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내 여신이야
“황자가 어쩌다 저리되었는지. 쯧쯧. 열 살 때까지는 영리한 줄 알았거늘.”
황제는 제레미를 보며 대놓고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보는 내가 다 화가 날 정도로.
‘옆에서 귀족들이 듣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라니. 저러니까 귀족들이 울 황자님을 무시하지!’
황제는 제레미를 철저히 홀대했다. 제 아들임에도 백치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못마땅하게 여기기 일쑤였다.
이 또한 황제의 총애를 받지 않으려는 제레미의 계략일 수도 있었지만, 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로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확 그냥. 뭘 비웃어? 저리 안 꺼져?’
슬쩍 고개를 돌려 대놓고 비웃음을 던지는 귀족 한 명을 째려보았다. 시선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살기를 담아.
그러자 몇몇 귀족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한참 살기를 담아 째려보고 있던 그때, 꼬마 황녀님이 내 드레스 자락을 살짝 끌어당겼다.
“언니, 언니.”
“네?”
“언니 눈이 이렇게! 올라갔어. 엄청나게 무서워.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
이크, 황제와 황후가 보지 못하게 각도를 조절하긴 했는데. 시선이 아래에 있는 황녀님은 그만 내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언니, 내 편 할래?”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황녀님?”
“카렌은 무찔러야 할 적이 있거든. 언니를 내 편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
무찔러야 할 적? 그게 뭐지? 뒷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황후가 카렌의 말을 막았다.
“카렌 황녀. 황자비에게 언니라니요? 말을 삼가세요.”
“네에……. 힉.”
카렌이 시무룩한 채 어깨를 떨구었다. 하지만 이내 뭔가를 발견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후의 뒤로 작은 몸을 숨겼다.
뭐지? 대체 뭘 봤기에 저렇게 무서워하지? 궁금증을 안고 뒤를 돌아보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황태자님이잖아…….’
고귀함을 머금은 금빛 머리카락과 태양을 한 조각 가져온 듯 고고하게 빛나는 금안. 옅은 웃음기가 섞인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
나는 무의식중에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와…… 사람이 낮에 볼 때랑 밤에 볼 때랑 저렇게 다를 수가 있나?
지난밤에 본 그의 미소는 악마를 연상시켰었다. 홀릴 듯 매혹적이지만 잘못 발을 디뎠다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하지만 지금의 그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어디를 보든 완벽한 동화 속 왕자님 같잖아?
“무…… 무서…….”
하지만 카렌은 그런 황태자를 괴물 보듯 설설 피했다. 키가 작은 탓에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가 볼 땐 분명히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카렌을 보고 의아해하던 때, 낮으면서도 아름다운 울림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엘키시에스에 영광을.”
아인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예법에서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왔다.
“왔느냐, 아인.”
“형!”
여기서 아인을 반긴 사람은 황제와 제레미뿐이었다. 물론 제레미의 경우는 진심이 아니겠지만.
“바쁘신 와중에도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네가 간곡히 청하지 않았더냐. 연회에 참석해서 황자의 면을 살려줘야 한다고. 쯧쯧, 그리 정이 많아서야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가겠느냐?”
저리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황제의 위치에 있으면 무릇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 하거늘.
하지만 황제는 그런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황자를 죽이려 기회만 보고 있는 게 황태자인데. 정이 많다 말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정이라기보다는 황태자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황후가 정곡을 찌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과 아인의 눈웃음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후 폐하.”
아인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누구든 홀랑 넘어갈 것 같은 화사한 미소였지만, 황후는 이에 속지 않는 눈치였다. 마치 가면 속 진짜 모습을 읽어낸 듯이.
“황태자가 청을 올린 지 한 달 만에 이뤄진 혼인입니다. 황자비 또한 황태자가 직접 간택한 것이나 다름이 없고요. 황태자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 여기는 게 단순한 제 착각일까요?”
“그건 오해십니다. 저는 황자에게 어울릴 만한 영애를 추천한 것일 뿐입니다.”
“추천이라. 황태자는 강압적 추진을 추천이라 부르십니까.”
황후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황태자에 대한 적개심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말투였다.
“황후, 거기까지 하시오.”
“폐하. 제가 지나쳤다고는 말씀하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러다 카렌마저도 어느 때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닙니까.”
“황후 폐하.”
아인이 한 걸음 황후에게 다가갔다. 기품이 넘치는 부드러운 걸음걸이였지만, 어쩐지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기우입니다.”
그가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차가웠다.
“저는 카렌도 제레미처럼 소중한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아인이 눈동자만 굴려 카렌을 쳐다보았다. 입은 소중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서늘한 시선엔 채 숨기지 못한 압박감이 스며 있었다.
“……!”
아인의 예리한 시선에 카렌은 조금씩 몸을 떨었다.
‘애한테 너무 압박을 주는 거 아냐?’
덜덜 떨고 있는 카렌을 당장에라도 보호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러면 아인이 나를 수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제레미의 감시자로 온 내가 카렌을 도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전생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나는 지금 상황을 못 본 채 넘어갔었다. 겁에 질린 어린 황녀님은 결국 드레스에 실례를 하고 말았었지.
평범한 여덟 살 아이였다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실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황녀라는 신분 탓에 카렌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오랜 시간 동안 견뎌야 했다.
‘이번엔 그렇게 놔두지 않겠어.’
나는 슬쩍 카렌의 앞을 막아섰다. 풍성한 치마가 역할을 제대로 해 주길 바라며. 그러곤 아인의 시선을 내게로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황태자님께선 동생들을 아주 끔찍이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임무에서 벗어난 행동에 아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무얼 의도하고 있냐고 묻는 듯했다. 여기서 내가 긴장한 티를 낸다면 더 의심을 사고 말겠지.
나는 일부러 더 당당하게 눈을 빛냈다. 카렌을 의도적으로 막아섰다는 의혹을 차단하기 위해, 새로운 임무를 받아 의욕이 넘치는 부하처럼 행동했다.
“제게 항상 말씀하시길, 황자님에겐 다정한 동반자가, 황녀님에겐 친근한 언니가 되어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렇죠, 황태자님?”
“…….”
아인의 표정은 묘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는 그저 내 눈을 깊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나. 아인의 시선에 홀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차,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아, 맞다.”
노래하듯 맑은 목소리. 제레미였다. 그는 싱긋 미소를 띤 채 아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형. 내가 이 말 했던가.”
아인이 시선을 올려 제레미를 쳐다보았다. 제레미를 샅샅이 훑는 아인의 시선에 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반면 제레미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백치로 보기 어려운,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미소를.
‘전생에 이런 적은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과 같은 두 사람의 대치는 기억에 없었다. 원래라면 카렌의 실수로 대화가 급히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혹시 내가 나서서 미래가 달라진 건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입술이 바짝 탔다.
‘황자님은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는 거지?’
저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아인이 제레미를 가만두지 않을 텐데. 아슬아슬한 제레미의 연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던 그때였다.
“……!”
문득 손에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제레미의 손에 이끌려 그의 옆에 딱 붙어 서 있는 중이었다.
“고마워. 신부를 소개해 줘서.”
제레미가 황태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그러곤 보란 듯이 내 손등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어?’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제레미가 사르르 백치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백치 연기를 보이려고 이렇게 행동하신 건가……. 황태자님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시지?’
나는 슬쩍 아인의 표정을 살폈다.
‘별로 의심하는 것 같진 않은데…… 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지?’
순전히 감이긴 했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내 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손잡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나는 무의식중에 제레미와 깍지 낀 손을 풀려고 했다.
그런데.
“제레미는 신부가 정말 마음에 들거든.”
제레미가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제게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신부는 내 여신이야.”
그가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홀릴 듯한 백치 미소에 순간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멍해졌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갤 드는데, 문득 여기저기서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여신이래.”
“여신…….”
부채 뒤로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콕콕 와서 박혔다. 혹시 방금 전에 황자님이 나보고 여신이라고…… 했었나?
“언니…… 여신이야?”
내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카렌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찾아온 정적에, 카렌의 물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여신이야? 여신이야? 여신이야……?
“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사이, 입을 연 사람은 제레미였다.
‘음, 그래. 이로써 확실해졌네……. 황자님은 나를 싫어한단 거.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최고의 미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여신’이라는 허언을 뿌리는 겁니까!? 네?!’
저지른 건 제레민데, 고개는 내가 숙여야 했다. 아인으로 인한 긴장감은 어느덧 흐려져 있었지만 살았다는 기쁨보다 창피함이 더 컸다.
‘백치 연기는 황자님이 하는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야……?’
나는 내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 *
제레미는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후원에 홀로 서 있었다. 연회장 쪽을 바라보던 연보랏빛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서리던 때였다.
“황자님.”
“레틴.”
레틴이라 불린 남자는, 제레미의 곁에 있는 듯 없는 듯 붙어 있던 호위 기사였다. 연하늘빛 머리카락에 짙푸른 눈동자를 가진 그는 경계심 가득히 주변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저희뿐인 것 같습니다.”
“응. 알아.”
제레미가 주변에 방음 마법을 펼쳤다. 얇은 막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있던 레틴이 살짝 입을 벌렸다.
“봐도, 봐도 놀랍군요. 황자님의 마법은.”
마법서도 없이 이토록 빠른 시간에 마법을 쓰다니. 레틴은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마법 사용 시 여러 가지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두꺼운 마법서를 펼쳐 원하는 마법을 찾아야 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주문을 해석해야 했으니. 그마저도 실패율이 높아 속도전에서 매우 불리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레미는 마법서가 없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속도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마법에 능해, ‘속도’란 제약에서 벗어난 마법사. 세간에서는 이들을 ‘속기(速技) 마법사’라 불렀다.
“이런 분이 백치 황자라 불리다니. 통탄할 따름입니다.”
레틴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반면 제레미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황태자고 뭐고, 그냥 확 먼저 몰살시켜버리시는 게 어떠세요?”
레틴은 제레미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장에 손만 튕겨도 이 땅에 지옥을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역사에 폭군이라 남을지언정, 그냥 싹 다 갈아엎어 버리시지. 그럼 만사가 편할 텐데요.”
하지만 자신의 주군은 너무도 조심스러웠다. 주변 사람들이 다칠까 봐 빠른 길을 놔두고 돌아가시니. 이러다 대업을 완수하고 나면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레틴은 생각했다.
“그 첩자만 해도 그렇습니다. 왜 그냥 보고만 계시는 겁니까?”
“황자비 말이야?”
“황자비는 무슨요. 황태자가 대놓고 붙여 놓은 첩자죠.”
레틴은 오전에 봤던 여자를 떠올렸다. 음침한 검은 머리카락에 불길한 붉은 눈동자. 황자님 곁에 있을 땐 하얀 눈송이에 시꺼먼 숯검정이 하나 올라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쩜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지 몰라.
“그 여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속 황자님을 감시하도록 내버려 두시게요?”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어. 곁에서 감시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가장 ‘백치 황자’다운 일일 테니까. 내가 움직이면 황태자 쪽에서 의심할 거야.”
이쪽에서 조처하면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란 걸 들키고 만다. 결국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해야 하는데, 그러면 힐레인이 실컷 감시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고.
제레미가 어느 쪽을 택하든 아인에게 불이익이 될 것은 없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대놓고 첩자를 붙여 놓은 거군요? 하여튼 황태자가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타고났어요.”
레틴이 혀를 찼다.
“그 여자, 황자님께 허튼짓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응, 전혀. 오히려 조금 허술해 보인다고나 할까.”
제레미는 아인이 제게 완벽한 첩자를 보내올 줄 알았다.
하지만 힐레인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딱히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무한한 애정이 담긴 눈빛을 보내곤 했다.
“그것도 연기일까?”
제레미가 조금 자신이 없는 얼굴로 고갤 숙였다.
“솔직히…… 헷갈려.”
거침없이 부딪쳐 오는 그녀의 눈빛. 그게 정말 거짓일까? 평상시라면 빠르게 답을 내렸을 텐데 지금은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