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기의 바람둥이
힐레인이 연회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제레미와 둘만 남게 되자 레틴은 그간 속으로 삭이기만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황자님, 그 첩자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무슨 짓이라니?”
“그 첩자. 몸을 베베 꼬고 헤실거리는 게…… 황자님한테 완전히 반한 여자같이 굴던데요.”
“글쎄. 그녀는 처음부터 그랬지 않나?”
“지금까진 황자님을 유혹하기 위해 연기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까 보니 정말로 황자님께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너무 자연스럽고…….”
게다가 오늘 아침 들었던 소문도 레틴의 추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혹시 그 첩자와…….”
레틴이 말꼬리를 흐렸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꺼내는 자체가 꺼려졌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었기에 마지못해 입을 뗐다.
“혹시 뭐?”
“……잤습니까?”
“…….”
“흠흠, 그…… 왜 두 분이 같은 침대에서 주무시지 않습니까. 황자님께서 첩자를 안으실 분은 아니지만,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것도 그렇고…….”
레틴이 ‘첩자를 안으실 분은 아니지만’에서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제레미의 성정을 잘 알고 있기에 레틴은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일단은 건강한 남자고! 황자님이 그 첩자에 관해서는 자꾸만 모호한 태도를 보이니까…….’
게다가 그 소문. 아침부터 불편한 심기를 건드렸던 그 소문은, 레틴의 의심을 증폭시킨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무슨 소문?”
“어젯밤 황자님이 웃통을 훌렁 벗고 그 첩자를 끌어안고 계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레틴의 말에 제레미가 설핏 웃음을 보였다. 어젯밤 완전히 패닉에 빠졌던 힐레인의 표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반면 레틴은 제레미의 웃음을 오해하고선, 경악하고 말았다.
“방금 웃으셨죠? 소문이 진짭니까?”
“그런 거 아냐.”
“아까 그 첩자가 남자에게 좋은 음식이 어쩌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레틴은 영 못 믿겠다는 투로, 좀 더 제레미를 추궁했다. 계속된 레틴의 질문에 제레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어젯밤 일을 설명했다.
“네?! 그 첩자를 숨겨 주셨다고요?”
“응.”
“아니, 대체 왜요?”
“나도 같이 의심받을까 봐……?”
일단은 황자비이니 형식적으로는 자신의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힐레인이 발각되면 자신도 덩달아 황자비에게 수상한 지시를 내렸다고 의심받을 수 있다. ……그건 사실 뒤늦게 붙인 변명이었다.
그날 밤, 그가 힐레인을 구했던 것은 충동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돌풍처럼 휩쓸고 간 충동.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힐레인을 품에 끌어안고, 기사단장으로부터 숨겨 주고 있었다.
“정말요?”
“……아니.”
제레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에 레틴은 기가 막힌단 표정이 되었다.
“저번부터 대체 왜 그러십니까. 자꾸 첩자를 도와주시지를 않나. 그냥 그대로 기사단장에게 들키도록 놔두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황태자가 무마시켰을 거야.”
“그건……! 그렇지만.”
황태자야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이것은 황태자를 작게나마 흔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그대로 날려버리다니.
“여튼, 앞으로는 절대 그 첩자를 돕지 마세요.”
레틴은 대답 없는 제레미를 보며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절대 그 첩자에게 반하시면 안 됩니다?!”
“……안 그래.”
제레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요즘은 감정을 조절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았었는데. 이상하게 힐레인과 엮인 일에는 뚜렷한 확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제 감정인데. 제 마음인데도. 흐릿한 안개가 쳐진 것처럼 불투명했다.
“안 그럴 거야…….”
그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마음에 세뇌를 걸듯. 당사자는 별 효과를 못 느꼈지만, 레틴은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하긴 그렇죠? 별 매력도 없던데.”
레틴이 크게 안도하며, 턱을 매만졌다.
힐레인을 보고 사람들이 아름답다 말하는 건, 레틴도 들어봐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첩자라는 선입견 탓일까?
‘눈을 씻고 보아도, 도무지 예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던데.’
그래서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제레미가 말로써 그의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매력 있어.”
제레미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살짝 접어 웃는 한 떨기 물망초 같은 표정에, 레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황자님, 방금 뭐라고…… 잠깐만요. 지금 어디 가시는…… 잠깐. 잠깐만요!”
* * *
“오늘따라 더 공들여 꾸미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황금빛이 도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작은 보석들을 별빛처럼 뿌려놓은 듯한 드레스는 한눈에 봐도 고가로 보였다.
심지어 머리 장식이나 쥬얼리는 결혼식 때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데…….
“오늘은 하버마스 대공께서 참석하신다고 했거든요.”
“하버마스 대공……?”
시녀 한 명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제레미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시녀들의 태도는 천지 차이였다. 그래서 나도 필요할 때가 아니고는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잘 없긴 했지만……. 오늘따라 궁금하단 말이지.
그도 그럴 게, 시녀의 입에서 나온 인물은 무심한 나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뭐라더라. 북부의 제왕이라는 그 사람이지?”
하버마스 대공가는 북부를 다스리는 가문이었다. 제국의 휘하에 있지만. 북부의 광활한 영토에서만큼은 독자적인 권력을 지닌 유일무이한 가문.
그 탓에 대공가는 줄곧 황제의 견제를 받아왔었다.
“보통은 세기의 바람둥이로 더 많이 불리죠.”
바람둥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홀리고 다녔으면, 세기의 바람둥이라 불릴까.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대공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시녀들이 깔깔 웃으며, ‘그래도 잘 생겼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근데 그 사람이 오는 거랑 내가 꾸미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그거야 저흰 모르죠. 저희는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시녀가 귀찮은 기색이 다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꾸밈을 당하는 입장에선 궁금하지 않겠어? 그냥 꾸미는 것도 아니고, 목이 부러질 정도로 과하게 장식을 올리고 있는데. 내 머리가 케이크야? 케이크냐고.
뾰로통하게 머리 장식을 노려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에게 제국의 위엄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죠.”
“……?”
“연회의 주인공이 귄위적인 면모를 보여야 대공과 제국의 위계가 확연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귓가에 파고드는, 우아하면서도 까칠한 목소리. 나는 방금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베리타 생스터 백작 부인!’
오, 이럴 수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회귀 전 나의 예법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그냥 선생님이 아닌, 황자비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호랑이 선생님!
‘내 행복은 여기서 끝인가.’
베리타는 뼛속까지 귀족적인 여자였다. 걸음걸이에서 1mm만 벗어나도 거침없이 지적하고, 찻잔을 놓을 때 1 데시벨이라도 소리가 났다간 귀에 피가 날 정도로 잔소리를 하는.
한 마디로 굉장히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황자비님을 가르치게 된 생스터 백작부인이라고 합니다. 베리타라 불러주십시오.”
그녀가 우아한 자세로 내게 인사했다. 나는 눈으로 열심히 그녀의 인사법을 스캔했다. 똑같이 따라서 인사해야, 잔소리를 덜 들을 테니.
“만나 뵙게 되어 반갑군요. 베리타 부인.”
짐짓 근엄한 척을 가장하며 다리를 살짝 굽혔다 폈다.
하지만 내 인사가 흡족하지 않았던 것인지 베리타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가는 게 보였다.
“수업을 지금 당장 못 시작하는 게 좀 아쉽군요. 폐하께서 연회가 끝난 뒤부터 시작하라 하셨거든요.”
그녀가 정말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손가락으로 살짝 올렸다.
“황자비님.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을 몇 가지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하지 마. 당신이 뭐라고 할지 다 알아. 지금까지 예법 수업을 받은 적 없냐고 묻겠지. 뭐, 없다고 하면 경악할 테고.
“지금까지 예법 수업을 받으신 적 없으십니까? 앞으로의 수업에 참고를 해야 하니, 부끄러워 마시고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다.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 2년이나 예법 수업을 받았었잖아?’
그것도 당신한테서. 맞지 않아도 될 매까지 맞아가며.
베리타는 수업 첫날부터 안 되겠다며 매를 들었었다. 안 보이는 곳만 구석구석 찾아 때리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임무만 아니었다면 결투신청을 했을 것이다. 그 작대기를 들고 연무장으로 나오라고.
“제가 질문을 드렸는데. 못 들으신 겁니까, 아니면 못 들은 척하시는 겁니까?”
‘거 참, 까칠하시긴. 그래, 받았다. 너한테 받았다고!’
“……2년 정도 받은 적 있습니다.”
내 말에 베리타 부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없다고 말한 것보다 더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베리타님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신 분께 가르침을 받았었지요.”
“저와 닮은 분께요……? 흠…… 저와 비슷하게 생긴 게 유감스러울 정도로, 그분의 능력이 의심스럽군요.”
제 욕을 차지게 마친 그녀를 보며 나는 샐쭉이 웃어 보였다. 이거 뭔가 웃긴데? 본인인 줄도 모르고, 본인 욕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저는 다를 겁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황자비님을 우아한 여성으로 만들어드리죠.”
“…….”
우아한 여성이라. 베리타가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내 인생에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 그럼 나 또 맞아야 되는 건가.’
어쩐지 울적해졌다. 임무 때문에 안 그래도 고단한 삶인데. 베리타라니, 베리타라니! 미리 물렁물렁한 나뭇가지를 주워 놔야겠다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다.
* * *
베리타가 떠나고 나는 연회장을 향했다. 그런데 정원과 연결된 복도를 걷던 중,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얼른 잡아 줘!”
“황녀님, 기다리세요!”
정원에서 기사들과 시녀들, 그리고 카렌 황녀가 한 데 얽혀 있었다. 카렌은 뭔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에 팔을 뻗어 펄쩍 펄쩍 뛰고 있었다.
‘뭐지? 뭣 때문에 그러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나비?’
카렌 황녀가 기르는 나비가 탈출한 모양이었다. 나비 한 마리를 잡으려, 이 많은 인원이 애를 먹고 있다니.
게다가 카렌 황녀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내가 잡아드려야겠다.’
드레스를 걷어붙이자 뒤에서 시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시녀들이 말리기 전에 내 뜀박질이 먼저였다.
‘저기 있다.’
나비는 사람들을 피해 분수대 근처에서 위태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날개가 물에 닿을 듯 말 듯.
‘스읍. 가만히 내게 붙잡히렴.’
나는 아슬아슬한 비행 중인 나비에게로 도약했다.
‘잡았다.’
두 손 안으로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실수로 눌러버리지 않도록 애쓰며, 분수대 끄트머리에 착지하려던 순간이었다.
‘아, 이런. 몹쓸 하이힐.’
오늘 내가 신은 하이힐의 굽은 크리스탈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발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이 강조된.
그 탓에 분수대의 가장자리에 착지한 굽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넘어진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나는 영락없이 분수대에 빠질 위기에 처해버렸다.
‘아아앗. 나비가 물에 젖으면 안 되는데.’
그 순간 값비싼 드레스보다도 황녀님의 나비가 더 걱정되었다. 물에 둥둥 뜬 나비만큼은 보여주지 말자는 생각에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조심.”
그런데 그때 누군가 내 허리를 와락 잡아챘다.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든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달고 있었다.
물에 빠지지 않게 된 건 다행인데…… 이 남자. 누구지? 내가 모르는 사람인데.
“……?”
나를 안아 든 이 낯선 남자는, 몹시도 잘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 가장 잘 생기고 예쁜 남자는 우리 황자님이지만. 이 사람도 그 못지않은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이건 놔 주시고.”
멍하니 넋을 빼고 있던 사이. 그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러곤 손을 살짝 벌리게 해, 힘들여 잡은 나비를 풀어주었다.
“아, 안 돼……! 이봐요!”
“나비에겐 금빛 새장보다 파란 하늘을 주는 게 더 좋습니다.”
항의하듯 그를 쳐다보자,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눈웃음이 번졌다. 바람이 살랑이자 멋스럽게 다듬은 검푸른 머리카락이 고운 얼굴선을 따라 한 올 흘러내렸다.
“그나저나 상당한 미인이시군요.”
“…….”
미인?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몸을 바르작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그가 나를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에 빠지지 않게 도와드렸는데, 어째 화가 난 것처럼 보이네요.”
“나비를 놓쳤으니까요. 누구 덕분에.”
“방금 이유를 설명했는데.”
“……나비한테 생각을 물어봤어요?”
내 물음에 그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선홍빛 눈동자에 진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