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방심은 금물
내 얼굴 위로 퉁퉁한 주먹 하나가 날아오던 그때였다.
후웅-.
사람 몸을 들어 올릴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짓누르고 있던 세 사람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뭐지? 바람 한 방에 상황이 종료되다니?’
대체 어디서 날아온 바람일까 두리번거리던 그때.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은 한 쌍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나를 머금어 청보랏빛으로 물든 눈이 풍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황자님이, 마법을 쓴 건가?’
두 번째 생에서부터 난 이미 그가 속기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의 편임을 증명한 이후, 그는 내 앞에서 자유로이 마법을 구사했으니까.
하지만 첫 번째 생에서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마법을 쓴 적이 없었다. 나를 적이라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왜? 따지고 보면 첫 번째 생과 다름없는 상황인데. 현재 나는 그에게 있어 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대체 왜?
답을 요구하듯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꾹 다물어진 입술. 차가운 시선. 그의 얼굴에는 백치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저러면 안 되는데. 백치 연기를 왜 멈추신 거야…….’
혹여 누군가 봤을까 봐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영식들이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휴 다행……이 아닌데? 기척 하나가 남아 있어!’
나는 빠르게 접근해 오는 기척을 느끼며 몸을 긴장시켰다. 혹시 제레미의 마법을 본 거라면 어쩌지? 불길함에 사로잡힌 채 뒤를 돌았을 때였다.
‘레틴이구나.’
남은 기척 하나는 하늘빛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는 레틴이었다.
‘짜식, 일찍 좀 나타나지!’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레틴을 쳐다봤다.
그는 내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챌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는 걸 보니 기어코 내 목을 칠 요량.
뭐, 이해는 한다. 아인의 첩자인 내가 버젓이 제레미의 마법을 목격하고 말았으니, 레틴에겐 이보다 더한 위급상황은 없을 터. 기절이라도 시켜서 시간을 버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일 것이다.
‘그렇담 고이 맞아주자.’
나는 이대로 레틴에게 맞아서 기절하는 쪽을 택했다. 레틴에게 맞아준다는 게…… 내 입장에선 무지하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레미를 돕는 일이니까, 뭐.
‘자, 쳐라, 쳐.’
나는 레틴을 피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체념한 채 가만히 서 있자, 잠시 후 둔탁한 통증이 목 뒤를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의식이 끊어지고,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레틴, 이 자식.’
목 뒤가 뻐근하게 아파졌다. 적당히 기절할 만큼만 치면 될 것이지. 레틴 이놈은 내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는 걸까. 전생에 둘도 없는 앙숙이었던 레틴에게 맞았다 생각하니 괜히 더 분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괴물 체력이란 것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나절은 기절해 있을 정도의 타격이었지만 나는 금방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깨어 있는 걸 모르는 레틴은, 나를 아주 거칠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거의 뭐 사람이 아니라 짐 덩이를 던지는 느낌이랄까.
‘살살 좀 내려놓으면 어디 덧나나?’
속으로 쉬익- 쉬익- 거리며 분노하고 있던 차, 레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 첩자 한 명 남았네요. 어서 쓰세요, 황자님.”
나는 그대로 기절한 척을 유지하며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응.”
내가 듣고 있단 걸 알아챈 것도 아닐 텐데. 청각을 곤두세우자마자 귀신같이 정적이 흘렀다.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너무 궁금해서 눈을 떠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기억 소거는 다 됐습니까?”
“응. 아마 테라스에서 뛰어내리던 것밖에 기억 못 할 거야.”
“페르델 무리는요?”
“그들은 내가 마법을 쓰기 전까지만 기억할 거고.”
기억 소거 마법? 그걸 내게 쓴 거구나.
내게 마법사임을 들키고 말았으니 지금 이 상황에선 기억 소거 마법이 답이긴 했다. 이 마법을 사용하면 대상자의 기억 일부 또는 전체를 지워낼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왜 기억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지?’
페르델 무리를 혼쭐내 줬던 것도, 황자님이 마법을 썼던 것도 다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단 것이었다.
‘실수하신 건가? 우리 황자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기억이 생생하단 사실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떨었던 모양이다. 이를 눈치챈 레틴이 기척을 죽였고, 동시에 무거운 정적이 공간을 메웠다.
‘음, 일어날 타이밍이네.’
찝찝함을 남겨둔 채 스르르 눈을 떴다.
“으으 머리야…….”
“신부야! 괜찮아?”
“……!”
제레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그러곤 눈물을 매단 채 목 뒤로 팔을 감는데…… 으윽. 하마터면 심쿵사로 죽을 뻔했지 뭔가.
살기 위해 제레미의 몸을 살짝 떼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으음. 그냥 심쿵사 당할래.’
죽기 전 맘껏 안겨라도 보잔 흑심에, 그의 어깨에 턱을 묻었다. 역시. 내 선택은 옳았다.
‘너무 좋아……. 킁킁, 황자님한테서 좋은 향기 나는 것 좀 봐.’
그의 어깨에 턱을 두자, 복슬복슬한 은빛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왠지 힐링이 되는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데, 이번엔 비릿한 혈향이 함께 느껴졌다.
응? 이게 대체 무슨 냄새지? 이상하단 생각에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콧구멍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컹!”
마치 돼지울음 같은 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꿀꿀 같은 귀여운 소리가 아닌 그야말로 돼지가 컹! 하는 소리가.
‘이거 방금 내 코에서 난 소리 맞지?’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는데, 붉은 피가 후두둑 턱 아래로 떨어졌다.
“어? 신부야. 코피가 나!”
“……어어. 웬 코피가.”
이건 피곤하거나 코를 파서 흘리는 평범한 코피가 아니었다.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덕후의 코피’, ‘덕코’랄까.
이것은 최애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일정 확률(99%)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끝내는 코피까지 흘리게 되는, 덕후들에게 자주 보이는 현상이었다.
‘이것 참……. 회귀를 거듭해도 이건 나아지지를 않네.’
아무래도 이건 회귀를 백만 번 거듭해도 고쳐질 것 같지 않다. 나는 황자님에게 면역이 없어도 너무 없었으니까. 최애를 남편으로 둔 덕후의 숙명이랄까.
“제 손수건을 쓰십시오.”
내겐 익숙한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슥슥 코피를 닦는데, 뒤에 있던 레틴이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었다.
‘호오…… 레틴이 웬일이지.’
나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손수건을 받았다. 그러곤 복받쳐 오르는 고-마운 마음을, 뽀얀 손수건에 가득 담아 보냈다. 코피가 난 코를 야무지게 닦아 냄으로써.
“……?”
여기저기 때가 묻은 손수건을 레틴의 손에 고이 쥐여주자, 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손수건과 나를 번갈아 보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마치 귓가에 심한 욕이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레틴의 불행은 나의 행복! 레틴의 구겨진 얼굴을 계속 보고 있다간 통쾌함에 웃음소리라도 새어 나갈 것 같아, 슬슬 자제키로 하고 연기에 돌입했다.
“으으, 머리야. 제가 왜 침대에 누워 있는 거죠?”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어지러운 척 몸에 스르르 힘을 빼자 제레미가 나를 지탱해 주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뛰어내렸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안 나네요.”
엿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분명 테라스에서 뛰어내리는 장면밖엔 기억하지 못할 거라 했으니, 이렇게 말하면 더는 묻지 않겠지.
내 예상대로 레틴은 빠르게 수긍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 높은 데서 뛰어내리셨으니, 기억이 안 날만도 하죠.”
제레미의 마법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는 기억소거마법이 안 통했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하고 있던 그때, 이번엔 제레미 쪽에서 예리한 물음을 건넸다.
“신부야, 그런데 테라스에서는 왜 뛰어내린 거야?”
“그거야…….”
나는 수줍게 볼을 붉히며 고갤 숙였다. 황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불여우 첩자’를 연기하기 위해.
“황자님을 지켜드리기 위해서죠.”
내가 가짜 황자비인 것은 제레미도 알고 있을 테니, 그는 지켜준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얻으려 지켜준 척 한 거라 생각하겠지. 거짓투성이에, 속이 시꺼먼 첩자라고 생각해 주면 더 좋고.
조금 슬프긴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생처럼 제레미와 연대를 맺다가 아인에게 들키는 건 사양이니까. 나는 제레미에게 끝까지 적으로 보이는 게 맞다.
‘자, 그러니 어서 날 의심해요.’
마음을 비운 채, 제레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말이 없었다.
“…….”
살짝 크게 떠진 연보랏빛 눈동자에 흔들림이 보였다. 미약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흔들림이.
“나를 지키기 위해……?”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제레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곤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내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왜 내 말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나 싶어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데…….
“네.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는데, 같잖은 XX 쓰레기 오합지졸들이 황자님한테…….”
이런, 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좀 욱해 버렸다.
‘하필이면 황자님이 저렇게 경청하고 계신데……. 욕을 할 게 뭐람.’
만회하자는 마음으로, 조신하게 손을 모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곤 최대한 눈을 맑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욕을 좀체 못하는데, 하하. 방금은 흥분했나 봐요.”
음?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레틴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레틴 경?”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그가 웃음을 참으며, 내게 손을 저어 보였다. 저거, 저거, 분명 비웃음인데. 나는 그를 한 번 흘겨봐 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제 행동이 조금 과하게 느껴지셨을지는 몰라도, 저는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사랑하는 황자님을 위해.”
“나를 사랑한다고?”
“네. 사랑해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정도면 제레미가 나를 아주 거짓말쟁이에 불여우로 생각해주지 않을까? 기대감에 젖은 눈으로 제레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뛰어내릴 때 다치지는 않았어?”
제레미는 날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대신 발 부근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
그의 얼굴에 깃든 걱정을 읽은 나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설마 사랑한단 내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멍하니 제레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내 발목 부근으로 손을 가져왔다.
“2층에서 뛰어내렸으니 발목에 무리가 갔을 거야.”
이불 위로 닿은 조심스러운 감촉에 당황한 건 물론이고, 내 말을 진심으로 여기는 것만 같아 걱정되었다.
‘이상하다, 두 번째 생에서도 그는 나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었는데. 아, 혹시 백치 연기의 일환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똑똑한 분이니 도저히 나를 믿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이건 백치 연기야.’
여유를 찾은 나는 느긋하게 제레미의 걱정 어린 모습을 감상했다. 그가 거짓으로 걱정해 주는 걸 알지만 어쩐지 음흉한 욕심이 샘솟았다.
‘걱정하는 얼굴 더 보고 싶다…….’
눈을 또르륵 굴리다가, 손을 발목 부근에 가져다 댔다.
“사실 요기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입을 내밀며, 아픈 척을 했다. 그러자 제레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발목을 살폈다. 눈썹이 내려간 채, 눈시울이 붉어지는데…….
여건만 된다면 당장 화가를 소환해서! 지금 이 장면을 그림으로 소장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레틴의 팩트 폭격에 환상에서 이내 깨어났다.
“아-주 멀쩡하신데요?”
“…….”
레틴에게 뭐라 할 수도 없게 이불을 걷고 드러난 발목은 너무 멀쩡하게 보였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기도 뭐할 정도로.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레틴과 달리, 제레미는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나중에라도 아프면 치료사를 부르자.”
“네, 황자님.”
“그리고…… 고마워. 앞뒤 안 가리고 내게 달려와 준 거.”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제레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도.”
조금은 수줍은 듯 살짝 내리깐 속눈썹, 연분홍빛 입술에 걸린 선한 웃음. 진심처럼 느껴지는 표정에 순간 연기임을 망각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