하니 빠져들다가, 갑자기 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인지, 레틴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이라곤 1도 담기지 않은 말투였다.

“아니.”

정색한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근데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달링?”

“달…… 뭐요?”

퍽-! 나는 달링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주먹으로 내 볼을 쳐버렸다.

‘헉. 또다시 정신이 몽롱해질 뻔했다.’

레틴은 완전히 미친 사람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하십니까?”

“……저, 저리 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하지만 내가 수상하다 여겼는지 레틴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 뭔 짓을 꾸미는 중입니까.”

내게로 바싹 다가온 그가,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품에서 떨어진 유리병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뺏으려 들었다.

“이게 뭡니까? 보여주십시오.”

“아, 싫어! 저리 가라니까?”

“그럴수록 더 의심스럽습니다!”

그의 손이 손목에 닿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한 번도 레틴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 그를 꽉 안아 마음껏 냄새를 맡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억!”

“가만히 있어!”

두 팔을 그의 목에 휘감았다. 그러곤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허리를 두 다리로 감아버렸다.

“지금 뭐 하십니까!”

얼굴이 벌게진 레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나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봐!”

“야이, 거머리 같은 여자야! 완력은 또 왜 이리 센 거야?”

"가만히, 있어. 으르르."

"뭐야, 당신 개야? 정신 좀 차려봐! 이것도 좀 놓고!"

레틴이 나를 보고 거머리 같다고 말하는데도 그가 마냥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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