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남편이 해야 할 일
‘오늘은 본모습이시군.’
평소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기로 소문이 난 아인은 그림자 기사 앞에서만 그 갑갑한 가면을 벗었다.
철저한 가식으로 이루어진 가면을 벗은 그는 나른하고 피곤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그 미소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를 갈망하는 흡혈귀처럼 어딘지 모르게 결핍되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황금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붉은 입술의 조화는 고혹적인 악마를 연상시켰다.
“정말 의외의 모습이구나. 순간 나를 유혹하러 온 몽마인 줄 알았다.”
아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나는 내 차림새를 한 번 쳐다보고는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드레스를 벗을 방도가 없어 입은 채로 오게 되었습니다. 미숙한 모습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미숙하긴. 나를 즐겁게 하였으니, 사과 말거라.”
고고한 금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힐, 나의 힐.”
그가 미소를 띤 채 느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웃음에 속지 않았다. 저렇게 부르는 건 대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니까.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나, 귀족들이 제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을 때. 그는 종종 저런 식으로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내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데.”
역시나. 내 예상대로 심기가 잔뜩 꼬인 말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명하십시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위압적인 검은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도록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백치 황자, 제레미.”
그의 속삭임에 나는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조금 놀란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 놀라느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죽일 거 아니까.’
그는 첫 번째 결혼식 때에도, 두 번째 결혼식 때에도, 보고하러 온 내게 제레미를 죽이라 명했었다. 하지만 내가 방을 나갈 때쯤, 가볍게 명을 번복했었다. 아주 쉬운 장난을 거둬들이듯.
“내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사실…… 궁금하긴 합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죠?”
“황제 폐하께서 새로운 귀족 파벌을 형성하시려는 것 같구나. 황태자파로 뭉친 귀족들을 와해시키려는 것이겠지.”
“와해라니요……? 폐하께서는 황태자님을 전적으로 믿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렇지. 무능한 황제는 내 편이지. 하지만 이번엔 황후의 꾐에 넘어간 모양이더구나.”
“……황후 폐하요? 그럼 새로운 귀족 파벌이라 하심은…… 황후파 혹은 황녀님을 추종하는…….”
“아니, 황후는 아마도 제레미를 내세우려 할 것이다.”
“네?! 그럼 황자파를 형성한단 말씀이십니까?”
우리 황자님은 백치 연기 중이라서 친한 귀족도 별로 없는데. 게다가 황태자 다음으로 가는 황위 계승자이긴 해도 아무도 그가 황제가 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제레미를 지지하는 파벌을 형성시킨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황후는 황제와 달리 정치에 능한 사람이다. 귀족들 대부분이 황태자파인 현시점에서 황녀파를 만들기에는 안심이 되지 않았겠지. 배신의 우려도 있고……. 황후는 우선 황자파를 만들어 황태자파와 철저히 대립을 시킨 후, 그중에서 자신의 사람을 고를 생각인 것이다.”
뭐? 그러니까 지금 황후 폐하가 우리 황자님을 이용하려 한다는 말이지, 이거?
“그,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당황해서 버벅대며 말하자, 아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분노에 넘실거리던 그의 표정도 한풀 꺾여 보였다.
“황자나 황녀를 죽여 황후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지.”
세상에……. 한풀 꺾였다는 건 취소다. 너무도 쉽게 혈육의 죽음을 논하는 아인의 모습이 마치 악마처럼 잔혹하게 보였다.
“그래도…… 되나요? 원래는 다른 계획이 있으시지 않으셨나요…….”
“원래는 널 그 아이 곁에 두어 감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일로 황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으니, 도리가 없구나.”
저렇게 죽이니 마니 하니까 애가 바보 연기를 하지! 황태자의 방식은 늘 잔혹하리만치 단순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가차 없이 제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원치 않아도 주변에 의해 늘 황태자의 견제대상이 되었을 제레미는 일찌감치 백기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백치가 되는 방식으로.
그 후 아인은 제레미에 대해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보 황자는 그의 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제레미를 죽이는 위험부담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후광을 비춰줄 재료로 삼아버렸다.
불세출의 천재라 일컬어지는 황태자와, 바보 황자 제레미. 그를 빛내줄 더 없는 조합이지 않은가.
적이 될 자라면 그 싹까지 모두 제거하자는 주의인 황태자에게서 제레미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죽여야겠어, 제레미를.”
하지만 지금의 아인은 제레미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잔잔한 금빛의 눈동자는 너무도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어서, 그가 제레미를 안 죽일 걸 알면서도 속으로는 조금 겁을 집어먹었다.
“명을…….”
나는 그의 명에 침착한 척을 가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수행하겠습니다.”
두근두근-.
무감정하게 말하긴 했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순종적으로 따르는 척해야 해. 내가 괜히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면 의심만 살 거야. 사실 미래를 알기에 대범하게 구는 거긴 하지만…….’
아인은 내 태도가 마음에 든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난 네가 좋아.”
그가 한쪽 턱을 괴고서는 눈을 접어 웃었다.
“내 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구나. 그리 들끓던 감정들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인이 편안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는 턱을 괴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려 내 입가를 살짝 쓰다듬었다.
“너의 그 담대함이 내 들끓는 감정을 다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이냐.”
“…….”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 감정을 다 빨아들일 테니, 제발 당신 동생은 좀 가만히 두란 말이야.
“힐. 마음이 차분해지니 이성이 돌아오는구나. 그래, 아직 황자를 죽이는 건 아닌 것 같아.”
아직이란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충견인 척 연기해야 내 보고를 믿어 줄 테니까.
“황자는 어떠해 보이더냐. 여전히 바보처럼 보이더냐?”
“예. 의심할 여지 없이 백치처럼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맹세의 키스를 할 때는……. 그래,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리 보이던데.”
역시나. 그 일을 문제 삼는구나. 나는 이를 대비해 준비했던 대사들을 꺼냈다.
“그건 키스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가 빙글빙글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은 미소였다. 아무래도 쐐기를 박아야겠단 생각에 뒷말을 덧붙였다.
“초야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하하. 그래서 네가 그 꼴로 오게 된 것이구나.”
아인이 내 드레스 자락에 시선을 두며 유쾌하게 웃음을 흘렸다.
‘휴……. 이렇게 오길 잘했네.’
이번엔 좀 믿는 눈치기에 속으로 살짝 안도하고 있던 차. 갑자기 아인이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책상 앞이었다.
“신부의 드레스엔 단추가 없어. 그래서 벗을 때는 반드시 가위로 잘라내야 하지.”
아인이 서랍 속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그러곤 내 뒤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원래라면 남편이 해야 할 일이지만.”
사각-.
등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내가 했다 해서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얇은 레이스 천은 가위가 닿는 순간 갈라져 옆으로 벌어졌다. 작게 드러난 피부 위로 아인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지나가고. 여린 피부에 닿은 낯선 손길에 나는 돌처럼 몸을 굳혔다.
“……!”
“저런. 그리 몸을 굳히니 내가 꼭 나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지 않으냐.”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를 달래듯, 그의 목소리는 여유롭고 부드러웠다. 반면 나는 맹수 앞에 던져진 초식동물처럼 온몸을 긴장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자르시려는 거지……?’
4-5cm 정도 잘라내는 짧은 작업이었지만 내 입장에선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지금 이 상황이 영 어색하게 느껴진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원래는 남편이 하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게 조금 더 큰 것 같았다.
‘자꾸 아인의 지금 행동이 남편이 드레스를 잘라주는 상황에 이입되는 것 같고…….’
적막한 공기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던 사이, 아인이 등 중간 부분에서 가위질을 멈추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구나.”
그의 말에 나는 빠르게 자세를 고쳐 드러난 등을 감췄다. 소매가 있는 디자인이라 그런가. 등이 반쯤 열렸는데도 드레스는 여전히 잘 밀착되어 있었다.
“옷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괜찮습니다. 이대로 뜀박질을 해도 문제없겠는데요?”
서 있던 자리에서 발을 몇 번 굴러보았다. 그러자 잘 밀착되어 있던 소매 한쪽이 내 믿음을 배신하고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크.”
“…….”
어색한 공기를 풀어보고자 한 행동이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더 얼어붙어 버렸다. 우뚝 멈춰 선 아인을 보며 나는 다급히 어깨 소매를 끌어올렸다.
“시녀에게 옷을 준비시킬 테니 기다리거라.”
어어, 그럼 여기 더 머물러야 하잖아? 지금 같아선 어서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렇게 가겠다고?”
아인의 시선이 내 옷자락을 느리게 훑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칫, 저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면서.
“음……. 옷이 바뀌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순간적으로 발휘한 기지였는데 제법 잘 먹혀든 것 같았다. 아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그럼 저는 황자님을 감시하러 다시 가보겠습니다.”
“……그래. 네가 좀 더 수고해줘야 할 것 같구나.”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내가 최고로 애정 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쯤이야. 하지만 문득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곁에는 출중한 그림자 기사들이 많은데, 하고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나를 그의 감시자로 보낸 것일까.
“궁금한 게 있는 눈친데.”
가만히 내 표정을 주시하고 있던 아인이 입을 열었다. 역시 귀신같은 남자야. 내가 궁금한 게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궁금한 게 있기는 합니다.”
“말해 보거라.”
“왜 제게 이 임무를 맡기신 겁니까?”
사실 그림자 기사기는 하지만, 나는 감시나 첩자 일보다는 폭력이 난무하는 실전에 강했다. 그건 아인도 잘 아는 사실이라, 이런 일에는 나를 잘 쓰지 않았는데 말이지.
“너는…….”
아인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내 턱을 받쳐 시선을 마주 보게 했다. 차분히 태동하는 바다 같은 시선이 나를 천천히 옭아맸다.
“너는 허술한 편이지. 종종 표정을 숨기지 못하니, 첩자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재목이고.”
윽.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확인사살을 받으니 속이 쓰렸다.
“그런데 왜 저를…….”
“너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거든. 황자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너를 선택했다.”
음. 주변에서 그런 말을 자주 듣긴 했지. 내 눈빛이 속마음을 털어놓게 한다나.
“만약 제레미가 진실로 백치 연기를 하는 중이라면, 나마저도 속인 그 철저한 가면이 네 앞에서는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아인은 예리한 사람이었다.
회귀 전, 제레미는 내 앞에서 연기가 흐트러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백치가 아님을 알고 있는 거고.
오, 소름 돋아. 황태자님이 적재적소에 사람 배치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허를 찔렸다는 표정인데.”
나는 곧바로 얼굴에 힘을 뺐다. 아인은 부하에게 작은 농담을 던지듯 나른한 태도를 보였으나 그 속에 숨겨진 건 물컹한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상대를 방심시키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지.
그래서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와 대화하는 걸 두려워했다. 언제 그에게 진심이 드러날지 모르니 바짝 긴장하게 된다고.
그 전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제레미에게로 돌아선 이후에는 그 뜻이 뭔지 잘 알 것 같았다. 방금도 내 얼굴 곳곳을 누비는 예리한 시선에 심장이 멎을 뻔했지 뭔가.
‘들킨 건 아니겠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묘한 긴장감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황태자님의 예리함에 조금 놀랐습니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허술함이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니까.”
휴, 넘어가는 건가? 살 떨려서 진짜. 매일 어떻게 또 이 짓을 해야 하나.
“그나저나 네가 임무에 토를 달 정도라니. 이번 임무가 그리 어려워 보이더냐.”
아인이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쓸었다. 말투는 곤란함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하지만 헤렌 축제에서의 ‘그 일’보다는 쉽지 않겠어?”
“…….”
헤렌 축제란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순간 눈앞에 그날의 폭발 장면이 그려지는 것 같아 현기증이 일었다. 3년 전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사건은 여전히 내게 지독한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눈치를 챈 것인지 아인이 내 어깨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별것 아니란다. 잠시 휴식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렴. 아름다운 옷과 보석을 몸에 두르고, 향긋한 차를 마시며 말이다.”
“……예.”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충성심을 확인하듯 직선으로 파고드는 한 쌍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