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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35화 (135/142)

<-- 역습 -->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빛은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검은 눈, 갈색의 머리카락. 차분하고 상냥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세리나의 앞에 섰다. 투명한 모습임에도 그에게서는 강인한 마력이 느껴졌다.

“레너드 볼프.”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산밑의 연구실에서 그의 흐릿한 영혼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생생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분명 바다의 눈물에 조각나 담긴 대마법사의 혼의 파편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처럼 미소를 지었다. 레너드 볼프의 나이 먹은 얼굴에 보이는 주름까지도 인간적이었다.

“이런 모습으로는 처음이지요, 세리나 리엔. 제국의 황자비.”

볼프는 육성을 냈다. 신체가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공기를 통해 세리나의 고막으로 전달되었다.

“세상에.”

“희한한 일이 많지요.”

볼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리나는 품 안의 에스트레드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분노로만 가득 차 있던 볼프의 파편을 떠올렸던 탓이다. 볼프의 내면은 제국에 결코 호의적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그가 적의를 품고 있다면…

“당신의 남편, 에스트레드는 대단히 영리한 사람입니다. 악의적이고 영리하지요.”

대마법사는 혀를 찼다. 그는 고개를 조금 숙여 쓰러져 있는 새하얀 에스트레드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빛은 따뜻했으나 온순하고 힘이 없었다.

본래 레너드 볼프는 그리 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세리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역사속 대마법사는 강인하고 전투적인 남자였다.

“아버지!”

라일리아의 쉰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제 거의 해골이 된 황후의 몸이 바람에 비틀거렸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어서 안구만 남은 눈을 크게 떴다. 얼마 남지 않은 시신경으로 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몇백년 전 죽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마녀의 남은 오감으로 강렬하게 대마법사의 존재가 느껴졌다. 마치 그가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레너드 볼프의 혼이 입을 열었다.

“나는...체념과 순리의 조각. 마지막으로 레너드의 안에 남아있던, 가장 큰 파편입니다.”

죽어가던 레너드 볼프의 심장 안에 있던 가장 큰 파편. 아비인 자신을 죽이기로, 영혼을 부수기 한 딸의 결정마저 수용하기로 한 그 체념과 순리의 마음이었다.

그의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라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구나, 내 딸아.”

“아버지, 당신마저 날 배신하는 겁니까.”

라일리아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울렸다. 녹색의 환영은 미소를 지었다.

“배신이라니, 딸아. 네가 나의 영혼을 깨부술 때를 배신이라 하는 것이겠지.”

탓을 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별다른 사감이 섞이지 않은 말에도 마녀는 움찔 떨었다. 죽은 뒤에도 그의 영혼을 수백개로 조각 내 잠시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인정해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나를 막을 수 있었지만 그대로 두셨잖아요!”

마녀의 쉰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너드 볼프는 인자한 표정 그대로 변화가 없었다.

“자, 보아라.”

그는 두 손을 들어 넓게 벌렸다.

“나는 대마법사에게서 가장 크게 남아있던 마음. 네가 조각낸 그의 영혼 중 가장 큰 힘을 지닌 파편.”

레너드의 푸른 영혼은 천천히 손을 휘저었다. 어둠숲 전역에서 달려온 검은 그림자들이 그의 손에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레너드 볼프. 동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가장 강대한 마법사였던 남자. 라일리아의 아버지. 발렌1세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던 비운의 왕.

그의 힘은 강대했다. 몇번의 손짓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힘을 못쓰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여전히 비는 오고 있었지만 빗줄기도 한결 약해져 있었다. 라일리아가 다시 그림자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마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바닥 부근에서만 그림자가 땅을 긁으며 흙과 자갈이 튀었다. 그 광경을 보며 레너드 볼프는 손을 늘어뜨렸다.

“그에게 남아있던 건 용서가 아니라 체념이었단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체념과 순리. 이 세상에서 쓰임이 여기까지 였다는 깨달음과 딸의 타오르는 복수심과 잔혹함에 대한 체념. 레너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왜 당신까지 제국의 편에 서는 건가요…”

라일리아의 몸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빛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마녀는 오기로 버티고 있었다. 쉭쉭거리는 호흡 소리가 섞여 거의 들리지 않는데도 라일리아의 말 뜻은 세리나의 귀에 명확하게 들렸다.

“왜 당신까지 내 편이 아닌 건가요.”

“난 언제나 누구의 편도 아니다. 본래의 완전한 레너드 볼프였다면 모르지만 나는 네가 부수어낸 그의 파편일 뿐.”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는 분노와 증오만이 남았던 그의 파편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서는 감정이라는 부분이 거세된듯한 느낌이었다.

“너와, 너의 딸과, 나는...모두 구시대의 유물. 이미 죽었어야 하는 자들이 시간을 거슬러 순리를 역행해 이 자리에 존재하는 혼령들.”

두근, 두근, 두근,

세리나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레너드 볼프가 나타남과 동시에 뱃속의 태동이 급격하게 거세지기 시작했다. 에스트레드는 더욱 창백해졌고 그녀의 배는 근육이 꿈틀거리며 튈 정도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뱃속의 근육이 뒤틀리고 아기의 손발이 내부를 치고 움켜잡았다. 마치 진통이라도 올 것 같은 기분에 세리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아직 아냐. 불가능해.’

아직 임신한 지 몇달 되지 않았다. 진통이 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갑자기 힘을 얻은 듯 부쩍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황자비가 비틀거리며 땅을 짚자 레너드 볼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라일리아의 검은 그림자가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며 그에게 육박했다. 대마법사의 파편은 손을 들어 채찍의 방향을 가리켰고, 그림자는 공간 속에 없던 것처럼 분해되어 사라졌다. 라일리아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가 크고 있나요?”

레너드는 다시 황자비를 내려다 보았다. 세리나의 황금색 머리카락은 전부 흐트러져 어깨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로 흐르는 빗물을 닦으면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고 있는지 아니면 이상 징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뭔가 조르고 있네요.”

“크는 것이지.”

대마법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왜냐하면 나는 체념과 동시에 순리의 힘을 지닌 마지막 파편. 대마법사의 힘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오.”

그는 레너드 볼프가 죽을 당시 가장 크게 그의 안에 남아있던 체념과 순리였다. 그의 눈 안에 해골이 되어버린 라일리아와 그녀의 딸은 마치 지상을 떠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무덤에서 일어난 시체, 한낮의 어둠, 불 속의 얼음. 존재해선 안되고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들.

“이 제국 따위 전부 무너뜨릴거야! 내가 그러기 위해서 여태까지 살아왔어!”

대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라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어둠과 그림자의 마녀는 금방 쓰러질듯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다 찢어진 검은 드레스가 그녀의 부식된 몸에 함께 걸려 바람에 날렸다.

“복수라...너는 우리의 왕국이 무너진 이유가, 정확한 이유가 기억이 나느냐?”

“뭐….!”

라일리아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녀는 해골만 남은 두개골을 움직여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 했다. 부패해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뇌가 그 안에서 함께 움직였다.

“제...제국의 황제가 무너뜨렸지. 발렌1세가 아버지를, 당신의 가슴에 검을 꽂고…”

“그보다 더 전, 왜 우리의 왕국이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가 기억나느냐?”

“뭐...뭐라고…?”

라일리아가 텅빈 안구를 황망하게 이리저리 돌렸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는 전혀 느껴지는 게 없었다. 아주 약하게나마 그녀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세리나는 마녀가 전혀 기억을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레너드 볼프는 한마디를 더 물었다.

“지금 네 이름이 기억나느냐, 내 딸아?”

“....”

그 물음에 침묵이 길어졌다. 라일리아는 이제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레너드 볼프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나조차도 너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단다. 몇 번의 육체를 전승한 끝에, 이제 갈곳을 잃은 가엾은 영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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