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백치 황자와 신데렐라 신부
황자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축제가 열렸다. 황성이 일주일간 개방되었고, 연회장은 여러 가문의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삼삼오오 모여 제 짝을 찾는 영애와 영식들. 가문의 번영을 위해 파를 이루는 귀족들. 그들 사이에서는 가십거리가 빠질 수 없었다.
“어머, 저기 들어오네요. 백치 황자와 신데렐라 신부.”
그중 가장 뜨거운 가십거리는 힐레인과 제레미였다.
“백치 황자는 그렇다 쳐도, 신데렐라 신부는 뭐예요?”
“남편 잘 만나 신분 상승했잖아요. 세상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작 가문의 영애가 황자비라니. 저렇게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 또 있을까요?”
“호호, 그래도 남편을 잘 만난 건 아니죠. 백치인데…….”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몇몇 영애들은, 아니 대부분 영애의 숨겨진 속마음은 달랐다. 바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들의 시선은 자꾸만 제레미에게 향했다.
입으로는 황자비가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생겼잖아.’
‘깨끗하고 청초한 은발에 넋이 나갈 것 같은 미소라니.’
‘바보만 아니었어도 정말 이상적인 황자님이신데.’
영애들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백치라고 무시하는 척해왔지만, 전혀 없는 사람 취급하기엔…… 황자가 가진 외모가 너무나도 출중했다.
‘황자님들이 외모는 타고나셨다니까.’
제국의 단둘뿐인 황자들은 제각각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먼저 다가가 친해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한 명은 겉으론 부드러워 보이지만, 어딘지 모를 위압감이 있었다.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릴 땐 악마의 유혹처럼 위험해 보이니까. 한마디로 황태자는 매력적인데 위험한 남자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백치 황자. 희귀한 은발 머리에 백합같이 청초한 외모는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평생 혼자 살 것 같아 마스터피스 바라보듯 느긋했는데. 웬 듣도 보도 못한 남작가 영애가 채가 버렸다.
간만 보다가 한 명은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영애들은 속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춤을 추시려나 봐요.”
“아아, 어쩜. 두 분이 잘 어울리시긴 하네요.”
“리야 남작가에 저런 영애가 있었다니, 사실 그전엔 잘 몰랐는데…… 제법 아름다우시군요. 황자님 곁에서도 미모가 퇴색돼 보이지가 않아요.”
새로운 황자비는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쳤다.
마른 몸매에 예쁘게 자리 잡은 등 근육, 깊은 밤하늘을 닮은 고혹적인 검은 머리카락. 웃을 때마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루비색 눈동자까지. 두 사람은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보였다.
영애들은 속으로 황자님의 옆에 있는 게 자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림을 그렸다.
“저렇게 잘생기셨으니, 바보라도 살아볼 만할 것 같아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신분도 황자님이시고.”
“어머, 레이나 영애도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네…… 솔직히 생각해 보면 코르티잔 여럿 끼고 다니는 영식들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한 여자만 바라보는 바보가 나을지도 모르죠.”
결혼 후 알게 모르게 제레미의 평판이 높아지고 있었다. 반면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힐레인은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우리 황자님, 어떻게 해야 더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남편이 바보로 보여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 * *
‘이렇게 춰도 되는 건가?’
나는 현재 제레미와 함께 홀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게 춤이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추는 거랑 좀 다른데.’
커닝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옆을 돌아보는데, 역시나 우리처럼 두 손을 맞잡은 채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커플은 없었다.
‘으음…… 우리 정말 춤을 이렇게 춰도 될까. 저기 저 7살짜리 귀족이 우리보다 더 나은 것 같단 말이지.’
불안함에 살짝 고개를 들어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싱그러운 풀잎 같은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아하, 이것도 백치 연기의 일환이구나!’
하긴 춤을 잘 추는 백치라니. 생각만 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해 놓은 울 황자님, 역시 천재라니까.
“황자님, 제 발을 밟으셔도 돼요.”
나는 그의 연기를 돕기 위해, 소곤소곤 귓속말했다. 여기서 내 발을 밟으면 좀 더 백치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발을? 왜……? 그러면 신부가 아프잖아.”
“안 아파요. 저 튼튼해요.”
에이, 이슬만 먹고 사는 것 같은 제레미인데. 발 좀 밟았다고 아프겠어? 그래도 내가 명색이 그림자 기사 탑 클래스인데.
콧김을 뿌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잠시 말이 없던 제레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안 되겠는걸? 제레미 발보다 너무 작잖아. 밟으면 부서질 거야.”
“네? 그렇진 않은데.”
“그나저나 내 신부는 왜 자꾸 발을 밟으라 그러실까?”
제레미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은 없다만……, 그냥 좀 화끈하게 밟아주면 안 되나? 칫. 이게 다 저를 위한 건 줄도 모르고.’
그런데 그때, 춤에 심취해 있는 커플이 팔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제레미가 맞을 것 같아, 그의 허리를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엇, 조심.”
‘응? 몸이 뻣뻣해지셨어. 나랑 밀착한 게 불편하신가. 왜 이렇게 몸이 굳었지?’
하지만 그를 살펴보기도 전에 또다시, 옆 커플의 팔 공격이 이어졌다.
‘아니, 저 커플이 진짜.’
크게 휘두른 팔을 피하고자, 제레미의 허리를 내게 완전히 밀착시켰다. 그러자 머리 위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저기…… 신부야?”
“네?”
“너무 가까운 것…… 같아.”
제레미가 손등으로 살짝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귀는 붉어져 있고,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색기 어린 표정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원위치로 돌려놔 주었다.
‘그나저나 방금 뭐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내내 굶주리다가 먹이를 발견한 맹수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생소한 느낌에 이상함을 느끼던 차, 제레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부야……. 표정이 무서워졌어.”
“네? 그게 그러니까…… 제가 춤을 추는 게 처음이라서요. 좀 어려워서 그랬나 봐요.”
“처음이라고?”
“네.”
음,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서도 지지난 생에서도 첫 춤을 황자님과 췄구나.
남작가 출신이긴 했으나, 나는 사교계의 춤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내 유년 시절은 드레스보단 바지를, 누군가의 손을 맞잡기보단 검을 휘두르기 바빴으니까. 아마 황자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영영 춤출 일이 없었을지도.
“춤을 추는 게 처음이라고? 어째서……?”
그런데 갑자기 제레미가 춤을 멈추었다. 그는 살짝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나 방금 말실수한 건가.’
19살이 되도록 사교계의 춤을 춘 적이 없는 귀족 영애가 과연 몇이나 될까. 조금 전 실수는 스스로 ‘난 수상한 사람이오.’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재빨리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가난 때문에요!”
“……응?”
“사실 아시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리야 남작가가 많이 가난해요. 그래서 사교계 춤을 배우는 건 엄두도 못 냈었죠.”
휴, 급하게 만든 변명치고는 훌륭했다. 게다가 리야 영지가 가난한 게 사실이라 어색한 부분도 없고.
“신부야…….”
제레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백치 황자 같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지금은 괜찮아요. 이제는 함께 춤을 출 상대도 있고.”
살며시 제레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사교계 춤 좀 안 춰본 게 뭐 어떠냐. 지금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과 맘껏 춤을 출 수 있는데.
“우리 오래오래 함께 춤춰요, 황자님.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도요.”
부디 이번 생에서는 오래 살자는 염원을 담아 그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러자 살짝 커진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왜 그러세요, 황자님?”
제레미의 시선이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살짝 볼이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열이 나시는 거 아니에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손을 그의 이마로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의 이마에 내 손이 닿기 전, 그가 한 걸음 뒤로 멀어졌다.
“황자님?”
“……신부야, 나 잠시만 어디 갔다 올게.”
그가 갑자기 훅 멀어졌다.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거리를 두고 벽을 치는 게 보였다.
“황자님……?”
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내 부름에도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홀에 나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뒤를 돌아 나가버렸다.
* * *
‘황자님이 나를 경계하는 게 당연하긴 해.’
나는 누가 봐도 확실한 황태자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동생을 걱정한 형이 좋은 배필을 소개해준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누구나 자세히, 아니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아인이 자신의 사람을 제레미의 곁에 붙여두는 거란걸. 제레미 또한 그 이유로 나를 경계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서운해. 서운하다고.’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제레미의 태도에 솔직히 좀 상처받고 말았다. 어제 보고하러 다녀온 걸 들키기도 해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데미지가 이 정도일 줄은.
‘최애에게 버려지다니……. 온 세상이 나를 버린 기분이야.’
연회장 구석에 서서 벽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온몸으로 ‘괴롭다’를 표출하다가 문득 멀리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저 사람한테서 제레미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나. 제레미에게 같은 편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 거야. 첫 번째, 두 번째 삶 때처럼.’
제레미에게 같은 편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회귀 전 겪었던 두 번의 실패와 관련이 있었다.
첫 번째 생에서 제레미는 백치 연기 중에도 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했었다. 그땐 죽을 때까지 의심을 받아야 했는데, 그 점이 억울해 두 번째 생에서는 다른 선택을 해버렸다.
황자님께 모든 사실을 털어놨었지. 그러곤 황자님의 편이란 걸 증명해 보였고.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제레미는 나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었나. 제레미와 나의 유대를 알아본 아인이 자객을 보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살의를 담아서. 그로 인해 나는 두 번째 인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점이 있었다.
아인은 귀신같이 눈치가 좋은 사람이라는걸. 그를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한다는걸.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절대 황자님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제레미가 알아주지 않아도 뭐 어때? 뒤에서 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지.
그렇게 속으로 호언장담했던 게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하지만 굳게 마음먹었던 게 무색하게도, 제레미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고 나니 사무치게 쓸쓸해졌다.
이렇게 해야 황자님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횅했다. 황자님께 끊임없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분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외롭다.
“괜찮아, 괜찮아.”
영 기운이 안 나긴 했지만,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알아주길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잖아. 연회장에서 새신부가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그러니 기운 차리자. 어릴 때부터 기분 숨기는 거 하나는 잘했잖아?’
이럴 땐 단 게 최고란 생각에 디저트가 진열된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살기가 감지되었다. 척추가 쭈뼛할 정도로 강한 살기가.
‘누구야? 이렇게 무식하게 살기를 뿜어대는 놈이.’
미간을 찌푸리며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핑크빛이 도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긴 여인이 서 있었다.
“체르샤?”
물결치는 붉은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매와 도톰한 입술. ‘이 시대의 미녀 상은 나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그녀는 나와 같은 그림자 기사였다.
“잠을 통 못 주무셨나 보네요? 안색이 피곤해 보이는 걸 보면.”
얘가 미쳤나? 나만 보면 물어뜯으려 하던 녀석이, 왜 살갑게 말을 거는 거야? 결코 이렇게 친절하게 말을 걸 사람이 아닌데, 또 무슨 꿍꿍이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그녀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혹시 피곤해 보이는 이유가…… 초야를 치르느라?”
체르샤의 붉은 입술에 짙은 비웃음이 서렸다. 눈빛은 나를 한참이나 아래로 깔보듯 건방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