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39화 (139/142)

<-- 새벽 -->                “황자비 전하.”

호보프의 얼굴은 수척해졌지만 기쁨에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시종장으로써 모셔온 황실이 전부 박살나고 에스트레드가 눈을 뜨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절망, 하지만 손이 귀한 로마나 황실에서 본 귀한 황손에 대한 기쁨. 세리나와 플라티나를 볼 때마다 노회한 시종장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하는 즐거움이 떠올랐다.

그는 플라티나를 받아 안다가 휘청할 뻔 했다. 아기는 바로 어제와 확연히 다를 정도로 무게가 늘어나 있었다. 세리나가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플라티나의 성장이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어. 대신관님의 말대로라면 아마 일년 내에 다른 아이들 서너살만큼 클 거라고 했는데, 이대로라면 그보다도 더 빠를 수도 있다고 하는군.”

“...좋은 일이지요, 좋은 일입니다 전하.”

호보프는 품 안의 묵직한 아기를 어르고 달래면서 환하게 웃었다. 에스트레드를 어려서부터 모셔온 그다. 아들처럼 황자를 바라봐온 시종장에게 플라티나는 마치 손녀 같은 아이였다. 지금 상황만 이렇지 않다면 그는 황녀를 위해 제국 전역의 보석과 모든 레이스를 전부 끌어모아 최고의 신생아용 드레스를 만들었을 기세였다. 사실 지금도, 황후의 옷장에서 꺼낸 옛날 옷들 중 두세벌을 해체해 7살쯤 된 플라티나를 위한 드레스를 대기해놓은 상태였다. 지금이 비상시국이 아니었다면 플라티나의 옷만으로 큰 방이 넘쳐났을지도 모른다. 그런 호보프가 플라티나의 빠른 성장이 기대된다는 소식에 입이 헤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리나는 시종장의 따스한 얼굴을 보면서 웃었다. 그녀는 잠시 나이 먹은 남자가 아기를 어르고 달래도록 내버려 둔 다음 말했다.

“내일 귀족 회의에 참석할 거야. 준비를 부탁하네.”

시종장의 눈이 커졌다. 에스트레드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아있는 황실의 성인은 공식적으로 세리나 리엔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귀족 회의에 단독으로 참석하겠다는 말 역시 무엇을 뜻하는지도. 호보프는 다소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디까지나 황자 전하와 플라티나를 대신해서 나서는 것 뿐이고.”

그녀는 잠깐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 자신 역시 긴장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 위엄이 돋보이도록 의장을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뿐이니까요, 황자비 전하.”

“아니, 아니...단정한 정도면 돼. 너무 힘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호보프의 기합 넘치는 말에 세리나는 약간 당혹한 미소를 지었다. 호보프 뒤에서 플라티나를 넘겨다 보느라 정신이 없던 시녀 안나 역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세리나의 말과는 달리,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의 손에서 화려한 의상들이 탄생할 것 같았다.

*****

처음 에스트레드에게 안겼던 날이 기억났다. 마치 사고처럼 일어났던 일. 실은 황후의 손아귀에서 벌어지던 일에서 발생했던 작은 운명.

‘...그날, 황자 전하는 왜 피하지 않으셨던 걸까.’

전투 중 마수가 뿜어낸 액체에 피부를 스친 황자는 그대로 세리나를 안았다. 함께 한 수백번의 전투 중 에스트레드가 별다른 이유 없이 적의 공격에 노출된 것은 그녀가 처음 본 일이었다. 황자는 짧게 실수였다고 말했다. 실수라. 에스트레드와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서로에게 품었던 마음이 일방향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사실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세리나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에 입을 맞췄다. 에스트레드가 끼워줬던 바다의 눈물이 박살난 이후에도 남은 링을 간신히 기워 링반지로 만들어 끼우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 끝에 느껴지는 금속의 매끈한 감촉을 뇌리에 새겼다.

‘곧 일어나실거야.’

아주 오래 전부터, 처음 만났을 그때부터 사랑에 빠졌던 남자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황궁에 들어와 인사를 했을 때부터, 처음 눈동자를 맞췄던 그 순간부터. 은청색 눈동자를 한 외로운 얼굴의 은발 소년은 마치 천사처럼 웃으며 어린 소녀를 맞이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딸을 소개했고 부탁한다는 듯 황자의 손에 소녀의 손을 쥐어주었다. 작고 부드러웠던 둘의 손이 처음으로 감겼던 순간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손을 잡고 어색한 얼굴을 한 두 소년 소녀에게 다정하게 당부했다.

“둘 다, 앞으로를 부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남들이 아는 것 그 이상을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 미래도 이미 봤을지 모른다.

‘뭔지 내게 말을 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세리나는 속으로 불평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 모양이었다. 딸을 훈련시키고 양육했지만 그 이상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기 침대에 누운 플라티나를 내려다 보았다. 절대 딸에게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모든 것을 알려주고 대비하게 할 것이다. 백금발의 자그마한 아기는 방긋 웃으며 어머니를 올려다 보았다.

“전하,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재상과 공작 이하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스가드 백작이 들어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세리나는 잠자코 아기를 내려다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위로 화사한 상아색 실크 가운이 흘러내렸다.

오전의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와 세리나를 에워쌌다. 연녹색과 상아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은 황자비는 창을 등지고 서서, 마치 아침 햇살의 여신처럼 보였다. 그녀의 풍성한 금발이 수많은 색깔로 부서지며 오색으로 빛났다. 아주 작게 세공한 페리도트와 진주가 상아색의 도톰한 비단 위로 수없이 많이 자수와 함께 수놓아져 드레스 자락은 묵직하게 흔들리며 끌렸다. 짙은 녹색의 사파이어를 단순하게 장식해 땋고 밑으로 드리운 금발이 후광처럼 보였다. 무뚝뚝한 카스가드 백작 역시 잠깐 멈칫할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세리나의 머리 위로 얇은 금속이 얽힌 형태의 백금색 관이 씌워져 있었다. 카스가드 백작이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뒤에 들어선 레이디 휘에리가 감탄하며 말을 건넸다.

“어머나, 아름다우세요 황자비 전하. 어쩌면…”

“호보프와 안나가 오랜만이라며 잔뜩 힘을 줬더군요.”

다소 민망해져서 세리나가 웃었다. 카스가드 백작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다시 한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뒤에 서있던 레이디 휘에리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보프와 안나의 극성은 그녀 역시도 잘 아는 바였다. 소란스러웠던 지난 몇개월 뒤로 황자비가 이렇게까지 제대로 차려입은 것은 오랜만이었으니 두 사람은 의욕에 넘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대령했을 것이다.

“그러는 게 낫지요. 귀족들이란 눈에 보이는 것에 잘 꺾이는 자들.”

어느새 방 한켠에 서있던 밀렌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는 이제 아예 황자비의 그림자 수호기사로 역할을 바꾼듯 했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가 소리도 없이 서있었다.

“...뭐, 필요한 일이긴 하지.”

세리나는 마땅찮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제부터 하는 모든 일은 귀족들의 기세를 꺾고 실권을 황자비의 손아귀에 쥐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외모든 드레스든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 이용해야 했다.

“플라티나 전하도 함께니까 모녀가 잘 어울리시겠는걸요.”

휘에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렴 까르르 웃었다.

귀족 회의에는 황녀 역시도 출석해야 했다. 재상과 공작 등 유력자들에게 아직 황실의 대가 끊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황자와 꼭 닮은 은청색 눈동자의 플라티나 로마나는 그 존재 자체로 에스트레드와 그녀 자신을 보호할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또한 모든 권력을 세리나가 쥐고, 잠시나마 이 제국을 그녀의 손 안에서 안전히 지켜낼 버팀목이 될 것이다.

세리나는 플라티나를 안아들었다. 안나가 신경 써서 솜씨를 부린 황녀를 위한 자그마한 드레스가 아기에게 딱 맞았다. 조금 크게 만들었는데 어제에 비해 또 자란 것이다.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플라티나가 기특하고 안심이 되어서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아기의 뼈대는 이미 단단했고 손발은 컸다.

“이것 보세요, 백작. 손발이 참 길고 크지요?”

세리나는 자랑처럼 카스가드 백작에게 아기의 손을 내밀었다. 플라티나가 손을 조물거리며 움직였다. 레이디 휘에리는 조금 놀라서 입을 가렸다. 귀부인이나 귀족 아가씨들에게 손이 큰 건 결코 칭찬할만한 점이 아니다. 하지만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띄웠다.

“그렇네요. 좋은 검사의 자질입니다.”

“훌륭한 검사가 될 거에요. 내 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머니의 딸인 내가 그랬듯이.”

세리나는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제국의 기준에 맞는 귀부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플라티나는 세상의 기준을 웃도는 훌륭한 검사이자 여성이 될 것이다. 세리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는 언제나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라고 말해왔다. 소녀 시절의 세리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틸렌의 소식은 더 들어온 것이 없나요?”

“수도 방향으로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국군이 방어를 하고 있지만 지방 호족들과 합세해서 함락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호족들과의 공조가 빈틈없는 것을 보아 아마 일을 꾸민 지가 오래된 듯 합니다. 군에 포함된 훈련된 마수들의 위력 또한 군력에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수도까지 대략 며칠을 예상하나요?”

“보름입니다.”

“....”

단순히 걸어서 보름도 아니고 제국군의 방어를 해제하면서 진격하는 군대가 보름만에 제국의 수도에 도달할 거라고 예상한다. 그 말은 에틸렌 군의 위세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카스가드 백작은 감정이 섞이지 않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지만 지금 상황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았다.

“참고해야겠군요.”

세리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호들갑을 떤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 군인으로 산 세월이 오래된 세리나 리엔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다.

“중앙궁까지 가야하니 마차를 타야지요.”

지금 황실은 에스트레드의 황자궁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귀족 회의까지 황자궁 안에서 열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이참에 세리나는 세 가족의 거주하는 궁과 정치가 이루어지는 궁을 별개로 가를 생각이었다. 아직 무방비 상태인 에스트레드와 플라티나를 가능한 안전한 공간 안에 두고 싶었고, 에스트레드의 얼음계 능력이 수호하는 결계 안으로 외부인을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열려있는 방문 너머로 벡스 레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세수도 안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향해 세리나는 혀를 차고 밀렌은 머리를 긁적였다.

“훠오, 황자비 전하, 이게 어쩐 일이야. 간만에 엄청나게 차려입었는데?”

벡스는 휘파람을 불었다.

“거리에서 만났다면 내가 꼬셨을 거야. 와, 알고는 있었지만 미인인데?”

“그랬다간 내가 먼저 목을 벴을 겁니다.”

밀렌이 냉랭하게 말했다. 세리나가 피식 웃었다. 저건 밀렌 나름의 농담이다. 전에 없이 긴장한 기색의 친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이겠지. 성공인가 여부는 별개로 하고.

“귀족들에게도 효과가 있다면 좋겠군,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큼.”

세리나는 몸을 돌렸다. 시종이 문을 열었다. 플라티나를 안은 레이디 휘에리가 그녀의 뒤를 따르고, 카스가드 백작 역시 그 뒤에 동행했다.

“자, 그럼 갈까요. 귀족 회의에 나아가 아직 황실과 황자 전하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보여주어야지요. 아직 황실은 건재하고 나 세리나 리엔이 있는 한 함부로 굴 수 없다는 점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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