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네 가슴팍 본 거 아니라고 (16/120)

16. 네 가슴팍 본 거 아니라고

“생각을 물어봤냐고요, 하늘이 더 좋으냐고.”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삐딱선을 탔다. 황녀님한테 짠. 하고 나비를 주려고 했는데. 웬 시커먼 남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놓쳐버렸잖아.

“거미줄이 득실거리는 바깥세상보단, 황녀님 곁이 더 나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군요.”

남은 화가 나 죽겠는데, 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 말이 우습게 들리기라도 하는지.

“나비에게 물어보는 건 깜빡했군요. 죄송합니다.”

“사과는 저 말고 황녀님한테 하십쇼.”

루에게서 돌아선 나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카렌을 찾았다.

‘황녀님이 많이 속상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설마 우시지는 않겠지……?’

다 잡은 걸 놓쳤으니. 면목이 서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기사들이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끼어들어선 잡지도 못 하고.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황녀에게 다가가던 그때였다.

“……와아.”

응? 흑흑이 아니고 와아? 카렌은 반짝반짝한 눈으로 방금 전 나비를 놓치게 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통통한 볼을 붉히며 입을 모으는 게, 꼭 사랑에 빠진 얼굴 같았다.

“왕자님이다-. 동화 속 왕자님!”

‘응?’

카렌에겐 이미 나비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슬퍼하는 대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볼을 붉혔다.

“안녕하세요, 황녀님. 루 하버마스라고 합니다.”

그가 가슴께에 자신의 손을 올린 채 살짝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카렌의 말처럼, 동화 속 왕자님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나저나 하버마스? 그럼 이 자가 그 하버마스 대공인가?’

나는 자신을 루 하버마스라 소개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채 황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분명 시녀들이…… 대공에게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고 하던데.’

제국과 맞먹을 정도의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만큼, 그는 여러 잡다한 소문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었던 소문이, 바로 바람둥이라는 이야기였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긴 하네. 황녀님도 저렇게 좋아하시고.’

루에게 빠져 있는 카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걱정이 밀려들었다.

‘바람둥이는 안 되는데.’

나이 차도 문제였지만, 그는 바람둥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이 있었다. 제아무리 제국과 맞먹을 정도의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황녀가 백배는 아까웠다.

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루를 쳐다본 뒤, 황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녀님, 저랑 다른 데 가서 놀아요.”

하지만 지금 황녀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언니랑은 다음에 놀아줄게. 카렌은 지금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바빠.”

“…….”

너무해요, 황녀님. 아무리 아직은 서로 안 친한 사이라지만. 카렌이 너무 딱 잘라 거절하니 민망해졌다. 내밀었던 손을 슬그머니 감추자 옆에 있던 루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프흡.”

나는 그런 그를 있는 힘껏 흘겨보았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십쇼.’

루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내며, 입 모양으로 말을 전했다. 그러자 루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지는 게 보였다.

“뭐가 그리 재밌으신지……?”

“아, 이런. 실례했군요. 루 하버마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비님.”

그가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 색과 동일한 목걸이가 셔츠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쇄골에 닿자, 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네 가슴팍 본 거 아니라고.’

난 예쁜 목걸이에 눈이 갔을 뿐이야.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는 사이, 손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렇게 보시면 제 마음이 설렙니다.”

손등에서 입술을 뗀 그는, 나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그윽한 시선이 내 시선과 깊게 얽혀들었다. 선홍빛을 띤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고, 매혹적인 붉은 입술은 앵두보다도 탐스러워 보였다.

과연. 세기의 바람둥이다운 외양이었다.

“불륜을 저지르고 싶어질 정도로.”

과연…… 세기의 바람둥이다운 말투였다.

‘뭐? 불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쳐다보자, 그가 ‘귀엽기까지 하네.’라고 속삭이며 허리를 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바람둥이란 소문이 진짜였구먼.’

미간을 찌푸린 채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그러곤 그에겐 완전히 관심을 끊어버린 채 카렌에게 다가갔다.

“황녀님, 연회장에 가시는 길이셨죠?”

“응!”

“그럼 그냥 저랑 같이 가셔요, 말동무 해드릴게요.”

“으으응. 나는 이 오빠랑 함께 갈래.”

어쩐담. 카렌은 이미 루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이대로 두고 가도 되나?’

작은 손으로 루의 옷자락을 잡은 채 꾹꾹 잡아당기는 모습이 귀여워, 마음이 흔들리던 때였다.

“그럼 다 같이 가는 건 어떻습니까?”

루가 상냥한 미소를 띤 채 제안했다.

대낮부터 유부녀를 희롱하는 남자와 함께 다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녀님만 두고 가는 것도 좀 그렇고…….

“그러죠.”

어쩔 수 없이 루도 함께 셋이서 연회장에 가게 되었다. 카렌이 가운데 있고, 대공과 내가 그녀의 곁을 걸었다.

“이렇게 걸으니 꼭 가족 같지 않나요?”

뭐? 지금 당신과 내가 부부고 황녀가 그사이에 낀 딸이다. 이런 뜻으로 말하는 건가?

미간을 찌푸린 채 루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온 얼굴로 그에게 ‘쓰레기’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오빠랑, 여동생 둘이요.”

내 따가운 시선에 그가 해명하듯 입을 열었다.

“황자비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그런 표정이신지.”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뭐야. 지금 나만 불순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야?’

그는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손바닥 위에 쥐를 올려놓은 고양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대공 같은 오빠랑, 새언니 같은 언니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

깜찍한 카렌의 발언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방금 날 언니라 불러준 거야? 두 번째 만남이라 낯을 가릴 줄 알았는데. 어쩐지 감동이었다.

“그럼 황자비님께서 황녀님 언니 하고, 저는 황녀님의 오라버니 할까요?”

“응!”

루의 물음에 카렌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아! 근데 오라버니랑은 결혼 못 하잖아.”

“그렇죠?”

“그럼 카렌은 대공 오라버니는 필요 없어. 대공과 결혼 못 하잖아.”

이제 어쩔 거야, 당신? 바람둥이 주제에 우리 황녀님의 마음을 흔들었겠다? 주먹을 쥔 채 살벌하게 루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한 번 보더니, 살짝 윙크를 보냈다.

‘맡겨줘요.’

맡기다니? 뭘 맡겨?

대공의 입 모양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카렌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굽혀 카렌과 눈높이를 맞췄다.

“죄송하지만 저는 황녀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

“왜?”

그래, 어서 황녀님께 저보다 훨씬 훨씬 더 좋은 남자가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하고 정리하렴.

하지만 루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이미 큐피트가 제 심장에 화살을 꽂고 갔거든요.”

그가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보는 건데……?’

곧이어 나는 카렌의 뾰족한 시선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 * *

연회장에 도착하고 보니 너무 루 대공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무에게나 그러는 남자였으니까.

“아름다우십니다, 레이디.”

루는 연회장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굴었다. 제 눈에 든 여인이 있으면 누구든 인사를 건넸다.

밤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에 향긋한 포도 향을 품고 있을 것 같은 선홍빛 눈동자. 색기 어린 붉은 입술.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끔뻑 넘어가는 중이었다.

“…….”

“황녀님.”

내 옆에서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서 있는 카렌에게 말을 걸었다. 루가 바람둥이인 걸 알고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내가 풀어드려야지.

“……카렌에게 말 걸지 마. 언니도 내 라이벌이니까.”

카렌이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싫은 건 아닌지, 다른 곳으로 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라이벌이라뇨, 저는 황자님밖에 없는걸요?”

내 말에 카렌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빠져들 것만 같은 푸른 눈동자가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정말?”

“그럼요. 다른 남자는 평생 쳐다보지도 않을 거예요.”

“대공처럼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당연하죠."

결연한 눈빛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귀여운 시누이에게 내 일편단심을 설명해줘야 할듯싶었다.

“더더군다나 대공은 솔직히 제 스타일도 아닌걸요.”

“왜? 대공은 잘생겼잖아!”

이런, 이런. 생긴 게 다가 아닌데. 아직 어리시니 뭘 모르시는구나. 아무래도 황녀님께 확실히 가르쳐드려야 할 것 같았다. 비록 내가 가짜 결혼 세 번에 연애 경험도 전혀 없긴 하지만.

“황녀님. 대공이 아무 여자에게나 예쁘다 그러고 여우처럼 미소 짓는 게 보이죠?”

“여우처럼 미소 짓는 게 뭐야?”

“저렇게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웃는 거요.”

나는 연신 사람 좋은 미소를 날리고 있는 루를 가리키며 소곤소곤 설명했다.

“제레미 오라버니도 저렇게 웃는걸?”

“……우리 황자님은 좀 더 순수하시죠. 그건 여우가 아니라 천사처럼 웃는 거예요.”

“다른 거야?”

“네. 대공 같이 웃는 사람은 바람둥이일 확률이 높으니, 조심해야 해요.”

카렌이 미래에 이상한 놈을 배우자랍시고 데려오면 안 되는데. 노파심에 그녀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연회장 한 곳을 가리켰다.

“황녀님. 저 분은 어때요?”

내가 가리킨 사람은 10살 남짓의 어린 귀족이었다. 주변 사람과 곧잘 어울리면서도 표정이 밝은 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저런 아이라면 나중에 우리 황녀님의 신랑감으로 훌륭하게 자라지 않을까?

“아직 너무 어려.”

카렌이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팔짱을 낀 채 콧대를 들어 올린 모습이 몹시도 귀여웠다.

“아흑, 귀여워!”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카렌을 꼬옥 안아버렸다. 그러자 카렌이 내 품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앗, 죄송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들어 올리는데, 카렌이 다급히 내 팔을 붙잡았다.

“더 안고 있어도 돼. 허락할게.”

뾰로통하게 내민 카렌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린 황녀님은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지, 내 팔을 꼬옥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최근 들어 누가 이렇게 안아준 건 처음이야. 다 큰 황녀가 어리광부리면 안 된다고 해서 7살 이후론 아무도 날 안 안아주거든.”

카렌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카렌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나는 두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볼을 부비부비 해주었다.

“으아앗. 재밌어!”

“헤헤. 더 높이 올려드려요?”

“나 안 무거워?”

무거울 리가 있나. 기사인 내게는 인형 하나 든 것처럼 그녀가 가볍게 느껴졌다.

“무겁긴요.”

내친김에 카렌을 허공에서 붕붕 띄워주었다. 카렌이 워낙 즐거워하기도 하고. 여기는 구석 자리라 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꺄하핫!”

울적한 모습을 지운 채, 카렌이 어린아이다운 웃음을 터뜨렸다.

‘황녀님도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오래오래 이렇게 웃으실 수 있도록.’

카렌과 즐겁게 노는 것도 잠시. 어느새 우리 뒤로 엘리샤 황후가 다가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황후의 차가운 시선이 카렌과 내게로 닿았다.

“채신머리없이. 지금 연회장 안이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황자비?”

황후는 체면과 황실의 품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나와 카렌의 행동은 거의 미친 수준으로 부적절해 보였을 것이다.

나는 즉각 사과하며 카렌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송구합니다.”

“어, 어머니.”

그러자 카렌이 조금 겁을 먹은 표정으로 엘리샤에게 다가갔다.

“이 언니는 그냥 나랑…….”

“황녀.”

권위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가 황후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러자 놀란 카렌이 움찔하며 어깨를 떨었다.

“황자비를 방금 뭐라 칭한 겝니까?”

“죄송해요…….”

“호칭도 문제지만…… 사람들도 다 보는 앞에서, 어찌 이리 경망스럽게 웃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엘리샤의 말에 카렌의 얼굴이 몽글몽글해졌다. 커다란 두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만 같았다.

‘이런, 이러다 우리 황녀님 울리겠네. 내가 멋대로 황녀님을 들어 올렸던 건데.’

황녀님이 야단을 맞고 있는 걸 보니,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단 생각에,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황녀님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다 제 잘못이니, 황녀님이 아닌 저를 꾸중해주세요. 황후 폐하.”

회귀 전 베리타에게 배웠던 예법을 떠올리며, 살짝 허리를 숙였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주의해주도록 해요, 황자비.”

내 간곡한 사과에 엘리샤의 화가 한 층 누그러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가시를 심어놓은 듯 뾰족했다.

“……황자와 같이 백치로 보여서 되겠습니까.”

그녀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황녀를 제 곁으로 오도록 한 후 나를 스쳐지나갔다.

“황자와 똑같은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황자비.”

옆을 지나가면서 그녀가 내게 경고했다.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듯 따라붙은 시선은,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거두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