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42화 (142/142)

<-- 재회와 작별 -->                아주 오랫동안 검은 어둠으로 덮여있던 세상에 희미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세상 분간이 되지 않고, 여전히 사물의 경계는 흐릿했다. 온통 안개로 뿌옇게 쌓인 듯해서 에스트레드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을 몇번 깜박였다. 그의 은청색 눈동자는 아직 구름이 낀 듯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시야보다 촉감이 먼저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황자가 느낀 것은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따뜻한 손과, 배 위에 반쯤 걸쳐져 있는 제법 묵직한 무게였다. 그는 손을 움직여보려고 힘을 주었다. 여전히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이 움찔 하면서 떨렸다. 조금만 더. 마치 가위라도 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황자는 침착하게 전신의 근육에 힘을 적절히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가 돌아왔다. 계속해서 무저갱의 어둠 속에 갇혀서, 은발의 남자는 무한대의 공간을 떠다녔다. 간신히 돌아온 세상이었다. 급할 것은 없지만 동시에 마음이 그리 편하지만도 않았다. 황자는 힘겹게 손가락 끝을 떨면서 손등을 침대에서 띄우는 데 성공했다.

“...아?”

그의 흐릿한 시야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의 체온이 갑자기 에스트레드의 손을 꽉 잡아왔다. 그의 손보다 조금 더 작고 따스한 손. 제대로 기능하는 청각 속으로 맑고 쨍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람과 기쁨을 담은 목소리였다.

“...아버지? 일어난 거에요, 아버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세리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눈가를 찌푸렸다. 소녀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들여다 보았다. 황자의 얼음처럼 맑은 은청색 눈동자가, 자신과 꼭 닮은 또 한쌍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너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뻑뻑해진 성대를 비집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간신히 돌아온 시야에 나타난 것은, 풍성한 백금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은청색 눈동자의 소녀. 그녀의 뒤로 의료용 챔버의 불빛이 상아색으로 부서졌다. 무지개같은 반사광에 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세상에, 아버지. 정말 나하고 똑같은 눈이네요. 엄마 말이 진짜였어!”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에스트레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제서야 황자는 알 수 있었다. 보석처럼 모든 빛을 부서뜨리는 화려한 백금발을 지닌 눈앞의 소녀. 대리석 같은 상아색 피부와 이목구비는 완벽하게 세리나를 닮았고, 얼음 같은 은청색 눈동자는 자신의 것과 똑같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힘은 여지없이 로마나 황실 정통의 가장 강한 정수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흥분해서인지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흘리고 있었고 에스트레드는 그 힘 또한 자신의 힘과 거의 비슷한 속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에스트레드는 확신했다. 마치 태양과 달의 딸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플라티나.”

“아버지!”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딸, 이제 열살이 된 플라티나 로마나는 기쁨의 환성을 지르면서 아버지의 가슴을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야!”

의료용 챔버에서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감지한 경고를 듣고 세리나가 달려내려왔다. 기사 차림에 한손에 정무를 보기 위한 보고서 뭉치를 쥔 채로 지하로 달려내려왔던 황자비는, 챔버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녹색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가 없었다. 십년을 잠들어 있던 남자가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맑고 투명한 얼굴은 마치 어제 잠들었던 것 같았다.

“오랜만이야, 세리나.”

에스트레드가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려고 하는 그의 움직임을 깨닫고 플라티나가 얼른 아버지를 도와 일으켜주었다. 그는 굳었던 근육이 움직이며 삐그덕거리는 것에 인상을 쓰다가, 곧 세리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세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걸어왔다. 눈 앞의 광경을 믿지 못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녀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천천히 습기가 올라왔다. 에스트레드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버지가 깨어났어요.”

플라티나가 천진하게 기뻐했다. 세리나는 순간 무너지듯 침대 위에 앉았다. 마치 그의 수호기사로 재직하던 그 때처럼 말끔하게 틀어올린 황금색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고, 에스트레드가 웃었다.

“웃어주지 않겠어? 간만에 보는 거잖아.”

“세상에.”

세리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그마치 십년을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 일어날 거라고 되뇌이며 걸어온 세월이 무색하게, 남편의 손이 아내의 손을 감싸쥐었다. 아직 차가운 채인 그의 손은 여전히 강건하고 남자다웠다. 그의 손의 감촉. 느껴본 지 지독하게 오래된 그 손이 자신의 손 전체에 느껴지자 황자비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흰 볼 양 위로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에 에스트레드가 아내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 늦었군. 미안하다.”

“...늦은 걸 알긴 아시는군요.”

세리나는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기쁘면서도 슬펐다. 십여년간의 세월이 전부 한순간에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황자비는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강인한 어머니가 우는 걸 처음 본 딸 플라티나는 놀라서 은청색 눈동자를 깜박였다. 세리나의 날씬한 어깨가 조용히 들썩였고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도닥여 주었다.

*****

“플라티나는 정말...빠르게 자랐군.”

식사는 유동식으로 준비되었다. 의료용 챔버 안에 있어 신체의 기능 상에는 문제가 없다는 에스트레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세리나는 반론을 허락하지 않고 부드러운 스프와 크림을 준비시켰다. 식당이 아닌 2층의 부부 침실로 올라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에 손을 대면서 에스트레드는 딸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이 잠든 지 십년, 겨우 열살이지만 신체적인 상태는 열일곱이에요. 대신관께서 이렇게나 빠른 성장 속도는 처음 본다고 하셨죠. 이미 여덟살에 지금 발육 상태에 다다랐으니까.”

“그래. 나보다도 빠르군. 세상에.”

일반인의 두배가 넘는 속도로 자라난 플라티나는 세리나의 곁에서 그녀의 정무를 도운 지 벌써 이년이 되어갔다. 애초에 일반 인간이 아니어서 가능한 속도였다. 황실에서도 역사상 가장 강한 자 중 한명이었던 에스트레드 로마나와 대륙을 통틀어 몇명 되지 않는 소드마스터 세리나 리엔의 아이. 신체나이 열일곱이 가장 기능이 최대로 발휘될 때였고 이 신체나이는 아마도 앞으로 수십년 간 유지될 것이다. 그게 로마나 황실 혈통의 매우 편리한 점 중 하나였다.

에스트레드는 부드럽게 식혀진 스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감싼 의료용 챔버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의 신체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뻑뻑하고 힘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느끼면서 그는 천천히 스프를 삼켰다. 목구멍 안으로 부드럽게 유동식이 내려갔다.

“호보프는 어때? 거의 기절 직전이었는데.”

“기절했어요. 당신 앞에선 버티다가 결국 방에서 나가자마자 드러누웠어요. 나이가 나이니만큼 이제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호보프는 그 사이에 십년의 나이를 먹었다. 소드마스터로서 육체의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세리나와는 달리 평범한 인간인 호보프와 시녀 안나는 세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희끗했던 머리의 호보프는 아예 반백이 되었고 안나는 품위 있는 중년 초입의 부인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에스트레드가 깨어나자 울면서 그의 손을 붙들고 놓지 못했다.

“세월이 많이 지났군.”

“많이 지났죠. 혈통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나이를 먹었어요. 당신이 그렇게나 오래 자고 있었으니까요.”

세리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자기 전과 달라진 것. 에스트레드는 또 하나를 눈치 챘다. 세리나에게는 관록이 붙어서 이제 이 황궁의 주인으로써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스트레드 자신에게도 훨씬 대담하고 자유롭게 대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세리나 리엔의 정식 직함은 황제 직무 대행 제1 황자비. 공식적으로 플라티나가 제위를 이어받을 황녀로 계승서열은 높았으나 사실상 황실에서 세리나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은 없었다. 에스트레드는 부부 침실 한켠에마저 엄청나게 쌓인 서류더미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골치 아플 만큼 엄청난 일거리였다.

“저걸 다 처리해야하는 건가?”

“맞아요. 골 때리죠. 이제 골때리는 건 내가 아닌 당신이 되겠지만.”

세리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에스트레드가 눈을 감은 지 십년, 그 세월 동안 철혈의 황자비라 불리며 강성으로 제국을 통치했지만 좋아서 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권력형 인간이 아니었고 아이와 남편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에스트레드가 눈을 뜬 이상 그녀가 저 일에 다시 손을 대야할 필요는 없었다. 전부 떠넘겨줄 생각이었다.

“아마도 귀족 회의가 소집될 거에요. 사실 지금도 알현 요청이 들어왔지만 당신이 회복되어야 하니까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어요. 재상이 시끄럽긴 하지만 당신이 괜찮다고 하는 날에 소집하죠.”

“귀족들 다루는 것도 굉장히 능숙해졌군.”

“누구씨가 늦잠을 자서 그랬죠.”

“그건 미안해.”

에스트레드는 웃음 반 진심 반을 담아 말했다. 세리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다시 한번 습기가 어린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일어서서 세리나가 앉아있는 침대로 다가가 곁에 앉았다.

“재상 따위 좀 기다리라고 해, 내가 싫으면 귀족 회의 같은 건 소집하지 않을 거야.”

“저런. 그렇게 말하면 안되잖아요. 곧 정무를 맡아 보셔야할 분이.”

어른이 부드럽게 말하는 듯한 어조에 황자는 입을 삐죽였다.

“...자고 일어나니까 당신 뭔가...선생님 같아졌어.”

“당연하죠. 쿨쿨 잠이나 자는 남편 대신, 십년 동안 집안을 뼈빠지게 지켜 왔으니까요. 안 그래요?”

십년 동안 세리나 리엔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피에 젖은 보석, 붉은 에메랄드. 딸과 남편을 지키면서 황자비는 철혈의 별명을 얻었다. 빠르게 성장한 딸이 이미 8살에 그녀의 곁에 서서 도와주었지만 모든 일은 어디까지나 세리나 리엔의 몫이었다. 제국과 황권에 해가 되는 자들의 목을 베는 것도,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는 이방인들을 물리치는 것도. 이제 제국민들은 그 누구보다 철혈의 황자비 세리나 리엔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많은 피가 묻었다. 수많은 고민과 결정들. 겉모습은 이전과 똑같이 아름다운 금발을 지닌 미인일지라도, 속은 결코 십년 전 에스트레드가 알던 사람과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와 상관없이 세리나를 사랑했고 세리나는 그런 그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남자는 입을 삐죽이다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달콤한 체취가 한가득 그의 코 안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백합 같은 향이다. 자는 동안에도 잊은 적 없는 향이었다. 에스트레드의 후각은 이제 세리나의 체향에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누워서 얕은 무의식의 세계를 헤메는 동안, 황자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 아내의 향기만을 붙잡고 떠다녔다. 맑고 청량하지만 에스트레드에게는 그 누구보다 따뜻한 페로몬.

세리나의 희고 길쭉한 손이 남편의 은청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명주실처럼 윤기나고 차르르하게 떨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은 긴 잠에도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비단처럼 매끈한 느낌을 즐기면서 아내는 남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치 아이에게 하는 것 같군.”

에스트레드는 조금 심술맞게 투덜거렸다. 세리나가 맑게 웃었다. 이럴 때의 황자는 정말 소년 같았다. 서로 처음 얼굴을 마주보고 운명을 깨달았던, 그 때의 그 천사 같았던 소년.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내가 매일 아침 이마에 키스해줬던 건 모르나 보네요.”

잠들어 있었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황자비는 남편을 놀렸다.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내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알아.”

“...안다구요?”

“그래. 알아.”

황자는 아내의 동그랗고 모양 좋은 가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대리석 같은 그녀의 피부가 매끄러웠다.

“내가 차갑고 깊은 어둠 속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시간이 지나는 걸 아는 건 그때 뿐이었어. 당신이 키스해주던 그 순간.”

“...아.”

“한번의 입맞춤이 지나면 아 또 시간이 지나갔구나, 또 한번이 지나면 또다시 시간이 흘렀구나. 하지만 그 키스의 순간 만큼은 놓치지 않았어. 그 시커먼 어둠이…”

황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발목을 놓지 않던 그 질기고 끈적한 암흑을 기억해냈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 순간에는 모두 물러났어. 나는 온통 빛으로 감싸일 수 있었어. 당신이 입맞춤을 해주는 그 시간 만큼은.”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들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늦은 아침 햇살 속, 세리나의 녹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부풀어 올랐다. 습기를 머금은 그 눈에 황자는 조심히 그녀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둘의 입술은 벌어진 채로 서로의 호흡만을 나눴다. 따스하고 규칙적이다. 서로가 살아있다는 증거.

달콤한 향기가 공기를 떠돌았다. 에스트레드는 아내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완전히 몸을 올렸다. 아직 회복이 완전치 않아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만지면서 황자는 대리석같은 아내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성애와 존경과 사랑이 함께 뒤섞여 소용돌이 쳤다.

무리를 하면 안될 것 같은데 에스트레드는 자꾸 무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 만류하는 아내를 다독이면서 속삭였다.

“플라티나는 어디 갔지?”

“음...당신 무리하면 안되니까 이 손 떼세요. 그 앤 지금 승마 연습하러 수도 방위군 쪽으로 뛰어나갔어요. 하루도 안뛰는 날 없는 망아지 같은 애니까...아!”

“그럼 됐네. 어린 딸은 놀러 나갔고 그런 날 오랜만에 만난 부부가 할 일은 하나지.”

에스트레드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세리나의 다물려진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세리나가 깜짝 놀라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직 힘이 없는 남편이 약간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자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했다. 그 사이를 틈타 에스트레드가 세리나의 몸에 완전히 밀착했다.

“걱정하지마, 나도 무리는 안해. 할 수도 없고.”

남편이 큭큭대면서 아내의 기사 정장의 단추를 풀어내렸다.

“세상에, 부부 침실에 있으면서 이렇게 껴입고 있기 있는 거야?”

그녀는 완벽하게 속옷과 셔츠, 정장과 그 위에 휘장까지 두르고 있었다.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스트레드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세리나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하지만...당신이 없을 때는 밤이건 새벽이건, 내가 침실에 있건 상관 없이 위급 상황에는 뛰어 나가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감히 누가 천하의 황제 직무 대행에게 밤에 뛰어나오게 만들었어?”

“여러가지 일이 있었죠. 반란군이 목전까지 쳐들어 오기도 하고 귀족들이 반기를 들기도 하고…”

속에서 순간 열불이 치밀었지만 에스트레드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귀족 회의를 소집한 이후에 화를 풀만한 인물을 색출해서 매달아버려도 상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내의 옷을 벗기는 데 집중했다.

휘장과 정장 재킷과 셔츠가 전부 풀어져 침대 밖으로 던져졌다. 완전히 갖춰입은 부츠와 승마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허리띠가 짤그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속옷 한겹 만을 입은 아내를 끌어안고 에스트레드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내가 꿈 속을 헤메면서도 이 모습은 잊지 않았어. 이 향기하고.”

세리나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 역시 마주 그에게 입을 맞췄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마치 처음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후각 깊숙히, 남자의 체향이 훅 번져 들어왔다. 자는 동안 거의 사라진 것 같았던 에스트레드의 묵직하고 날카로운 향기. 그것만으로도 아내의 아랫배가 찌릿하며 반응했다. 세리나는 황자의 목에 팔을 감고, 그가 원하는 대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렸다.

속옷 한겹 천 위로 남자는 아내의 부드러운 가슴을 애무했다. 동시에 남자의 손가락은 아내의 둔덕을 미끄러져 내려가 천천히 더듬었다. 깊은 수풀 속 숨겨진 은밀한 틈이 부끄럽게 그의 손가락 아래로 모습을 나타냈다.

“으응…”

세리나가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시트에 묻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남편의 몸에 이미 아내의 입구는 충분히 젖어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그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으면서 에스트레드는 십여년만에 느끼는 그 좁고 타이트한 내벽의 감각에 속으로 전율을 느꼈다. 여전히 매끄럽고 좁았지만 남편의 침입을 환영하면서 아내의 몸이 수줍게 열렸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내벽을 마사지했다.

“당, 당신 무리하면...안되는데…”

세리나가 퍼뜩 정신이 들어서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미 열기가 떠돌았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눈꺼풀 위로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남자의 명주실같은 은색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여자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오늘은 내가 봐주지. 나도, 당신도 몸에 무리가 가면 안되니까 말이야.”

오늘은 이걸로 참자, 하면서 에스트레드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넣었다. 세리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잘못하면 꼴사납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밖에는 호위병들이 있다. 철의 정치를 해온 황자비가 남편을 만나자마자 교성을 지르는 걸 들려줄 수는 없었다.

에스트레드도 그런 세리나를 눈치챘는지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동시에 그의 중지와 검지가 깊숙히 그녀의 몸 안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젖은 내벽이 매끄럽게 그의 손가락을 조였다 풀었다. 그대로 아내의 몸 안에 자신을 깊이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황자는 엄지손가락으로 세리나의 예민한 돌기를 찾아내 문질렀다. 손톱을 세워 긁는 자극에 세리나가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의 맞물린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성이 먹혀들었다. 십년 만에 겪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상한 자극에 곧 세리나의 몸이 덜덜 떨리면서 그녀의 두 다리가 침대 시트 위를 마구 문질렀다. 남편의 도움으로 간신히 절정의 신음성을 삼킨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남편의 부드러운 실내목을 쥐어뜯었다. 에스트레드는 절정에 올라 방 안을 한가득 채우는 세리나의 백합 같은 향기에 취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조용한 절정이었지만 격렬했다. 에스트레드가 빼낸 손가락 주위로 애액이 흐를만큼이었다. 세리나는 몽롱해진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 보았다. 아래 속옷은 허벅지에 걸쳐진 채로, 위의 속옷은 입은 채였다. 풍성한 금발이 완전히 흐트러져 침대 위에 흩어진 채의 그녀는 태양의 여신처럼 보였다. 에스트레드는 자신도 모르게 아내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당신은…”

“난 무리 하면 안되잖아.”

에스트레드는 가볍게 웃었다. 지금은 참아야 했다. 빨리 체력을 회복해서 아내가 지칠 때까지 안아줄 수 있으려면. 그걸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의 충동이야 참을 수 있었다.

황자는 아직 후희가 지나고 있는 아내의 몸을 끌어안았다.

“플라티나 동생이라도 만들까?”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음란한 농담에 세리나가 기막힌 표정을 했다. 에스트레드는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흠. 뭐 난 한 열명을 낳아도 좋지만 당신 몸에 무리가 갈 테니까 말이야.”

“정말 자고 나더니 더 천연덕스러워졌네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 낳아도 좋아. 뭐 그러면…”

에스트레드는 머리 뒤에서 한팔을 벴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황자 부부의 침실에는 화려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황자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황위 계승 문제가 복잡해지겠지? 이 동네는 이상하게 혈통에 집착을 해서 말이야.”

“...당신이 황위에 있다가 제대로 정리해서 물려주면 되잖아요.”

“아니, 안 그럴 거니까 문제인 거지.”

“네?”

“난 황위에 오르지 않을 거야.”

세리나가 놀라서 자신의 차림도 잊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황위에 오르지 않는다구요?”

“응. 제위는 바로 플라티나에게 넘긴다.”

황자비는 입을 벌린 채 놀라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에스트레드는 일어나 앉아서 어깨를 으쓱했다.

“제위를 노리던 건 그것 외엔 내가 멀쩡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지금 와서야 별로 욕심도 안나.”

“무슨...아무리 그래도 부친이 있는데 어린 플라티나에게 제위를 넘기는 건.”

“난 말이야, 세리나.”

에스트레드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싫어. 로마나 황실은 언제나 혈통끼리 죽여왔고 내 평생을 통틀어서도 그랬어. 거기에 후회는 없지만.”

은발의 황자는 아내를 끌어당겨 다시 품에 안았다. 풍성한 금발을 쓰다듬으며 그는 딸을 생각했다.

플라티나는 사랑스러운 딸이다. 뱃속에 있던 아기만을 기억하는 에스트레드에게 열일곱살의 몸을 지닌 열살짜리 딸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감정을 안겨주었다. 세리나 외에는 사적인 감정에 거의 무감했던 에스트레드다. 하지만 세리나와 자신을 반씩 꼭 닮은 플라티나의 존재는, 황자의 근간을 뒤흔들 만큼 충격적인 문제였다.

제국 시초부터 있었던 것이 황실 혈통간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황실 가족간 사이가 좋아도 살해는 반드시 일어났다. 에스트레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난 떠날 거야. 함께 갈 거지?”

에스트레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딸이 이곳에 있는데 세리나가 자신과 함께 떠날거라고 완전히 확신을 할 수는 없었다. 세리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이었다.

“당신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가 내가 있을 곳이죠?”

“...그거 뭔가 멋진데.”

“난 당신의 수호기사였고, 이제 당신의 아내에요. 잊지 말라구요.”

세리나의 마지막 말은 거의 꾸지람에 가까웠다. 그녀는 에스트레드의 터무니 없는 결정에 머리를 싸매쥐었지만, 알고 있었다. 결국은 황자의 바람대로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럼...플라티나에게는 언제 말할 거에요?”

“빨리 말하고 빨리 떠나지 뭐.”

에스트레드는 싱긋 웃었다.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말을 타고 질주하는 소리가 들렸던 탓이다. 태양처럼 밝은 소녀의 쨍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황궁 내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태양같은 소녀, 자신의 딸인 플라티나 로마나.

‘대신관의 신탁은 결국 사실이 되는군.’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어처구니도 없고 어쩐지 당연한 것도 같았다. 그녀는 대충 옷을 주워입고 창가로 다가갔다. 정원으로 말을 타고 질주해들어온 플라티나가 창가로 보이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엄마!”

하도 예뻐하며 기른 탓에 대책없이 밝기만 하다. 하기사 태어난 지 십년, 열살 나이로 보면 당연하다. 황실의 나이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지만 세리나에게는 어디까지나 어리기만 한 딸이었다.

‘나도 딸을 이 황실에 두고 떠나게 되네.’

마주 손을 저으면서 세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가 기억났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세리나 리엔 역시 딸을 이곳 로마니엔 제국의 황궁에 홀로 두고 떠난다.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플라티나는 아름다운 백금발을 출렁이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푸른 정원 위에서 밝게 웃는 소녀를 보면서 세리나는 문득 자신의 할 일이 다 끝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답답한 황궁에 있을 이유가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세리나의 뒤로 다가온 에스트레드가 역시 웃으며 플라티나에게 손을 저었다. 신이 난 소녀가 황궁 계단으로 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황자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이곳 황궁에서 두 사람의 역할은 끝났다는 사실을 둘 모두가 알았다.

========== 작품 후기 ==========

이것으로 [금은의 왕관]은 일단 완결입니다. 마리아-세리나-플라티나 3대로 이어지는 세 모녀의 이야기를 세 작품으로 나누어 써보고 싶어서 일단 완결이 미진하나마 이렇게 났습니다.

여태까지 함께 와주신 독자 여러분 한분한분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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