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33화 (133/142)

<-- 역습 -->                라일리아는 레드포의 죽음을 태연한 얼굴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세리나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묘하게도, 그녀는 지금 라일리아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었다.

‘바다의 눈물 때문인가.’

여전히 마녀가 보내는 정신 지배의 마법이 유효한 것인지도 모른다. 라일리아는 레드포를 위해 애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원망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았다. 스스로가 그걸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역시도 알았다.

세리나 자신은 알 수 없는 어떤 얼굴들이 수개 스쳐지나갔다. 라일리아의 머릿속에 스치는 이미지들인 것 같았다. 황후의 마음 속은 어둡고 또 어두웠다.

[나의 아들. 나의 사라져버린 핏줄들.]

어두운 허공 너머로 라일리아의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마치 모계사회의 족장 같았다. 자신이 옮겨 탄 육체들로 낳았던 핏줄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 이용했으나 그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찾았다.

[너희들이 살아있었다면, 나의 대를 이어줬을 텐데.]

라일리아는 슬퍼했다. 세리나는 그녀를 정점으로 한 거대한 가계도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 가계도는 세리나 자신의 피를 이용해 격리할 자를 추적하던 그 혈액 지도와 지독히 닮아 있었다. 다만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다른 이름일 뿐.

[아냐, 다르지 않아.]

마녀의 목소리는 슬프면서도 공허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저 마당 한켠에 멀거니 서있을 뿐인 여자는 더이상 망가진 성대로 목소리도 낼 수 없는지 마법을 통해 세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왜 다르다고 생각하지? 지도는 같아.]

“무슨 소립니까.”

황자비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일리아의 몸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상해가고 있었다. 이미 검게 물든 반신에 이어 나머지 멀쩡하던 몸도 어둡게 부식되어 갔다. 그녀의 손에 낀 녹색의 반지만이 더욱 휘황하게 빛을 발했다.

세리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녀가 안쓰러웠다. 연민이라기엔 황후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고, 자신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황후에게 틈을 내어줄 수 없는 위치였다. 수도의 전 제국의 군력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을 안고 있다. 황후를 쫓아올 수 있는 건 세리나 리엔 자신 뿐이었다.

[지도, 지도. 너의 혈액이 이어진 길은 곧 나의 혈액이 이어진 길.]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설명을 하세요.”

[하하.]

라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긴 흑발마저도 산산히 바스라져 전부 허공으로 재처럼 흩날려 가고 있었다. 마녀는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목소리를 내는 것에 실패했다.

[나의 체액 역시 너와 동일한 것으로 바뀌었다. 짙은 페로몬과 체향으로 황자를 꼬여낸 비여. 네 혈액의 본질을 나에게 주입했지.]

“소용없게 되어 안타깝군요. 본인이 더 잘 알겠지만, 그 육체는 이제 쓸모가 없는 것 같으니.”

[그렇지, 그래...내 육신은 이제 다 되었어.]

그녀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했다. 폐가 들썩일때마다 전신에서 부식된 몸이 흘러내리고 무너졌다. 얼굴마저 절반 이상이 침식된 채로 라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타인을 지배하는 정신마법의 극은, 객체를 본주체와 동일화 하는 것. 그만큼 주객체 사이 유사성이 짙을 수록 성공의 확률도 높아진다.]

마법 강의 같은 뜬금없는 말에 세리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의 행간을 읽고 잠시 한발 뒤로 물러섰다.

“...헛소리는 그만두지요.”

황자비는 잠시 힘을 뺐던 나이프에 다시 기를 불어넣었다. 새하얀 소드오러가 다시 분출되었다.

어딜 보아도 황후가 그녀를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정신지배의 마법을 쓰기 위해 라일리아가 파놓은 함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다가 흠칫 놀랐다. 발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느릿하게 끌렸다. 흙바닥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이제야 알겠어? 세리나 리엔, 황자비여. 무자비한 얼음의 황자에게 마음을 바친 붉은 에메랄드.]

라일리아가 켁켁 거리며 웃었다. 성대가 모두 망가져 긁힌 소리가 났다. 듣기 싫은 쇳소리를 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봐. 이 작은 반지로도 나는 정신지배의 마법을 네게 흘려보냈다. 이 썩은 몸을 하고도 말이야.”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

이미 너와 나는 아주 닮아있어. 너의 아이의 이름까지도 말이야. 죽은 채로 태어날, 또 한명의 저주받은 아이.

머릿속에 퍼진 라일리아의 마지막 말에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플라티나.”

순간 세리나의 코앞으로 마녀가 육박했다. 기사는 뒤로 몸을 물리려 했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둘의 코끝이 닿았다. 세리나의 녹색 눈동자 앞으로 라일리아의 검은 눈이 들이닥쳤다. 그녀의 입 안에서 썩은 숨결의 냄새가 풍겼다. 시취. 어떠한 빛도 들지 않는 그 광폭한 눈동자의 마녀는 입을 찢으며 웃었다.

“벌이다, 황자비여. 벌이야. 황족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약자들을 살해하고 다닌, 그 죄에 대한 벌!”

황자비는 몸을 움직이려고 미친듯 비틀었지만 육신은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마녀의 썩은 손이 그녀의 흰 목덜미로 파고들어 움켜쥐었다. 이미 광인이 된 마녀는 소름 끼치게 차가운 손으로 황자비의 흰 목덜미 피부를 쓰다듬었다.

[드물디 드문 이 페로몬, 이 강함, 이 재능. 내가 마음껏 써주마. 이 육신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겠어.]

라일리아의 얼굴은 절반이 넘도록 썩어 이제 세리나의 눈 앞에서 살점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욕지기를 참고 세리나가 억지로 손을 움직여 황후의 손목을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손아귀만은 악귀처럼 강하게 그녀의 목줄기를 움켜잡았다.

[세상과 작별해라, 아름다운 황자비.]

라일리아의 손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며나와 세리나의 피부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황자비는 자신의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녀는 그녀의 영혼을 내몰고 이 육신을 점거하려 들고 있었다. 아주 폭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만약 이대로 분리된다면 그녀는 본질적으로 죽는다.

“아...안돼.”

세리나는 이를 악물고 저항하려 애썼다. 머릿속에서 라일리아가 웃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냐, 돼. 이제 모든걸 놓아라. 편안해지는거야…]

마녀의 웃음소리는 그 뒤로도 한참을 세리나의 뇌리를 울렸다. 하지만 황자비는 저항했다. 경지에 오른 소드마스터다. 아무리 모든 작업을 해놨다 하더라도 결코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둘의 힘겨루기가 절정에 오른 순간, 라일리아의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정신적인 비명이었지만 실제로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세리나의 무릎이 휘청였다. 마녀는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이 건방진 것! 이 더러운 년!]

처음에 세리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욕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녀는 다른 이름을 불렀다.

[씨앗을 심어준 나 대신 그저 밭일 뿐인 저년을 선택하는 게냐! 플라티나!]

한순간 뇌리 저편에서 백금색의 빛이 비추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한순간이었으나 그것으로 족했다. 박빙으로 겨루고 있던 둘의 영혼에서 승기를 거머쥔 것은 세리나였다. 그녀는 라일리아의 영혼을 훅 밀어내고 육체의 컨트롤을 다시 찾아왔다. 세리나는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을 움켜쥔 마녀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비틀어 엎어버렸다.

저 멀리로 날아간 라일리아의 육신이 마치 넝마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날렸다. 황자비는 숨을 몰아쉬면서 뒤로 비틀거렸다. 호흡이 곧 죽을 것처럼 가빴다. 그녀는 무릎에 손을 짚고 허덕이다가, 이윽고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맙소사.”

여전히 태동이 있었다. 세리나의 딸은 당연하게도 그녀를 위해 순간을 만들어 주었다. 황자비는 감사하면서 풀어진 다리를 추스르려고 애썼다. 뇌리 속을 점령당했던 여파는 생각보다 커서, 그녀는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나라, 세리나!”

“에스트레드님?”

황자비는 당황한 얼굴로 순식간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황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쓰러졌던 마녀로부터 날아온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세리나의 뛰어난 동체시력에 그림자는 마치 느리게 나는 종이비행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탈진해서 그에 반응해 제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에스트레드의 등이 움찔하고 굳었다. 그의 등 한가운데로 검은 그림자가 솟아나는 것을 보면서 세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 죽어간다고 생각했던 라일리아는 몸의 절반 이상이 해골만 남은 채로도 일어나서 그림자를 거두어갔다.

“나는 그림자와 어둠의 여왕, 이곳은 어둠숲이지. 그대로 죽을 거라 생각했나.”

듣기싫은 쇳소리는 그대로였다. 이미 성대는 박살이 나서 거의 호흡에 의존해 소리가 날 뿐이었다. 하지만 마녀가 웃었다.

“그래도 아내를 대신할 정신은 있었네.”

라일리아가 조롱했다. 쓰러진 에스트레드의 몸은 세리나의 품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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