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어둠숲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놈의 숲은 올 때마다 비가 오네.”
세레나는 투덜거렸지만 별 도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머리와 기사단의 제복 위로 빗물이 흩어졌다.
온통 검은 어둠 숲.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는 어둠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귓가에 이명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왔다.
‘방랑자의 마을.’
아까와는 달리 세리나는 그 목소리가 라일리아 로마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아기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느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위치 이전에 세리나 리엔은 황자 에스트레드의 황자비였고, 그 이전에 전장에 홀로 서는 기사였다.
“미안하다, 플라티나.”
세리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애마의 달음박질에 귓가를 스치는 비바람이 거셌다. 비에 젖은 황금색의 머리카락이 끝없이 뒤로 흩날렸다.
“너와 내가 살아남는다면...널 위해 좋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하마.”
아이를 품는다는 건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임신을 알게된 것조차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플라티나는 작은 불꽃 같은 존재가 되었다. 육체적으로도 전혀 느껴본 적 없는 그런 감각. 뱃속에 자신 외의 또 하나의 존재. 아주 작지만 강렬한 생명.
하지만 그녀는 세리나 자신의 육체도 어찌 된 상황인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플라티나의 목숨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지금 현재마저도.
어처구니 없는 몇개월이다. 에스트레드의 제안에 시작된 가짜 결혼 계획은 진짜가 되어버렸고, 가면을 쓰고 있던 황후는 검은 속내를 드러냈다. 세리나는 임신을 했고 에스트레드는 자신의 손으로 아비를 죽였다. 이제 로마나 황족의 핏줄에 남은 것은 에스트레드 뿐이었다. 아니, 에스트레드와 플라티나.
“황위는 절대로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한다, 내 딸아.”
로마니엔은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나라다. 로마나 황족은 태양신의 혈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전설로 내려온다. 실제로 그들의 특수한 능력과 긴 수명은 조상에 신성한 핏줄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런 태양신의 대신ˋ관은 플라티나를 다음 대의 황제로 지명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심지어 임신한 지 불과 몇달 되지 않은 태아를.
‘심지어 여자아이야.’
대대로 황가에는 여성이 적었다. 로마니엔 제국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사회 활동을 제한하는 분위기였고 황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워-위치였던 라일리아 로마나가 황후로 등극한 이후에도 계속 전쟁 문제나 군사 문제에 입 대는 것을 대귀족 가문에서 흠으로 꼬투리를 잡을 정도였다.
‘어머니 같은 아이가 나오려나.’
만약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 같은 성격이라면 그 어디에서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딸이 여황제가 되는 건 반길 일이다. 하지만 아비를 건너 뛰어서는 안된다. 그가 세리나의 유일한 사랑이자 남편인 에스트레드였기 때문이었다.
비가 쏟아진다. 한두방울 떨어지던 비는 이제 폭우로 변해 어둠 숲을 삼킬 기세로 쏟아졌다. 달리던 애마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뺨을 스치던 바람과 비의 회오리가 느려지는 것을 느끼며 세리나는 비를 피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둠숲의 한가운데, 버림받은 자의 마을이었다.
그녀는 말을 마을 어귀에 묶어두고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손 안에서 우웅하고 작은 진동이 울리며 흰 소드오러가 솟아나왔다. 먹구름 낀 하늘과 비가 쏟아지는 대지. 세리나의 흰 제복과 백색의 소드오러가 은은하게 빛났다.
“어서 와, 세리나 리엔.”
격식 없는 목소리가 친근하게 그녀를 불렀다. 마치 친구같은 말투에 세리나는 무의식 중에 목소리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비에 푹 젖은, 검은 머리의 황후가 앉아있었다.
*****
그녀는 아주 초라한 모습이었다. 물기 때문에 색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드레스는 물론이려니와 라일리아의 검은 머리는 완전히 폭삭 젖어 바닥에 끌릴 정도였고, 얼굴 위로도 거센 비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후는 손을 들어 눈 위를 가리면서 세리나를 바라보았다.
“황자비, 늦었어. 내가 기다렸는데.”
세리나의 황금색 머리카락도 등 위로 흘러내렸다. 폭우가 쏟아지는 버림받은 자들의 마을은 고요했다. 그녀는 감각을 확장해서 이 공간에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라일리아와 자신 외에는 그 어떤 움직이는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후가 느리게 일어섰다. 그녀는 일부러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녀의 주위만 속도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세리나는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데 어찌 가리지도 않고 계셨습니까, 황후 폐하.”
“하늘의 명을 어떻게 거스르겠나?”
“제국 최고의 마녀, 어둠의 마스터이신 폐하께 뭐가 문제겠습니까.”
세리나는 은은하게 오러를 온 몸에 둘렀다. 아주 얄팍한 막이었지만 그녀의 주변은 곧 안온한 온기로 가득찼다. 이미 젖은 몸에서 물기가 빠르게 말라갔다. 하지만 라일리아는 그대로 손을 늘어뜨린 채 황자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마법사 레너드 볼프의 외동딸이신 당신께 비를 막는 마법 정도야 일도 아닐 텐데요.”
황자비의 손에서 녹색의 반지가 반짝였다. 황후는 세리나의 몸을 감싼 은빛 오러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래 된 이름이군. 이제 지상에 혼 없이 힘만 남은 그 분의 이름이야.”
황후의 손에서도 녹색 보석이 반짝였다. 아마도 저 보석을 통해 정신 지배의 마법을 흘려보낸 것이리라. 정신이 말짱한 채로 이곳까지 달려온 세리나를 보면서도 하지만 라일리아는 그리 당황하지 않고 있었다. 세리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반지를 통해 자꾸 제게 말을 거셨습니다. 용건이 있으신 거겠지요?”
황후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은 들었으되 별다른 영향은 없었던 거군.”
“오라는 말씀을 듣고 왔으니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뭐...당연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라일리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여전히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녀는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이었다. 황후의 손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세리나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라일리아는 공격적이지 않은 자세로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히 봐라, 황자비. 공격은 하지 않을 테니.”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에서 손을 자세히 보기란 쉽지 않았다. 세리나는 감각을 확장해서 시력을 돋웠다. 독수리처럼 예리해진 그녀의 눈 앞에 황후의 검게 물든 손이 확장되어 보였다.
“...세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라일리아의 손은 단지 색만 검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은 썩어서 거의 부서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감각을 키운 세리나의 후각에도 썩어가는 라일리아의 육신에서 나는 악취가 깊이 파고들었다.
“내겐 이제 남은 힘이 없어.”
황후는 느긋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한번 자각한 악취는 계속해서 후각을 자극했다. 아마도 저 드레스 안에 있는 육체의 대부분이 썩었을 거라고 세리나는 생각했다. 그만큼 강한 악취가 풍겼다. 악취-시체의 냄새. 움직이는 시체.
“그렇게 경계하지 마라. 내 마지막 길의 길동무로 널 부른 거니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그 길이 어디든, 함께 갈 생각은 없습니다만.”
“네 생각 같은 건 상관 없어.”
라일리아는 썩은 나무둥치 같이 된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 하나가 부서져 나갔다. 그녀는 조금 웃다가 다른 손에 낀 반지를 올렸다. 레너드 볼프가 남긴 힘으로 보호받는 반지 덕에 손은 멀쩡했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포기하세요. 곧 에스트레드님이 오실 겁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자취를 찾아 곧 뒤를 따라 달려올 것이다. 혼자 먼저 온 것은 굳이 그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려는 세리나의 의지였다.
“너는 강한 소드 마스터지.”
황후는 세리나를 훑어보았다. 죽어가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황자비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쳤다. 그녀의 눈길이 마치 물건을 품평하는 것 같아 세리나는 불쾌해졌다.
“금발, 녹색 눈...강인한 육체. 좋은 몸이야.”
라일리아의 말은 기분 좋아 보였다. 황자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죽어가는 몸 안에서 이제 정신도 망가지는 모양이군요.”
“아냐, 그렇지 않아. 정신 지배의 마법사는 미쳐서 죽는 일이 다반사지만 나는 아니야.”
세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후는 정상이 아니어 보였다.
“레드포 로마나는 죽었습니다.”
황자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내 검으로 베었죠.”
라일리아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군, 그러리라고 생각했지.”
“당신의 아들이었으니까 소식은 전하는 겁니다.”
“아들, 그렇지. 아들. 벌써 육체를 몇번이나 갈아타서, 레드포 같은 아들딸은 너무 많아서 말이야.”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밀랍같은 그녀의 얼굴이 우그러지면서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라일리아의 몸은 이제 한계를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