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끄러운 말
“어라?”
내가 방금 뭐라고 말했었지? 씻고 나서 같이 아침을 먹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혹시.
“제가…… 같이 씻자고 말했나요?”
눈을 껌뻑이며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응…….”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흔들리자, 빨갛게 물든 귀가 드러났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제 말은 같이 씻고……. 아니! 씻고 나서 같이 아침 먹자는 말이었어요.”
허둥지둥 말하다 또 말실수를 해버렸다. 입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정정했다. 당혹감에 젖어 있던 제레미의 표정이, 이제야 좀 원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네!”
그의 물음에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순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소 멍청하게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제레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제레미는 같이 씻어도 되는데.”
“……!”
그가 야살스럽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초승달 같은 눈을 휘며 여우처럼 눈웃음짓고 있었다.
“가, 같이요?!”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우리는 입만 겨우 맞춘 사이고, 진짜 부부도 아닌데.
같이 씻자고 하시면…….
문득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제레미의 하얀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왜 저렇게 뽀얗고 섹시…… 아니지, 내가 뭐라는 거야? 정신 차려!’
속으로 내 안의 나를 마구 두들겨 패는 사이. 제레미가 자신의 장난을 이실직고했다.
“으음. 농담이야.”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앙큼한 연보랏빛 눈동자 앞에서, 나는 바보처럼 어버버거렸다.
“화! 황자님! 그런 소리, 아무한테나 하시면 안 됩니다……. 아이참. 허허. 하, 참.”
“응! 신부한테만 할게! 자, 얼른얼른 씻고 와. 제레미는 다 씻었단 말이야.”
괜히 부끄러워했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손으로 부채질하며 열을 가라앉혔다. 나한테만 그런 장난을 치겠단 말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싫은 건 아니니까 뭐…….
“자, 일어나자. 신부야.”
내가 부끄러워하거나 말거나 제레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머뭇머뭇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치며 일어섰다.
* * *
목욕을 마친 후, 나는 내 전용 욕실에 걸린 액자 뒤로 종이를 숨겼다. 미래의 사건을 요약해 놓은 종이니 잘 숨겨야 하는데.
‘으음. 액자 뒤는 좀 불안한데. 종이가 떨어질 수도 있고.’
만약 이 종이를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큰일이었다. 황녀님의 죽음과 날짜가 적힌 종이니, 어쩌면 황녀 시해범으로 몰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꽤 많은 걸 끄적거려놨기에 버리기도 아까웠다.
‘좀 더 비밀스러운 곳이 없을까?’
제레미와 같은 방을 쓰니 내 공간이라고는 전용 욕실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액자 뒤나 화병 아래 놓기엔 너무 허술하고.
찬찬히 욕실을 둘러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장소를 발견했다.
“뭐야, 여기 책장이 있었네.”
지금 보니 욕실 구석에 조그만 책장이 놓여 있었다. 건식 욕실이라 그런가? 이런 것도 다 있네.
제일 위 칸 세 번째에 놓인 책을 꺼냈다. 그러곤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쳐 종이를 숨겼다.
‘여기라면 아무도 못 발견하겠지?’
* * *
나와 제레미는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앉기가 무섭게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들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음…… 제철이라 그런가? 세렌베리가 너무 많은데.’
세렌베리는 겨울철에 나는 과일의 일종이었는데, 향이 좋아 음식 재료로 자주 사용되는 과일이었다.
‘황자님은 세렌베리 알레르기가 있는데.’
하지만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제레미에게 세렌베리 음식을 권한 적이 있었지.’
제레미는 거절하지 않고 내가 건넨 세렌베리를 삼켰고.
그 누구의 앞에서도 괴로운 티를 내지 않았지만,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그도 그럴 게 음식 알레르기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 아니던가.
원래라면 알레르기가 있는 것을 알려 그 음식을 제외하는 게 맞지만……. 제레미는 항시 음독의 위험에 처해 있는 위치였기에 알리기를 꺼렸다.
내가 그의 알레르기에 대해 안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제레미의 곁에 철썩 붙어 2년이 넘도록 감시를 해왔는데 모를 수가 있나.
‘이번엔 절대 못 먹게 해야지. 내가 다 먹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대여섯 접시 정도 되는 음식들을 대강 눈으로 훑었다. 그러곤 세렌베리가 들지 않은 음식을 제레미 쪽으로 밀었다.
“황자님, 이것 한 번 드셔 보세요.”
이번엔 세렌베리가 든 음식은 내 쪽으로 당겼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자, 이것도. 이것도요.”
쉴 새 없이 음식을 제레미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하나씩 맛을 보던 그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시선이 내가 권했던 음식들을 훑었다.
“…….”
가만있던 그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내가 살짝 뒤로 빼놓은 세렌베리가 든 샐러드 쪽으로.
‘안 되는데, 저건 세렌베리가 들었는데.’
저 좋으라고 일부러 세렌베리가 없는 음식만 권해주었는데. 이게 무슨 청개구리 같은 심보란 말인가.
“자, 잠깐만요!”
일단 막고 보자는 생각으로 그를 저지했다.
“왜, 신부야?”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평상시와 달리 짓궂게 느껴졌다.
“그거 먹고 싶은데. 제레미한테 줄래?”
뭔가 눈치채셨나.
자연스럽게 음식을 제외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만 너무 앞섰던 모양이었다.
‘이거 먹으면 안 되는데.’
샐러드 접시 끝을 손으로 꼭 붙든 채 고민했다. 왜 안 주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그렇다고 이걸 줄 수도 없고.
나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 테스트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의 알레르기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소리 없는 물음에 제레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후…… 얄미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나를 쳐다보는 모습은, 한 마리의 은빛 여우나 다름이 없었다.
얄미운데,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그가 얄미워 죽겠는데. 귀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맘껏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응?”
“이건…… 못 줘요!”
“왜?”
“그게 그러니까요…….”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생각하다, 문득 기지가 떠올랐다.
‘아…… 이거 말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 될 수도 있는데.’
순간적으로 떠오른 묘책은 결코 좋은 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최선일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안녕…… 내 이미지여.’
나는 얕게나마 쌓아온 내 이미지와 속으로 작별했다. 그러곤 절대 줄 수 없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세렌베리 샐러드를 내 쪽으로 바짝 당겼다.
“황자님 그게요.”
“응.”
“세렌베리가…….”
“응응.”
“정력에 안 좋대요.”
“…….”
순간 물을 뿌린 것 같은 정적이 찾아들었다.
제레미도, 시녀와 시종들도.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던 때. 시종장만이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또 한 사람. 반응이 격렬한 사람이 있긴 했다. 그건 바로 레틴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벌써 그런 표정이면 곤란해, 레틴 경. 아직 한 마디 더 남았거든…….’
나는 속으로 쓸쓸히 미소 지었다. 솔직히 한 마디고 뭐고,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단 말이지.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서 세렌베리는 일부러 못 드시게 한 거였어요. 저는 황자님이…… 남자에게 좋은 음식만 드셨으면 좋겠거든요……!”
빠르게 뒷말을 끝내고 입술을 꾹 물었다.
‘흑흑. 내 이미지…….’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시녀들이 뒤돌아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레틴은 눈을 세모로 뜨고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뭐.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우뚝 멈추어버린 제레미의 시선만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
“…….”
제레미와 나 사이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나는 뜨거워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귀를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저…….”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시키기 위해, 크레탄 구이에 포크를 가져갔다. 그러곤 생선의 뽀얀 살을 발라 기계적으로 팔을 뻗었다. 얼음처럼 굳은 그에게 얼음 땡!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크레탄…… 구이도 드, 드셔 보세요.”
“……아. 응.”
그제야 제레미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살며시 고개를 가까이 가져와, 예쁘게 입을 벌려 크레탄 구이를 받아먹었다.
“……맛있어.”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자 그가 살짝 눈을 좁힌 채 여우처럼 미소 지었다.
“아까 같이 씻자고 하더니……. 신부는 야해.”
“화, 황자님 그건……!”
그러자 그가 키득거리며,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이참. 황자님도…….”
어색한 분위기가 좀 풀린 것 같아, 그를 따라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진 시종장의 언질에, 나는 그대로 얼굴을 굳혀버렸다.
“황자비님께서 남자에게 좋은 음식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크레탄 구이는 남자에게 아주아주 좋은 음식이랍니다. 황자비님의 지식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아…….”
“…….”
어느새 나는 ‘남자 음식’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과하게 친절한 시종장이 입이 닳도록 나를 칭찬하는 바람에.
‘기왕 칭찬해주실 거면 다른 거로 칭찬해주시지…….’
시무룩해진 채 포크로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제레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신부야. 이거 먹어 볼래?”
그런데 그때 제레미가 스테이크를 작게 썰어, 내게 내밀었다.
‘혹시 내가 시무룩해져 있어서 신경 쓰고 계신 건가?’
그게 아니라 해도 기분은 좋았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살짝 흔들다, 냉큼 스테이크를 받아먹었다.
“맛있어요. 황자님이 먹여주셔서 그런가 봐요.”
“하…….”
옆에서 레틴이 같잖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게 느껴졌다.
‘뭐, 왜, 뭐.’
레틴이 저렇게 나오니 이상하게 오기가 돋는단 말이지. 어느새 창피함을 극복한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제레미에게 음식을 권했다.
“황자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응, 맛있다. 신부도 먹어 볼래?”
나는 가까이 다가온 음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벌렸다.
“아이, 잘 먹는다.”
어미 새가 주는 모이를 받아먹듯, 음식을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러자 제레미가 아이를 칭찬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컥.”
아니, 이렇게 은혜로운 손길을 갑자기 보내시면.
“이런, 사레들렸어? 여기 물 마셔.”
이번엔 그가 친히 물컵까지 내 입가에 가져다줬다. 나는 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꿀꺽꿀꺽 받아먹었다.
‘이거 뭐야? 너무 부끄럽잖아.’
연애 소설을 보면, 연인끼리는 음식을 입에 잘도 넣어주던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렇게 부끄러운데.
“화, 황자님. 이것도.”
그 후로 여러 번 음식을 입에 떠다 넣어주는 게 반복되었다. 그렇게 음식을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식사가 끝나갈 때쯤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시녀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종장도.
‘이, 잉꼬부부로 보였으려나?’
부끄러움에 몸을 베베 꼬고 있는데, 문득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레틴 녀석.’
그는 아니꼽다는 시선을 보내며 내게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그에게 보란 듯이 상큼하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더러운 인상이 더욱 구겨지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