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신부가 가르쳐 줄래? (2/120)

2. 신부가 가르쳐 줄래?

* * *

‘왜 돌발 행동을 하셨지?’

제레미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신방.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나는 맹세의 키스를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 지난 생에서는 분명 키스가 뭐예요? 하고 말았는데. 이번엔 왜 내게 키스를 한 걸까? 심지어 첫 번째 생에서도, 두 번째 생에서도 나는 그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는 매일 한 침대에 누워 자면서도, 키스는커녕 필요한 때가 아니고서는 손도 잘 잡아본 적이 없는 순수한 사이였다. 그는 백치 연기에 충실했고, 나는 그를 감시하러 온 가짜 신부였으니까.

그런데 이번 생에선 회귀 첫날부터 다짜고짜 키스까지 하고 말았다.

‘완벽한 백치 연기를 위해서라면 맹세의 키스는 안 하는 게 나았는데.’

그렇다고 황자님께 백치 연기 제대로 안 합니까! 하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치 연기는 비밀이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제레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으아아. 모르겠다.’

고민하면 뭔가 떠오를 줄 알았는데, 머릿속만 더 복잡해진 것 같다. 그리고…… 키스, 키스 하니까 그 순간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칠 것 같았다.

‘자꾸 키스하던 순간이 떠오르니까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자, 정신 차리자, 힐레인. 지금은 황자님이 왜 키스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할 때야.’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다 우뚝 동작을 멈추었다. 문득 머릿속을 파고든 한 가지의 심각한 의문에.

‘근데 그건 키스였을까, 입맞춤이었을까……?’

결국 난 제레미의 계획이 뭘까 고민하다 말고, 딴 길로 새어버렸다.

‘으음,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으니까 키스라고 하기엔 좀 그런가. 또 해봐야…… 알겠는데? 흠흠.’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홀로 음흉한 생각에 잠기다 머리를 휙휙 저었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야? 지금은 위급 상황이라고. 만약 아인이 맹세의 키스를 하는 제레미를 보고 수상하게 여기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좀 이따 보고도 하러 가야 하는데.’

나는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황태자에게 보고를 올리러 가는 시각은 새벽 1시. 그때 나는 제레미의 일상이나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해 보고하는데, 이때 거짓에 사실을 적절히 잘 섞어서 그를 속여야 했다.

‘3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3시간은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인을 속이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예리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그가 질문할 것 같은 내용을 미리 생각해놓고 가는 건 필수였다.

‘근데 뭐라고 하지? 일단 그 키스 때를 해명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으음…… 제 모습이 너무 예뻐 황자님이 넋이 나간 모양입니다. 백치여도 예쁜 건 다 안다고요……?’

나는 거울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거울엔 칙칙한 검은 머리카락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아아……. 그건 양심이 아파서 안 되겠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첫 번째 계획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그럼 뭐라고 하지. 으음…… 그건 키스도 뭣도 아니었습니다. 백치가 키스라뇨, 하핫.”

침대에 앉아 홀로 이것저것 작전을 짜고 있던 그때였다.

“나랑 한 건 키스도 뭣도 아니었다고……?”

“화…… 황자님!”

언제 들어온 거지? 문 앞에는 상처받은 표정의 제레미가 서 있었다. 그의 촉촉해진 연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며 아련한 빛을 머금었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제레미가 다가온 줄도 몰랐네. 게다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나간 모양인데…….

“백치는 맞지만, 그래도…… 맹세의 키스는 아는데.”

제레미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상처받은 작은 동물 같은 표정, 축 처진 어깨를 보며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지금 키스도 모른다는 말에 시무룩해진 거야? 크윽. 귀여워도 너무 귀엽잖아?’

누군가 내 머릿속을 읽을 수 있다면, 덕후도 저런 덕후가 없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뭐…… 손가락질받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나는 보통 덕후가 아닌 아주 심각한 제레미 덕후였으니까.

“신부야……. 지금 표정…… 조금 무서워.”

“어…… 네? 제가 방금 무슨 표정을 지었죠? 하하…….”

이런.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 황자님은 내 혼잣말을 어디까지 들으신 거지? 나도 참 바보같이. 제레미가 온 줄도 모르고 보고사항을 주절거리고 있었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뒤늦게 험악한 표정으로 바꿔보았지만…… 제레미의 반응을 보니 이 표정도 아닌 모양이었다.

“제레미가 잘못한 거야?”

홀로 자책을 하고 있던 사이, 제레미가 예쁜 얼굴에 눈물을 매단 채 내게 물었다.

그리고 나는 제레미의 눈물에 심장이 벌렁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제레미의 우는 얼굴은 너무 강력했으니까.

단언컨대 우리 황자님은 세상에서 가장 예쁘게 우는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우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냐면…… 연기인 줄 알면서도 더욱더 울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랄까.

“신부야. 혹시 내 입맞춤이 마음에 안 들었어……?”

제레미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내 눈치를 살폈다. 그의 귀여운 자태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고민들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제레미를 좀 더 울려보겠다는 내 흑심이었다.

“흠흠. 조금요?”

내 말에 제레미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상황이 심각한 것도 잊은 채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정말? ……미안해, 신부야.”

제레미가 울먹거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살짝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자 제레미가 다소곳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러곤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군 채, 나를 바라보는데…… 입을 삐죽이 내민 게 꼭 아기 새 같단 말이지.

“괜찮아요, 못 할 수도 있죠, 뭐.”

고개를 땅에 떨군 채 침울한 표정을 짓자, 제레미가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아까 그건 키스도 뭣도 아니라고 그런 거였구나…….”

제레미가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려 내 쪽으로 슬쩍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지 손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시무룩해진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제레미는 그런 내게 약간의 원망을 담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나를 놀리는 것 같아. 제레미 조금 슬퍼지려 그래.”

오, 이런. 놀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건데. 내가 좀 심했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키스도 뭣도 아니라고 한 건 죄송했어요.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달라서.”

음. 굳이 말하자면 아까 그건 맹세의 입맞춤? 번개 뽀뽀? 라고 할 수 있지.

“그럼 신부가 가르쳐주는 건 어때?”

설마 가르쳐달라고 말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그의 말에 살짝 당황해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그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몄다.

“응?”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재촉했다. 당황한 내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게 아닌데.’

제레미의 귀여운 모습을 보기 위해 시작한 장난인데 오히려 그가 쳐놓은 덫에 걸려든 기분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키스는…….”

잠시만. 나도 안 해봤는데. 뭐라고 설명하지? 18살까지는 그림자 기사로, 그 이후엔 가짜 신부로 살아온 내겐, 키스니 뭐니 그런 건 미지의 세계였다.

“그건 우선…… 입을 맞추고 말이죠……?”

그냥 대충 책 속에서 봤던 내용을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응. 이렇게?”

그런데 갑자기 제레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와 인형 같은 속눈썹.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매혹적이었다.

쪽-.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 위로 살며시 포개졌다. 너무 놀라 멍하니 굳어 있자, 제레미가 살짝 입술을 뗐다. 1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는?”

제레미가 풍성한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물었다. 반쯤 감긴 두 눈동자에서 묘한 색기가 흘렀다.

“…….”

백치미 섞인 순진한 유혹에 나는 두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게.”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리고 있자, 제레미가 야살스럽게 웃었다. 어쩐지 나를 놀리는 듯한 미소였다.

“제레미가 제대로 했어?”

“네…….”

내 목소리가 작아지는 게 재밌는지 제레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신부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어.”

그가 내 볼을 손으로 살며시 쓸고는 말랑한 볼살을 조물거렸다.

‘아아, 졌다. 졌어!’

나는 백기를 꺼내 들었다. 제레미를 놀려주려 했다가 오히려 된통 놀림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이게 다 저 색기 때문이야.’

제레미의 여우 같은 미소를 째려보다,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이러다간 얼굴이 뜨거워지다 못해 김이 날 지경이라,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신부도, 잘 자.”

내 맥락 없는 인사에도 제레미는 예쁜 목소리로 화답했다.

나는 ‘네’라고 작게 대답한 후 바로 잠에 곯아떨어진 척했다. 입맞춤 후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비록 웨딩드레스가 온몸을 짓누르고, 머리 장식과 티아라가 머리를 콕콕 찌르고 있긴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 * *

‘보고하러 가야 해.’

결국 뜬 눈으로 두 시간 반을 지새웠다. 정수리를 찔러대는 머리 장식 때문에 잠은커녕 편하게 누워 있지도 못했다.

‘황자님은 주무시나?’

살짝 뒤를 돌아보자, 잠이 든 제레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혹시 깰지도 모르니 ‘수면향’을 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면향은 옆에서 누가 건드려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향초였다.

나는 향을 맡지 않기 위해 코를 막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창문 앞에 섰다.

‘기사복을 미처 준비 못 했는데…… 드레스 차림으로 가도 괜찮겠지?’

잠시 멈춰 서서 주군께 보고하러 가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하얀 웨딩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어둠 속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미친 여자로 보이지 않을까? 으음, 어떤 상황을 갖다 댄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것 같은데.’

누구 하나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있다면 놀라 자빠질 것 같았다. ……이건 뭐 유령 신부도 아니고.

‘그럼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

마침 탁자 위로 시녀들이 준비해놓고 간 잠옷이 보였다. 조심스레 탁자로 다가가 잠옷을 들어 올렸는데…… 세상에 이 레이스 좀 봐. 이게 잠옷이라고?

잠옷은 실크로 된 원피스였는데, 레이스로 인해 노출과 장식이 무척 많았다. 가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드레스보다는 움직이기 쉬우려나.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주섬주섬 잠옷을 챙겨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난관이 있었다.

‘드레스는 어떻게 벗는 거야? 아무리 찾아봐도 옷을 벗을 수 있는 단추가 없잖아?’

아, 그러고 보니. 회귀 전 결혼식 때도 드레스를 벗지 못해 곤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랫단을 대충 찢어버리고 보고를 하러 갔었는데…… 그때 상당히 추웠었다. 겨울밤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나갔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추운 거 너무 싫은데. 그냥…… 이 차림 그대로 갈까?’

결국 나는 드레스를 벗는 걸 포기한 채 창틀 위로 올라섰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도 있었다. 왜냐면 기척을 숨기는 건 내 특기였으니까. 이보다 더한 옷차림으로 활보한다 해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창문에서 도약하기 전, 치렁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힘껏 말아 쥐었다.

그림자 기사.

황실에 은밀히 소속된 이 직책의 본명은 기밀호위기사로, ‘그림자 기사’는 주군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이유에서 붙여진 별칭이었다.

일반 호위기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군이 밝은 곳에서 빛과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어둠을 뒷받침해주는 것.

즉, 주군을 대신하여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을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림자 기사는 하는 일이 험해 일찍 목숨을 잃는 자들이 많았다. 반면 여러 임무에서 살아남아 주군의 곁을 지킨 자들은 주군에게 이름으로 불렸다.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는 거였다.

“힐.”

고아한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 아인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나를 ‘힐’이라고 불렀다.

“예.”

나는 어둠 속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어둠과 대비되는 새하얀 드레스 차림에 아인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꼴로 온 것이냐, 힐?”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기울이며 그가 키득 하고 웃었다. 잔에서 입술을 떼자, 핏빛의 와인이 그의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취기에 열이 올라 갑갑한 것인지 셔츠는 반쯤 풀어헤친 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