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 남편 건드리면 다 죽는다
레틴은 제레미의 표정을 보며 조금 당황했다. 늘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리한 판단을 내놓는 사람인데. 자신 없는 표정이라니?
“황자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연기죠. 절대 믿으시면 안 됩니다.”
레틴은 황태자의 첩자가 아주 불여우라고 생각했다. 예리한 자신의 주군이 헷갈릴 정도라니. 대체 어느 정도의 연기력을 가진 여자란 말인가.
“황자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역으로 황자비를 매료시켜서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겁니다.”
제레미도 안 해 본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매료시키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백치 연기 중이니까.”
“음, 오히려 쉬울 수도 있어요.”
레틴이 팔짱을 낀 채 제레미를 빤히 응시했다.
“황자님이 백치 연기를 할 때, 뭐랄까. 백치미가 철철 흘러넘치거든요.”
거기에 순은의 깨끗한 은발과, 청명한 연보랏빛 눈동자도 한몫했다.
저런 얼굴에 청초한 미소까지 더해질 땐, 천상의 천사마저도 넋을 잃을 정도로 눈이 부셨다.
“백치미 넘치는 미남 보신 적 있으세요? 황자님은 희소성 있는 미남이라고요.”
“백치미? 그런 점에 매료되는 여자는 없을걸.”
“……둔하신 겁니까, 겸손하신 겁니까? 백치 황자니 뭐니 말하는 영애들도, 뒤로 돌아서면 다들 황자님 칭찬이라고요. 아까 전에도 영애들이 넋 놓고 황자님만 보던데요?”
레틴은 영애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백치 연기가 가미된 무해하고 순수한 눈빛은…… 남자인 자신이 봐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니까. 자신이 이 정도인데 영애들은 오죽할까.
“황자님의 어리고 귀여운 이미지가 영애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아요. 백치 연기가 이미지를 깎아 먹기보단 오히려 평판을 높이고 있는걸요?”
“어리고…… 귀여워?”
제레미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백치 연기가 그렇게 비칠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모르셨구나. 어쨌든 황자비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요. 지금은 그게 최선이에요.”
힐레인을 매료시켜서 같은 편으로 만든다라……. 잠시 생각에 잠겨 말이 없던 제레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은 해 보지.”
* * *
제레미와 대화를 마치고 홀로 복도로 나온 레틴은 은신한 채 힐레인의 곁으로 접근했다. 제레미가 알면 말릴 게 분명하지만, 어떤 여자인지 알아 두고 싶었다.
‘이쪽에서 먼저 무슨 꿍꿍이인지 밝혀 주겠어.’
마침 힐레인이 몸을 움직였다. 뭔가를 발견한 듯, 테라스 가까이 다가가더니 한쪽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게 보였다.
‘뭐지? 의심스러운데.’
레틴이 좀 더 힐레인 가까이 다가갔다. 은신의 귀재라는 명성답게 대담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웬걸. 힐레인이 뒤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붉은 눈동자가 향한 곳은 정확히 레틴이 있는 자리였다.
‘뭔가를 알고 본 거야? 아니면 우연이야?’
레틴은 힐레인이 자신의 기척을 알아챘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우연이었는지 힐레인이 다시 자신의 쪽에서 시선을 뗐다.
‘그럼 그렇지. 내 기척을 알아챘을 리 없어……. 그나저나 뭘 저렇게 보는 거야?’
힐레인은 테라스 난간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끝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제레미가 서 있었다.
‘황자님을 감시하고 있는 건가?’
레틴이 작게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삶이 고달픈 분인데, 24시간 감시해대는 혹이 붙어 버린 게 여간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실수인 척 해치울까?’
그랬다가는 황태자 쪽에서 대번에 눈치를 채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힐레인을 지켜보고 있던 때였다.
‘근데 저것들은 뭐야?’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제레미의 곁에는 꽤 여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페르델 후작 영식과 그 무리군.’
네다섯 명의 오합지졸들은 모두 황태자파였다. 수만 많지, 솔직히 제레미의 적수라 할 수도 없는 애송이들.
하지만 문제는.
‘황자님이 백치 연기 중이시란 말이지.’
배시시 웃는 제레미의 모습에 레틴이 이마를 짚었다.
‘영식들은 보나 마나 저급하고 유치한 도발을 할 테고, 황자님은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을 텐데.’
황자님의 백치 이미지엔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배알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지? 황자님께 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힐레인이 거슬렸다. 그녀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황태자에게 보고될 거로 생각하니,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지켜보기로 할까.’
레틴은 이 상황을 잠시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채 1분도 되지 않아 그의 속에서 조금씩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는지 안 들려. 근데 영식들의 저 표정이랑 태도, 몹시 거슬린단 말이지.’
거리가 너무 멀어 영식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례한 태도만 봐도 황자님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대충 예상이 됐다.
‘저 여자는 또 왜 저러고 있어?’
영식들의 유치한 도발을 지켜보던 차, 레틴은 힐레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부들부들 떨고 있지?’
힐레인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레틴은 미친 척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들키더라도 우선 저 여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야 했다.
“저 개XX도 안 되는 XX들이, 감히 울 황자님한테 뭐라고 XXX를 늘어놓는 거야, XX를 XX해 버릴까.”
그녀가 스산하게 늘어놓는 중얼거림의 반은 걸쭉한 욕이었다.
어쩐지 제레미를 감싸는 듯한 말투에 놀란 것도 잠시, 갑자기 힐레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드레스 자락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채,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저 여자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채 말릴 새도 없이, 힐레인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의 뒤로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흩어졌고, 얇은 드레스 자락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묘한 잔상을 남겼다.
“…….”
레틴은 자신이 은신하고 있었단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
나는 2층 테라스에 서서 제레미를 찾고 있었다. 대강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1년 전 제레미가 공격당하고 있던 장소가.
전생에서 나는 우연히 제레미에게 시비를 거는 영식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고 구해 주지 못했었는데, 그때의 일은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반드시 황자님을 구해 주고 말겠노라 다짐했다. 영식들이 나타나기 전 황자님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앗, 저기 계시다.’
마침 시야에 제레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입꼬리가 절로 들썩거리는 걸 느끼며 앞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제레미의 곁엔 이미 네다섯 명의 영식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하…… 저것들이 벌써 황자님한테 접근했네.’
플랜 A는 실패였다. 흐릿한 1년 전 기억을 더듬어야 했던 탓에 그만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여기 계셨네. 백치임에도 결혼에 성공한 우리 황자님!”
감히 황자의 앞에서 지을 수 없는 포즈와 표정에 경악했다. 영식들은 제레미가 혼자인 걸 확인하고는, 깔보는 듯한 태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죽으려고 환장했나?’
영식들의 도발은 굉장히 저급했다. 백치신데 신부는 어떻게 안았느냐, 그러다 신부가 도망가는 거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백치 황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자신들이 대신 안아줄 수 있다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1년 전과 똑같이 재생된 대사에 부아가 치밀었다.
“저 개XX도 안 되는 XX들이, 감히 울 황자님한테 뭐라고 XXX를 늘어놓는 거야, XX를 XX해 버릴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던 그 순간. 내 안에 가늘게 이어져 있던 무언가가 뚝-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레틴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들었지만, 이미 내 다리는 2층 테라스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일단은 황자님부터 구해놓자. 이럴 때를 대비해 플랜 B도 생각해 놨으니까.’
영식들이 나타나기 전 제레미를 데려오겠단 플랜 A는 과감히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대신 내게는 따로 생각해 놓은 플랜 B가 있었다. 그건 바로 전생의 원한을 꾹꾹 눌러 담아 영식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는 것.
제레미의 입장에서는 ‘저 첩자가 지금 누굴 지키는 건가.’라며 어이없어할 일이겠지. 어쩌면 ‘황태자의 첩자가 실은 내 편일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건 위험했다. 자칫 두 번째 생에서의 실패가 반복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에 대비해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제레미의 편을 들어도, 그가 나를 같은 편으로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그건 바로 제레미의 눈에 내가 ‘황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접근한 첩자’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제레미를 마음껏 지켜줄 수도 있고, 같은 편이란 의심을 받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의 효과 아닌가.
솔직히 플랜 A보다 복잡하긴 했지만 영식들을 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 작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야---!”
구두를 벗어 두 손에 들었다. 이건 그냥 구두가 아닌 이 순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킬힐이었다.
“내 남편한테서 안 떨어져!?”
붉은색 킬힐을 단검처럼 쥐고 휘둘렀다. 그러자 내 흉흉한 기세에 영식들이 흠칫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래, 지금 내 모습 아마 굉장하겠지. 검은 머리가 산발이 돼서는 맨발로 뛰어들고 있으니. 그러게 누가 내 남편 건드리래?
“신부야?”
그때 제레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다 참다가 참나무가 될 것 같아서요. 지금부터는 제가 지켜 드릴게요.”
작전을 위해 일부러 지켜준다는 말을 강조했다. 첩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에 제레미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흔들리는 연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한 번 더 쐐기를 박아볼까?
“내 사랑을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린다!”
특히 ‘내 사랑’을 강조하며 외쳤다. 좋아, 이 정도면 제레미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이겠지?
“내 사랑? 풉, 게다가 다 죽인다고? 여자 혼자 몸으로 우리 털끝이나 건드릴 수 있겠어. 어디 가서 바보 황자의 충견이라도 데려오는 게 어때.”
“바보 황자의 충견이라면, 레틴?”
“그래. 득 될 것도 없는데 백치 황자 곁에 죽어라 붙어 있는 그놈 말이야. 그 실력으로 왜 황자한테 붙어 있나 몰라.”
“우리 황자님한테 매력이 넘쳐나니까 그렇지. 그리고 말인데, 레틴 걔보다 내가 더 세. 지금 나 혼자 왔다고 여유 부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내 말에 영식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뭐야? 진짠데 왜 안 믿지. 레틴은 나보다 은신도 못 하고, 나보다 머리도 나쁘고, 우리 황자님을 생각하는 마음도 나보다 더 작은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레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나를 감시하고 있던 레틴은, 나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는 나를 감시하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잘 봐, 레틴. 황자님은 이렇게 지키는 거야.’
하이힐을 맨 앞에 있던 남자의 얼굴에 힘껏 날려 주었다. 가볍게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던 모양인데, 내 손이 더 빨랐다.
“으악! 감히 이년이!”
잡았다, 요놈. 감히 제레미 앞에서 더러운 말을 주절거렸겠다?
“요, 입! 입! 나쁜 입!”
돼지 뱃살처럼 불룩한 페르델 영식의 입을 구두로 팡팡 두들겨 패 주었다. 옆에서 다른 영식이 그만하라며 달려들었으나, 그 말을 들을 사람이던가, 내가? 나는 페르델을 손봐주는 동시에 내게 달려든 다른 놈에게 발을 날렸다.
“아악!”
“뭐야, 다들 왜 이리 힘을 못 써?”
뒤에 서 있던 영식들이 어리둥절해하며 수군댔다.
“상대방은 여자 한 명이라고. 제대로 못 해?”
제대로 못 할 수밖에 없지. 그림자 기사 중에서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난데, 어떻게 힘을 쓸 수 있겠어?
본보기로 몇 놈 더 두들겨 패 주었다. 이제 좀 상황이 파악되는지 영식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놈을 잡아 바닥으로 내리누르자, 남자가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읊조렸다.
“이, 이 봐. 지금 그 구두로 날 때리려는 거 아니지? 나 황태자파야, 왜 이래? 너도 황태자님이 추천해서 황자비까지 된 사람인데, 황태자파끼리 서로 잘 지내야 할 거 아냐. 너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내게 지금 말을 걸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페르델이었다. 후작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슬쩍 황태자파에 몸을 실은 놈.
‘……황태자파라서 조금 찝찝한 건 사실인데.’
저들이 황태자파인 만큼 어쩌면 아인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레미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하지, 뭐.
나름 신임받는 그림자 기사니,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지 않겠어. 그리고 아인이 너희들보단 나를 더 아끼고 있을 것 같거든.
“누구한테 잘 보이라고 말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기어야 할 입장이거든?”
퍽-. 퍽.
아주 조금 손봐줬을 뿐인데 페르델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대장 격인 페르델이 쓰러지자, 졸개들이 설설 뒷걸음질을 치는 게 보였다.
“어딜 가!”
아직 분이 덜 풀려서 도망가는 영식들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드레스 차림으로 너무 열정적으로 움직인 탓일까? 끝부분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에 그만 발이 걸리고 말았다.
“……읏!”
다리를 삐끗한 사이 기회를 틈타 영식 세 명이 동시에 내게로 달려들었다.
“윽.”
아무래도 체급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잔디 위로 넘어진 내 몸을 인정사정없이 눌러 버렸다.
“야야! 내가 잡았어! 다들 이리 와!”
“하하, 계집. 드디어 잡았다.”
치사한 인간들. 대체 뭘 처먹길래 이렇게 무거운 거야? 낑낑거리며 몸을 바르작거리자 영식 하나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젠 네 차례다!”
내 얼굴 위로 퉁퉁한 주먹 하나가 날아오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