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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번째 결혼식 (1/120)

1. 3번째 결혼식

“헉, 허억.”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끈적하고 뜨거운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 그것도 아주 흥건하게.

‘이거…… 즉사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보며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처음 겪어보는 일도 아닌데. 죽음은 늘 정신을 빼놓을 정도의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나 또…… 죽는 거야……?’

나는 21살에 생을 마감하고, 20살로 회귀했었다. 이번엔 죽지 말고 더 살라는 하늘의 뜻인가 싶었는데. 웬걸. 죽음은 1년 만에 나를 다시 찾아왔다. 마치 누군가 ‘너는 반드시 이날 죽어야 해.’라고 결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꽃다운 나이에 두 번이나 생을 마감한다는 게 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자객들을 막아냈다는 것.

나는 내 앞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 주군이자 제국의 황태자, 아인이 보낸 자객들이었다. 운이 없게도 나와 마주치는 바람에 황천길을 걷게 되었지만.

딱히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 자객 10명의 목숨보다도 나는…… 우리 황자님. 제레미의 목숨이 더 귀중하니까.

“황자님…….”

제레미를 생각하자 갑자기 그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죽기 전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볼 수 없을까.’

그런데 그때, 나지막한 내 소원에 응답하듯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레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나를 강하게 만류하는 목소리가.

“……제레미.”

그는 내 남편이자, 제국의 황자. 제레미 엘키시에스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제레미가 무릎을 꿇은 채 축 늘어진 내 몸을 제 품에 끌어당겼다. 그러자 별처럼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나는 그 모습이 달의 이면처럼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상처가…….”

상처를 지혈하던 제레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목소리는 침전하는 난파선처럼 위태롭고, 또 절망적이었다.

“지금 마법을 걸어줄게. 제발, 조금만 더 견뎌줘.”

그가 다급히 치료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이 예정된 탓인지, 치료마법은 전혀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욱. 쿨럭.”

나는 다시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그러자 제레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하얀 피부. 유려한 선을 이루는 턱선. 청초한 연보랏빛을 머금은 유혹적인 눈매. 과연 제국 최고의 미남답게 그는 인상을 찌푸려도 아름다웠다.

“어째서. 어째서 마법이 듣지 않는 거야.”

제레미의 손에서는 다량의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보이지 않는 막을 두른 것처럼 모든 마나를 튕겨냈다.

“쿨럭. 그, 그만하세요.”

나는 그의 손등에 내 손을 겹쳤다. 치료마법이 듣지 않는 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했다.

“저는 이미 틀렸어요. 그러니 황자님이라도 어서…… 여길 떠나세요. 황태자가…… 황자님을 죽이러, 쿨럭! 올 거예요.”

“……말하지 마. 더 이상.”

이미 틀렸다는 내 말에 제레미가 입술을 꾹 물었다.

‘피를 흘린 건 난데. 왜 나보다도 그가 더 아파 보이는 거지?’

왜 그가 더 죽을 것같이 보일까.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조차도 내가 다시 회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거든.

“세 번째가 있을까.”

나는 그가 이해할 수 없을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를 텐데도, 그는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서 맑고 투명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울어요?”

물기 어린 연보랏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울어요……? 내가 뭐라고.”

나는 황태자의 명으로 그에게 접근한 첩자일 뿐인데. 중간에 마음을 바꾸긴 했어도, 어쨌든 처음엔 그를 감시하기 위해 결혼한 것뿐인데.

“……그런 말 하지 마. 이미 충분히…… 내 심장을 갈라놓고 있으니.”

그런 나인데도, 제레미는 너무도 소중하다는 듯 나를 끌어안았다.

“하아.”

그러는 사이 죽음은 내 곁으로 훌쩍 다가와 있었다. 그의 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그를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바닥을 보인 초가 곧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스러질 테지.

“……후회해.”

“…….”

뺨 위로 닿는 뜨거운 눈물방울을 느끼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네게 지금껏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걸, 후회해.”

나는 그가 무엇을 후회하는지는 결국 듣지 못했다. 그저 너무 졸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 *

“흐읍.”

나는 물속에서 방금 건져진 사람처럼, 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방금 전 겨우 마지막 숨을 토해냈는데, 몇 초 사이 다시 숨이 이어졌다. 아니, 이어진 건 아닌가? 두 번째 생을 마감하고, 3회차 인생이 새로 시작되었으니.

‘또…… 회귀했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꽃이 만개한 결혼식장. 꽃잎을 수천 장 붙여 만든 것 같은 웨딩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내 결혼식 날로.’

익숙한 광경. 나는 결혼식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신부야?”

듣기 좋은 저음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제레미가 있었다.

“……황자님!”

밝은 일광 아래, 쉴 새 없이 빛나고 있는 제레미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보랏빛의 눈동자도.

‘너무 좋아. 완전 좋아. 죽어도 좋아!’

방금 죽다 살아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서 죽을 것 같은 걸 어떡해?

한 떨기 물망초 같은 눈빛은 황홀해 죽을 것 같았고, 별빛 같은 은발은 눈부셔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저 색기 어린 도톰한 입술을 보라!

하마터면 지금 내 상황도 잊고 그를 꽉 끌어안을 뻔했지 뭔가. 하지만 그랬다면 회귀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황태자, 아인의 명을 받고 제레미의 신부로 온.

가짜 신부니까.

내가 아인으로부터 받은 밀명은 이랬다.

[제레미가 정말로 백치인지, 혹은 백치인 척 연기하는 것인지 알아내라.]

아인은 제레미를 의심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가 백치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를 가짜 황자비로 위장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첩자의 본분을 잊고, 제레미에게 매료되어버렸단 점이었다.

목표물에 매료된다는 것. 그것은 첩자에게 있어 아주 심각한 실책이었지만, 나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제레미는 가까이서 보면 누구든 매료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매일매일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도 매료되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해! 아마 단 한 명도 없을걸? 나도 처음엔 그에게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었다고.’

제레미에 대한 덕질 기미가 보이던 처음, 나는 일부러 더 열심히 아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목표물에게 호감을 품다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첩자로서 큰 중죄를 저지른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치밀하게 제레미를 감시하고, 그의 수상한 점을 아인에게 보고했었다.

그렇게 오기에 휩싸여 광적인 보고를 이어가던 어느 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제레미가 백치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백치는 무슨. 오히려 그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10수, 20수 앞을 내다보는 굉장한 계략남. 신의 권능을 넘볼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 그것이 바로 제레미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백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건, 모두 연기였던 것이었다.

아인의 그림자 기사인 나는 그 사실을 주군에게 바로 알려야 했다. 그게 내 임무였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러기 싫었다. 아인에게 광적인 보고를 올릴 땐 언제고…… 직접적인 증거를 잡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이 보고를 올리면 제레미는 죽을 게 분명하니까.

안 되지, 그건 절대 안 돼. 제레미가 죽는다는 상상만 해도 이렇게 눈물이 고이는데.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난 못 해. 절대로 못 한다고.

실로 오랜만에 눈물이라는 걸 흘렸던 그 날. 나는 제레미를 향한 내 사랑을 인정했다.

내가 품은 사랑의 감정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래, 덕심 같은 것이었다. 지켜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고, 옆에서 보기만 해도 귀여워 미칠 것 같고, 웃는 걸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정.

그 후, 나는 겉으론 아인을 따르는 척하며, 제레미의 백치 연기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일 년 후. 모든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인은 내게 제레미를 죽이라 명하게 된다. 명령 불이행은 곧 죽음. 내 안에 걸린 마법이 나를 집어삼킬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 손으로 어떻게 제레미를 죽인단 말이야.

첫 번째 생에서 결국 나는 죽음을 택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웬걸. 나는 제레미와 결혼하던 1년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번째 생에서도 나는 제레미를 무서운 형아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백치가 아닌 걸 들키지 않도록 옆에서 연기를 도왔고, 황태자에게 꼬박꼬박 거짓 보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불면 날아갈세라, 제레미를 지켜왔던 어느 날이었다. 내 허술한 거짓 보고에 눈치라도 챈 것일까? 아인 쪽에서 제레미에게 자객을 보내왔다. 내게 일말의 언질도 없이.

그게 방금 전 일어난 일이었다.

우연히 자객의 행보를 알게 되어 미리 막기는 했지만, 결국 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두 번째 삶이 끝나버렸다. 허무하게.

혹시나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걸었는데, 눈을 떠보니 나는 인생 3회차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왜 또 회귀했지?’

이유를 모르니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들떴다. 어찌 되었든 내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황자님을 지켜줄 기회가.

‘그나저나 이 예쁜 황자님을 이번 생에서는 어떻게 지켜야 하나.’

세 번째니까, 이번엔 좀 다른 결말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긴 한데. 두 번째 생에선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미래를 이번에는 제대로 활용해볼 생각이니까.

‘이번 생에선 꼭 지켜드릴게요, 황자님.’

나는 옆에서 마냥 웃고 있는 제레미를 보며 결의를 다졌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차. 어느새 결혼식이 막바지에 닿아 있었다.

“오늘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평생을 사랑하고 아끼겠다는 의미로 맹세의 키스를.”

맹세의 키스? 벌써 그 단계인가. 나는 별생각 없이 제레미 쪽을 향해 섰다.

‘최애’를 둔 덕후들이 본다면 지금 내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최애의 키스를 받는 순간인데도 이렇게나 평정심을 잘 유지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 테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 평온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제레미는 내게 키스하지 않을 테니까.’

과거에 결혼식을 두 번 해본 나는 맹세의 키스 따윈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치를 연기하고 있는 제레미가 맹세의 키스를 할 리가 있나.’

과거에 그는 ‘키스가 뭐예요?’ 하고 깜찍하게 고개를 갸웃거렸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해프닝이 일단락됐었다. 첫 번째 결혼식 때도, 두 번째 결혼식 때도.

‘세 번째라고 다르랴. 이번에도 그러고 말겠지. 으음, 그러고 보니 생각나네. 첫 결혼식 때는 내가 면사포를 걷고 키스라도 해야 하나 어쩌나 얼마나 긴장을 했었다고.’

솔직히 두 번째 결혼식 때도 조금 기대를 걸어보긴 했었다. 혹시나 이변이 일어났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는 두 번째 결혼식 때도 첫 번째 결혼식 때처럼 맹세의 키스를 건너뛰었었다.

‘자, 이번에도 건너뛸 거죠? 저 이제 기대 안 하니까 어서 말해요. 키스가 뭐냐고.’

나는 봤던 연극을 다시 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제레미의 대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3회차 인생의 그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연보랏빛의 매혹적인 눈동자에 백치미 외의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뭐라고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색기?

“황자님?”

그런 모습이 낯설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그러자 내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

그의 미소에 멍해져 있던 사이, 제레미가 한 걸음 크게 다가와 나와의 간격을 좁혔다. 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먹이를 탐색하듯, 가만히 내 입술을 내려다봤다. 그러곤 부드럽게 나를 끌어당겨 한 손으로 허리를 감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회귀 전엔 이런 적이 없었잖아요, 황자님?’

그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내가 알던 것과는 달라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했던 것도 잠시. 나는 제레미의 색기 흐르는 입술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너, 너무 예, 예쁘잖아.’

멍하니 그의 입술을 바라보던 그 순간, 제레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읍?”

첫 번째 생에도, 두 번째 생에도 없었던 맹세의 키스였다. 모든 게 내가 아는 대로 굴러갈 거라 자만한 지 3초 만에,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 버렸다.

“……!”

예상과 벗어난 위급 상황임에도, 머리가 잘 굴러가지를 않았다. 생각이란 걸 이어나갈 수 없게 만드는 부드러운 감촉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숨 쉬어, 신부야.”

“…….”

영겁같이 느껴지던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고개를 든 제레미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여우처럼 접힌 눈매가 야살스러워 보였다.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어리둥절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번 생에선 백치 연기 안 해?’

내 안의 절규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를 들었을 리 없는 제레미는 내 속도 모르고 예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쩐지 네 번째 결혼식이 예정된 것만 같아 식은땀이 흐른다.

‘나, 이번 생에선 이 남자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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