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만 울릴 수 있다
나는 드레스 차림 그대로 황자궁에 숨어들었다.
중간중간 순찰을 하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하얀 드레스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내 기척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면 눈뜬장님이라고도 할 수 있어 어쩐지 측은함이 밀려왔다.
‘이게 다 내 은신술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다니까. 후후. 이제 곧 도착이니, 옷 갈아입고 잠들면 오늘의 임무는 끝!’
여유를 부리며 슬그머니 황자궁의 창틀을 넘었다.
하지만 자만이 실수를 부른다고, 나는 곧 내 기척을 눈치챈 이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신부야…….”
“……!”
너무 놀란 나머지 창틀에서 그만 발이 미끄러져 버렸다. 그러자 제레미가 재빠른 동작으로 내 등을 받쳐 창틀에 기대앉게 했다.
“어디 갔었어?”
제레미가 입을 뾰로통 내밀며, 창틀에 앉은 나를 두 팔로 가두었다. 얼른 대답하라는 듯 시선에서 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뭐지, 지금 이 상황? 황자님이 왜 깨어 있는 거야? 분명히 수면향을 켜고 나왔었는데. 게다가 첫 번째, 두 번째 생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
나는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려 침대 옆 탁상 쪽을 살폈다. 정상적으로 초가 탔다면 밑동을 보여야 맞는데, 반도 채 타지 못한 초가 보였다.
이런 젠장! 촛불이 중간에 꺼졌구나.
“신부야, 대답…….”
그런데 그때 자신을 코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레미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살짝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해야지?”
달빛에 비친 제레미의 머리카락이 신비로운 은빛을 내며 쉴 새 없이 반짝였다.
그가 내 쪽으로 상체를 살짝 숙이자,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줌이 내 볼에 닿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간지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온통 신경이 쏠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얀 얼굴과 그림 같은 이목구비, 복숭앗빛으로 물든 입술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응?”
제레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본인이 잘생긴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고서야 얼굴을 저렇게 잘 활용할 리가 없잖아……? 하마터면 천사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다 말해버릴 뻔했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다른 변명거리를 내놓았다.
“……잠시 산책을 하고 왔습니다.”
“이 밤에?”
“예. 잠이 잘 안 와서……. 그럴 땐 산책을 다녀오는 게 좋더라고요.”
“……창문으로?”
“초야에 밖을 나가면 좋지 않은 소문에 휘말릴 듯하여…… 몰래 다녀오려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들킬 걸 대비해 거짓말을 미리 준비해 둔 덕이었다.
‘괜찮을 거야. 전생에서도 잘 먹혀 들었던 거짓말이니까.’
전생에서의 제레미는 산책을 다녀왔다는 내 거짓말을 묵과해 줬었다.
그도 그럴 게 백치를 연기하고 있는 제레미에게 선택지는 넘어 가주는 것밖엔 없었으니까.
나를 수상하게 여기고 이를 티 내는 건 ‘나는 백치가 아니다’라고 밝히는 것과 같았다.
물론 속으론 나를 몹시 의심하고 있겠지만, 내가 황태자의 사람임은 그도 이미 아는 사실일 테니 이 또한 괜찮았다.
“흐응. 그래? 밤에 산책하는 습관이 있구나.”
역시나. 내 생각대로 제레미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넘어가 주려는 듯 보였다.
“예. 산책을 다녀오지 않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여…….”
그의 호응에 탄력을 받은 나는 어지러운 척을 하며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튼튼한 몸으로 약한 척하려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긴 했지만.
“응. 알겠어! 춥다. 얼른 내려와.”
“어엇.”
제레미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는 창틀에서 살짝 내려주었다.
그냥 넘어가 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내려오는 걸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왜 자꾸 회귀 전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거지?
‘뭐…… 싫다는 건 아닌데, 오히려 이렇게 공주처럼 안기는 건 좀 좋기도……. 흠흠,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도 되나 싶지만, 일단은 만족…… 아니, 대만족.’
미소를 참으려 애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면 그는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고 있었다. 그가 물끄러미 시선을 보낸 곳은 내 드레스 자락이었다.
“신부야. 드레스 뒤쪽이 뜯어져 있는데?”
제레미의 손가락이 드레스의 벌어진 자락에 닿았다. 등을 간질이는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잘라줬어?”
달빛과 어둠의 경계에 머물러 있는 제레미의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림자를 드리운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달빛이 스민 연보랏빛 눈동자는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저기요, 황자님? 지금 백치 연기가 완전히 해제됐는데요……? 이러다 내가 아인한테 이르러 가면 어쩌려고 이러지. 왜 자꾸 회귀 전과 다르게 행동하는 건데?!’
하지만 이 남자,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차가운 표정을 고수 중이다.
“혼자서 한 건 아닐 테고. 어떤 남자가 잘라준 거야?”
“호, 혼자서 했는데요.”
“거짓말. 신부의 머리카락에서 낯선 남자의 향기가 나는걸.”
무, 무슨 향이 난다고 그러시지? 급히 머리카락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미세하게 아인 특유의 시원한 우디 향이 느껴졌다. 이 냄새 때문에 남자란 걸 안 건가……?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아인을 보며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제레미 또한 그 점에서는 비슷해 보였다. 어쩌다 무시무시한 두 남자 속에 낀 보통 사람인 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누구야?”
제레미는 현재 완벽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질투 어린 낯선 시선에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어…… 이게 화가 날 만한 상황이긴 한데. 웨딩드레스를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잘라주는 건 천인공노할 짓이니까. 하지만…… 우린 진짜 부부가 아니잖아? 제레미 또한 첩자인 나를 진짜 신부로 생각하지 않을 텐데. 왜 화가 났지?’
세 번째 삶이 시작된 첫날부터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미래를 잘 알고 있으니 잘만 하면 비극을 막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제레미는 그 전과 다른 행동과 표정을 보여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제레미의 의중을 모르니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말꼬리를 흐리며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불현듯 그를 에워싼 공기가 달라졌다.
그는 차가운 표정을 치우고는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흑.”
흑?
그것이 황자의 흐느낌이라 인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흑……. 내가 잘라주려고 했는데.”
세상에. 지금 우십니까! 나는 황자의 눈동자에서 후두둑 흘러내리는 맑은 눈물을 보며 입을 벌렸다.
‘아, 혹시 이게 다 백치 연기를 위해서였나?’
제레미가 왜 첫 번째, 두 번째 삶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연기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어쩌지? 울지 마세요, 황자님.”
내가 황자님을 울린 건가? 맞지? 오, 세상에. 제레미를 울렸단 생각에 허둥지둥하며 옷깃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동자는 언젠가 보았던 눈물 흘리는 천사상보다도 더 성스러워 보였다.
순간 당황한 것도 잊고 내 안의 덕심이 불타올랐다. 우는 모습이 마냥 예뻐 보이고, 붉어진 볼이 귀여워 꼬집어 보고 싶은 덕.심.이.
나는 몽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느린 손길로 눈물이 지나간 자리를 어루만졌다.
“더…… 울어 봐.”
“…….”
내 말에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음……? 나 방금 속마음을 말했던가……?’
점차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두 뺨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귀여워도 그렇지 어떻게 더 울어 보라고 말을 했지? 으휴. 이 입! 입!’
아차 싶었지만 이미 물이 엎질러진 뒤였다. 그것도 아주 콸콸.
“그러니까 제 말은 울지 말라는…… 거였어요.”
“아닌데, 방금 더 울어 보라고…….”
“네? 뭐라고요?”
“제레미에게 더 울어 보라고 했는데.”
“저는 울지 말라고 했는데요? 헤헤.”
짓궂을 정도로 집요한 그의 물음에 방긋방긋 미소로 화답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잖아, 그치?’
나는 계속 웃음으로 일관하며, 그의 눈물을 손으로 마저 닦아 주었다.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제레미가 살짝 움찔했다.
어색해하는 것 같긴 했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닌지, 그는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근데 왜 그리 슬피 울었어요? 드레스를 직접 잘라주지 못해서……?”
“응. 그거…… 남편이 잘라주는 거라고 그랬어. 근데…… 내가 바보같이 잊고 자 버렸어.”
“황자님도 참. 이게 뭐라고 울어요. 자, 뚝.”
제레미의 은빛 속눈썹에 고운 눈물이 방울방울 달렸다.
‘이렇게 예쁘게 우는 남자가 또 있을까? 없지, 없어. 이 세상에서 내 남편이 제일 예쁘게 운다고.’
묘한 자부심을 느끼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우는 모습은 심장에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벌렁거리고 있었다.
“으윽…… 그렇게 대책 없이 예쁘게 울면 어쩌자는 겁니까.”
“응?”
“황자님이 너무 예쁘게 우니까 뭐든 다 들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잖아요. 으음, 그럼 이건 어때요? 황자님이 또 잘라주는 거예요.”
“……뭘? 설마 드레스를?”
제레미의 눈빛에 얼핏 당황스러운 감정이 스몄다. 제가 의도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는 듯.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의 미친 연기력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 그가 보내는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울 황자님 눈물 그치게 하려면 열 번이고, 백번이고 더 자르게 해 줘야지. 그렇고말고!
“잠깐만요, 가위가 어딨지…….”
책상 서랍에서 가위를 찾아와 돌처럼 얼어붙어 있는 그에게 꼭 쥐여 주었다. 마치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줘서 달래는 것과 같이.
“저기 신부야……. 이미 반 정도가 잘렸는데.”
가위와 내 드레스를 번갈아 보던 제레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에이, 괜찮아요, 괜찮아. 만족할 만큼 잘라주세요.”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모두 어깨 앞으로 넘긴 후 그에게 등을 보여 주었다.
이미 등의 반까지 잘린 탓에 한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딱히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부러 등이 파진 드레스만 찾아서 입는 사람도 있는데, 뭐. 고럼. 이건 노출 축에도 안 속하지. 부끄럼이 웬 말이야?’
아인의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잔뜩 긴장됐지만, 지금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지금은 그저 제레미를 달래 주어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
하지만 의외로 제레미는 말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신이 난 척 가위로 자를 줄 알았는데.
“황자님……?”
이상하단 생각에 힐끔 뒤돌아봤다. 제레미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순은의 깨끗한 은발 사이로 붉어진 귀가 드러났다. 귀가 왜 빨개지셨지? 추우신가.
“황자님? 왜 그러세요?”
한 번 더 힘주어 부르자, 텅 빈 인형에 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볼과 혼탁해진 연보랏빛 눈동자에 묘한 색기가 흘렀다.
“……앞을 볼래?”
“예!”
서걱-.
내가 앞을 보자, 잠시 후 가위질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가위로 아주 조금 잘라낸 것 같은데도, 제레미는 그쯤에서 만족했는지 차분히 가위를 내려놓았다.
“나는…… 졸려서 먼저 잘게.”
마치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배려를 해준 것처럼, 그가 침대로 쏙 기어들어 갔다. 그러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내 눈에는 꼭 귀여운 번데기 같았다.
‘휴, 드디어 울음을 그치셨네. 앞으로도 계속 저렇게 예쁘게 우시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솔직히 그의 우는 얼굴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예뻤다.
붉어진 눈가에 이슬처럼 맺힌 눈물. 복숭아처럼 발갛게 피어오른 뺨. 무언가를 애원하듯 살짝 내민 입술까지.
심장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솔직히 좀 기대가 됐다. 다음에 또 우는 얼굴 보여 주시면 좋겠다고.
‘아, 하지만 남이 울리는 건 안 돼. 다른 사람이 만약 제레미를 울린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단 말이지. 울 황자님은 나만 울릴 수 있어, 나만.’
괴상한 집착인가 싶긴 했지만, 이건 다 황자님의 백치 연기를 위함이라며 합리화해버렸다. 그러곤 뒤늦게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제레미는 뒤를 돌아누워 있었다.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유난히도 붉어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내 잠이 쏟아졌다.
죽었다가 살아나고, 달라진 미래에 종일 불안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제레미의 곁에 있으니 포근한 잠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