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호보프는 황궁 전체를 재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없이 죽어나간 시종들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부족한 인력을 벌충하느라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을 전부 끌어모아 에스트레드의 황자궁과 중앙궁만이라도 정상화시키기 위해 모두가 눈코뜰 새가 없었다. 그를 대신해 밀렌과 벡스, 시녀 안나가 에스트레드의 황자궁에서 세리나의 근처에 머물렀다.
“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밀렌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세리나의 말이 들리고서 그림자 기사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적당히 따스했다. 황자궁을 두르고 있는 에스트레드의 날카로운 한기와는 다르게, 거주자들의 숙소는 지내기 적당한 온기를 유지했다. 늦은 오후라 해가 상당히 기울어져 그림자가 방안에 길게 늘어졌다.
아기를 안고 있던 세리나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풍성한 금발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목덜미를 감쌌다. 잠옷으로 입은 조이는 곳 없는 얇고 부드러운 모슬린 드레스 위로 양털로 짠 숄을 두르고 황자비는 애정어린 손길로 아기의 등을 두드렸다. 밀렌은 황족을 대하는 예로 짧게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섰다.
“몸은 어떠십니까.”
“...뭘 새삼스레 예법에 경어야?”
세리나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을 했다. 밀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재 제국의 유일한 황실 어른이니까 당연하지.”
“황자전하께서 계신데 내가 어떻게 유일해?”
“일단 눈을 뜬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잠시 쉬고 계신 것 뿐이잖아.”
“아무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너 하나 뿐이잖아, 세리나 리엔 황자비 전하.”
“경어든 평어든 둘 중 하나만 해라, 왔다갔다 하지 말고.”
세리나는 투덜거렸다. 황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내린 창백한 안색의 황자비는 여전히 군인 시절처럼 가벼운 말투를 썼다. 대리석 같은 어머니의 피부 위로 아기가 손을 뻗어 잡고 입을 오물거렸다. 아기는 태어날 때를 제외하고는 울지 않았고 별로 보채는 일도 없었다. 플라티나를 다독이면서 황자비가 친구를 바라보았다. 밀렌은 한발짝 멀리서 백금색 머리카락이 풍성한 작은 아기를 내려다 보았다. 눈동자는 은청색이고 머리카락은 백금색이다. 이목구비는 세리나 같은 느낌이었다.
‘크면 대단한 미인이 될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 생각보다 아주 빠른 시일 내일수도 있다. 로마나 황족은 힘이 강할수록 빨리 성장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강한 황족 중 한명인 에스트레드 로마나와 소드마스터 세리나 리엔의 아이다. 미래가 기대될 수 밖에 없었다.
세리나는 아이의 보드라운 백금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플라티나가 방긋 웃었다. 무거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딸의 웃음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밖은 어때?”
“뭐 일단...마수 폭주화는 거의 잡혔어. 대귀족들이 난리를 치긴 했지만…”
사실 지금 제국의 상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수도의 군력을 지닌 카스가드 백작이 에스트레드와 세리나의 곁에 서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대귀족 한둘은 정면으로 사병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평소 에스트레드가 귀족들의 사병 세력을 극단적으로 제한했던 것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니까 빨리 황실이 정상화가 되어야지.”
“황자 전하께서 빨리 눈을 뜨셔야 할 텐데.”
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플라티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어머니의 손가락을 쥐었다. 아기는 벌써 많이 자라서 일반 아기가 한살쯤 되었을 때처럼 보였다. 성장하는 속도가 날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었다. 밀렌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내놓았다.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해놔야 해, 세리나.”
“마음의 준비?”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눈을 못뜨신다면 네가 제국의 통치자가 되는거야.”
황자비는 잠깐 몸을 굳혔다. 제국의 통치자라니, 거기까지는 한번도 생각을 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무슨 소리야. 아직 황자 전하께서 멀쩡히 계신데.”
“회피하지마. 눈을 여전히 뜨지 않고 계시잖아. 어찌되었든 정신이 나실 때까지는 네가 유일해.”
“뭐가 유일해?”
“제국을 다스릴 사람.”
“거절하고 싶은데.”
세리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고 밀렌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생 동안 지배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여기사다. 시간이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황자비의 자리에 앉게 된 것도 불과 몇달 되지 않았다. 원래 소탈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녀에게 갑자기 황실의 유일한 어른으로 제국을 다스리라는 요구는 어처구니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어? 그 누구도 입 다물고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거야. 감히 대제국의 통치를 혈통도 아닌 여자가 행하다니.”
“하지만 적통인 황위 계승자의 어머니이기도 하지.”
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밀렌은 그녀의 혼란과 당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에스트레드의 수호기사로 곁에 머물며, 그녀는 제국의 지배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단호하고 잔인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기사의 위치에서 자신의 자긍으로 간직했던 기사도나 도덕심과 작별을 고해야하는 자리다. 그것이 현실이다.
로마니엔은 수많은 자들을 찍어누르고 그 피를 대지에 바친 후 기틀을 닦은 나라다.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만약 그걸 포기한다면 플라티나와 에스트레드를 지킬 수 없다.
그녀는 익숙해져야 했다. 유일한 황위 계승자 플라티나 로마나의 어머니, 세리나 리엔으로써.
“네가 거부한다면...황자전하는 물론이고, 플라티나 황녀님을 보호하는 데 문제가 생길거야.”
밀렌은 담백하게 사실을 말했다. 별로 위협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친구로써, 그녀의 당황을 줄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황실의 힘은 전례없이 축소되어있어. 카스가드 백작님과 레이디 휘에리가 확고하게 우리 편으로 서있고, 황자 전하가 쌓아놨던 민간 세력이 결집되어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거지...지배자의 공석이 길어지면 귀족 쪽에서도 들고 일어날거야.”
세리나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사실 알고는 있는 부분이다. 단지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간신히 황후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상황이 정리된 것은 극히 일부분 뿐이다.
“...지금은 어때. 조용하긴 해?”
밀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라일리아 로마나가 뿌려놨던 찻잎의 미끼가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그 부분을 모르겠어.”
“....”
“대부분 귀족 선에서 정리가 되긴 한 것 같아. 어차피 수도 상류층에서 시작된 유행은 그 안에서 돌다가 시간이 지나야 대륙 각지로 흘러 나가니까.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은 있어.”
귀족선에서 정리가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이상한 낌새가 나타났다.
“제국 지방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나고 있어.”
“...중앙정부가 힘을 잃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겠지.”
“그건 그런데, 이미 에스트레드 전하가 지난 십여년간 거의 말살시키다시피 한 지방 호족들이 군대를 가지고 일어서기 시작했거든. 그 군력 중심에 훈련된 마수가 있어.”
“마수가 훈련되었다고?”
“그래. 정확히는 마수라기보다는...그보다 훨씬 작고 약하지만, 어찌되었던 고삐를 메고 인간을 태워 진군하고 있어. 옛날 이야기 책에 나오는 용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보고가 있었고.”
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훈련된 마수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밀렌은 고개를 저었다.
“보고된 내용을 종합해보면...황후 측으로부터 모았던 혈액과 페로몬을 지방 호족과 거래해서 전달한 걸로 보여. 아무래도 다른 종류의 가공을 거친 거였겠지. 힘이 약한 보통의 인간이라도 약을 주입받으면 신체가 변화하고, 약한 만큼 지능도 어느 정도 남아있어 훈련이 가능한 상태로 만든 것 같아.”
황자비는 아기를 고쳐안았다. 사실이라면 지금 자리 보전하고 앉아있을 일이 아니었다. 귀족 가문도 믿을 수 없고,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과 몇 안되는 친구들 뿐이다. 의식을 잃은 상태인 에스트레드와 아직 어린 플라티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세리나 리엔 뿐이었다.
“제일 처리가 급박한 쪽은 어디야?”
“지금 제국 남서부에서 호족 에틸렌 가문의 사병이 진군해 올라오고 있어. 다른 작은 세력들은 방위군 선에서 막히겠지만 에틸렌 쪽은…”
“알아. 원래 왕국이었다가 복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세력을 다시 결속시키기 쉬웠겠지.”
왕국을 복속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에스트레드 로마나였다. 그의 곁에서 수호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세리나도 동행했던 기억이 있다. 에스트레드는 철저하게 왕실의 모든 혈족을 말살시키려 했지만 중간에 황제가 불러 일처리를 끝내지 못한 채 수도로 돌아왔다.
“그때 막내 왕자가 살아남았었지.”
“막내 왕자라고 해도 오십대가 다 된 남자야. 그 다음 세대도 왕손들이 몇몇 살아있어.”
“골치아프군.”
황자비는 플라티나를 내려다 보았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으며 어머니를 올려다 보았다.
“황자전하께서 눈을 뜨실 때까지는, 네가 버텨줘야 해.”
“....”
“아니면 플라티나 전하께서 황위를 양위받으실 만큼 성장하실 때까지라도.”
“그 전에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눈을 뜨실 것이다.”
세리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그녀는 남편이 곧 눈을 뜰거라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자비는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기분을 참기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지금 시간이 많지 않아. 에틸렌에서 올라오고 있고, 귀족 가문들이 술렁이고 있으니...당장이라도 네가 나서줘야 해.”
“당장?”
“플라티나 전하의 생산 이후로 많이 힘들 거란 건 알고 있지만 도리가 없다.”
밀렌은 심플하게 말했다. 세리나는 조금 어지러워져서 머리를 짚었다. 실제로 어지러운 건 아니었다. 황자비의 신체는 이미 소드마스터의 단계로 들어서 출산의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이후였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준비하지 못한 사태는 아무래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카스가드 백작이 어떻게든 지금 귀족 가문들을 진정시키고 있지만 쉽지 않아. 더이상은 공작 이하 대귀족들이 황손과 황자비의 무사함을 확인하는 걸 막을 수가 없어.”
그건 즉, 세리나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수호 기사로, 에스트레드의 뒤에서 살아온 그녀의 인생에서 공식석상에 혼자 나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세리나에게 플라티나와 에스트레드의 안전이 달려있다.
“내일 에틸렌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귀족들의 회의가 있을 예정이야. 그때 얼굴이라도 보여달라고 재상이 귀족들의 뜻을 모아 전달해왔어.”
더이상 고민 같은 건 사치다.
황자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사라져 있었다.
“내일 회의에 참석한다. 안나와 호보프를 좀 불러주겠어? 준비를 해야겠어.”
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친구는 황자비를 설득할 줄 알았다. 밀렌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세리나의 결정에 큰 변화는 없었겠지만.
세리나는 아기를 안은 채로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의 방은 황자궁 2층에 있었고, 바깥은 사람들로 가득 차 분주했다. 폐허가 된 중앙궁 대신 에스트레드의 황자궁이 황궁 전체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여름 장마가 지나 가을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수도의 하늘은 맑았다. 날은 여전히 더웠지만 바람은 한결 시원해진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빨리 자라렴, 플라티나. 내 딸.”
오늘 아침에도 내려가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보고 왔지만 또다시 보고 싶었다. 차갑게 식은 채 숨만 가늘게 쉬고 있는 남편의 곁에 누워 세상 모르고 함께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품에 안은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웃었다. 그녀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에스트레드 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