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라일리아가 발을 멈춘 곳은 버림받은 자들의 마을이었다. 에스트레드가 어둠숲의 사냥을 잠시 멈춘 사이, 이곳 방랑자의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군이 있다고 해도 비상시국에 일반 시민들을 지키지 범죄자와 피난민으로 가득한 어둠 숲 마을까지 경비의 손이 닿지는 않는다.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니 일반적인 사람의 경우는 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수의 발걸음에 짓밟힌 것도 방랑자의 마을이 황폐화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이곳의 사람들 자체가 마수화 실험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에스트레드가 어둠숲에서 수없이 사냥했던 마수들은 거의 대부분 이 마을의 거주민들이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로마나 황족들은 상대가 누구든 자신의 적이라면 상관없이 베어버리는 자들이다. 그것이 절대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의 잔인함과 오만함인가. 라일리아는 자신의 길다면 긴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이 되뇌여왔다.
그러나 사실 고민하는 것을 포기한 지는 오래 되었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의 차이처럼, 그녀는 이해를 포기해버렸다. 본능 수준에서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면 상호 이해나 교정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그녀는…
‘나는 초식동물이라기 보다는 시체를 파먹고 사는 시충에 더 가깝지.’
자조적인 생각이었으나 사실이다. 라일리아는 뺨 위로 버석하게 흘러내리는 긴 흑발을 귀찮게 뒤로 넘겼다. 몇가닥이 힘없이 끊어지며 흩어졌다. 생명력이 거의 다해간다는 증거였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몸에서는 에너지가 거의 다 빠져나가 이제 남은 생명력마저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생명력이 바닥난 육체를 뭐라고 부르더라?
‘시체.’
발 밑으로 버석거리며 재가 흩어졌다. 뻑뻑한 관절을 움직이며 황후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 위에서 녹색의 반지가 빛났다.
아버지, 레너드 볼프가 죽어가던 눈동자. 그 눈 한알이 이 반지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마법력과 생명력이 대부분 담겨 있는 반지였다. 사실 반지에서 새어나오는 생명력에 의존하여 이 육신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아주 중요한 일을 해줄 도구였다.
“산기슭, 그 멍청한 마법사의 연구실을 잘도 부숴놓으셨더군요, 아버지.”
그녀는 소리를 내서 반지에 말을 걸었다. 거기에 대답하는 것처럼 녹색의 반지 위로 광채가 희번뜩하게 빛났다. 아직 대낮임에도 방랑자의 마을은 스산했고, 하늘 높은줄 모르고 자라난 어둠숲의 나무들은 햇빛을 대부분 가려 대지가 어두웠다. 그 어둠 안에서 라일리아는 상쾌함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의 상쾌함이라서 그녀는 먼지 섞인 공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콧속으로 재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미 둔해진 후각으로도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다니, 이 마을 주변은 아마 타버린 시체의 냄새로 가득할 것이다.
“내가 계속 이 삶을 이어가는 게 싫으셨나요.”
라일리아가 웃었다. 그 멍청한 제국의 마법사가 모아놓았던 동부 마법사의 시체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마나를 담았던 연못은 연구실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그 연못에 몸을 담그고 잠수해 있었다면 적어도 몇년은 더 버틸만한 마력을 얻었을 터.
멍청한 짓은 그만 해라. 아버지의 꾸짖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환영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 위대한 마법사 레너드 볼프라 할지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으나 에스트레드의 손에 라일리아의 딸이 죽었을 때부터는 아예 돌아나가는 길이 사라져 있었다.
‘레드포는 역시 죽었을까.’
황후는 뒤늦게 찾아온 막내 아들의 생각에 잠깐 멈칫했다. 그녀의 이 육신으로 나은 아들이었다. 절반은 죽은 채로 낳았던, 역시나 절반은 죽은 상태로 살아온 아이. 하지만 영혼과의 연결이 전혀 되지 않은 아들을 정말 사랑하는 것은 무리였다. 레드포를 사랑하긴 했으나 그와의 거리는 멀었다. 라일리아의 진짜 혈연은 에스트레드의 손에 살해당한 그 어린 딸 뿐이었다.
왕국을 짓밟았던 발렌1세, 그리고 그와 똑같이 닮은 얼굴로 마지막 한명의 피까지 빼앗아간 에스트레드 로마나. 그의 손 안에서 빛나던 바다의 눈물이 눈 앞을 스쳤다.
라일리아는 천천히 마을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녀의 긴 드레스 자락 밑으로 새카만 재가 스치고 타다 만 뼈들이 굴렀다. 더러워진 치맛자락을 쥐고 황후는 중얼거렸다.
“내가 돌아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후회같은 건 하지 않는다. 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동시에 동왕국 자신의 사람들이 죽었던 기억도 라일리아의 심연에 쌓였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면 후회같은 건 하지 않겠다. 그리고 지금을 마지막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까지 영혼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황후의 머리 위로 회색의 하늘이 흘렀다. 검은 나무의 그림자들이 바람에 따라 쉴새없이 춤을 추며 낙엽을 굴린다. 검은 머리, 창백한 얼굴, 빛 따위는 돌지 않는 무저갱의 검은 눈. 온통 시체의 재로 더러워진 보라색 치마 자락을 두른 그녀는 죽음의 여왕처럼 보였다.
마녀는 손을 들어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은 마력이 전부 반지로 모여들며 흡수되었다.
“와라, 이곳으로.”
그녀는 꼿꼿이 선 채 마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
‘이곳으로 와.’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세리나는 에스트레드와 함께 움직일까, 아니면 혼자 수색을 떠나볼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내게 와.’
목소리가 다시 속삭였다. 인식하지 못하는 이명 같은 소리였다.
그녀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조용히 궁을 빠져나갔다. 이제 경지에 다다른 소드마스터인 그녀의 발걸음은 일반인들에게 결코 들키지 않는다. 마나로 발 밑에 쿠션을 넣는 바람을 일으키고, 세리나는 아주 고요하게 경비병들 사이를 빠져나가 말에 올랐다. 날씬한 흑마 위에서 그녀는 잠깐 손을 내려다 보았다.
왼손에서 녹색의 반지가 빛났다. 원래 간헐적으로 빛을 내곤 했지만, 세리나는 지금 그 반지에서 유난히 많은 마력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저 편에서, 무엇인가 말할 게 있다는 메시지를.
세리나는 아까부터 묘하게 충동적이었다. 그녀는 시험삼아 자신의 마나를 둘러 손 위의 반지를 격리시켰다. 둥글게 감싸 더이상 흘러나오는 마나가 그녀에게 닿지 못하게 하자 그때 비로소 의심이 더 확실하게 솟아났다. 세리나 자신은 왜 에스트레드와 함께가 아닌 혼자 밖으로 달려나가려 했는가? 그리고 왜 꼭 지금 어딘가로 가야하는지 확신하고 있는가?
‘...정신지배의 마법.’
황자비는 말고삐를 쥐고 생각에 잠겼다. 느슨하게 묶어올린 그녀의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하늘은 흐렸고 날씨가 스산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소를 다시 기억했다. 어둠숲, 방랑자의 마을. 그곳으로 오라는 확실한 메시지.
‘황후가 정신계와 어둠계 마법을 사용한다고 했지.’
마법이 의식에 침투하는 것은 아주 교묘했다. 세리나 자신이 소드마스터 급으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들어갔을 만큼, 정신의 지배는 뱀처럼 그녀의 빈 틈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마도 황제 발렌2세가 당했을 마법이었으니 어지간한 자라면 그대로 손 놓고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황후 라일리아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세리나 리엔이 그녀가 있는 곳, 어둠 숲 방랑자의 마을로 올 것을 원하는.
‘그 말은, 황후가 나에게 볼 일이 있다는 건가.’
바람이 불었다. 메마르고 싸늘한 바람이었다. 세리나는 흰 뺨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동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동북쪽, 어둠숲이 자리한 곳이었다.
에스트레드는 지금 대귀족과 상인들을 설득해 격리조치를 시행해야 했다. 수도에 나타난 또다른 마수들을 사냥하기 위해 기사단을 이끌고 나설 일도 있었다. 그리고 황후 라일리아는 분명히 세리나 자신에게 용건이 있는 것처럼 그녀를 불렀다.
세리나는 허리춤에 매단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입은 매끈하고 간편한 기사단의 제복이 편안하게 몸에 감겼다. 이대로라면 누구와 싸운다 해도 일방적으로 밀릴 일은 없다. 그녀 자신 한몸 탈출 정도야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다.
“싸움을 거는데 피할 일은 아니지.”
피식 웃은 세리나가 말을 출발시켰다. 날씬한 흑마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나는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