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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30화 (130/142)

<-- 역습 -->                조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수도 전역으로 추려진 귀족과 부호들의 명단이 전해졌다. 일단 그들이 가장 큰 위험요소였기 때문에 격리수용이 필요했다.

“황후는 어둠숲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수가 출현하기 시작했을 때 용병 길드는 어둠을 틈타 황제와 황후의 거처를 습격했다. 평상시라면 반역이지만 지금은 반역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상황. 황궁 경비대는 마치 황제와 황후의 안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점차 방위선을 뒤로 물렸다. 그들은 황궁 안에서 황제궁이 아닌 맞은편에 대칭적으로 펼쳐져 있는 황후궁을 막아냈다. 그곳은 동북쪽으로 뒤에 어둠숲을 끼고 있는 방향이었다.

“황후궁에는 개미 새끼 한마리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황제와 황후가 거느린 병력이 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황궁을 호위하는 호위대의 수준이고, 진짜 ‘군대’라고 부를만한 병력은 수도 성벽 근방의 수도방위대에 포진하고 있다. 제국 각 지역의 거점마다 군이 형성되어 있고 지역의 장군들이 있으나, 발렌2세는 계속된 실정으로 지역 유지나 장군들의 신임을 상당히 잃은 상태였다. 선대 황제인 발렌1세의 치세가 끝난 지 이미 1세기가 넘어가고 있었으니 방심을 하면 안되었음에도 발렌2세는 끝내 제국의 통치력을 손에 넣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빛좋은 개살구였지.’

에스트레드는 다소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제국 지배층의 분열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을 것이다. 라일리아 로마나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황실과 수도가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지역의 군대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었다.

유달리 수명이 긴 로마나 황족의 혈통도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고 자리보전을 하니 이 꼴이 나는 노릇이다. 아비와 동생의 끝은 자신의 손으로 내놓고서 에스트레드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황후의 반격이 시원치 않아. 어째서일까?”

황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시큰둥하게 말했다. 곁에 있던 하드레드가 움찔했다. 마치 그의 보고에 대한 불만 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스트레드의 안중에 일개 부관 따위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렸으니 어떤 꿍꿍이일지 아직 모른다고요.”

벡스 레넌은 귀를 후볐다. 아주 오래 살아온 어둠의 마녀. 본래부터 타고난 수명이 긴 로마나 황족조차도 말년이 되어가면 정신의 이상증세를 나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역사가들은 그것을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신의 지나친 축복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무튼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일백년 이상을 살아내는 것에 지대한 고통을 겪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라일리아는…

“지금 그 여자가 몇번 째 몸일까, 대체.”

“한두번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레너드 볼프의 의식이 말했었죠.”

세리나는 손에 낀 결혼 반지, 바다의 눈물을 내려다 보았다. 파란색과 동시에 녹색이 언뜻언뜻 빛났다. 그녀의 흰 손 위로 보석은 은은한 빛을 흘렸다. 두가지 색이 섞인 미묘한 빛 때문에 정말 바닷물이 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레너드 볼프.’

이 반지 역시 그의 조각을 담고 있을 것이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다는 그의 영혼 중 대체 얼만큼을 담고 있을지 혹은 어떤 부분을 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절망과 분노를 지니고 있던 레너드의 영혼.

“이번 일이 끝나면 말이다, 세리나.”

“예, 에스트레드님.”

에스트레드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반짝거리는 결혼반지가 끼워진 아름답고 강인한 그녀의 손. 황자는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대관식에서 쓸 왕관을 의뢰할 건데...언젠가 말했지만, 너에게는 백은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써클렛 형태의 관을 생각해두고 있다. 원래 오베이에게 미리 주문을 해두었지만 장남이 그리 되었으니 아무래도 기일 내에 맞추기는 힘들겠지.”

황자는 마수로 폭주해 사냥당한 오베이의 장남을 생각했다. 안됐다는 생각이 아주 흐릿하게 떠오르기는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최고급의 보석을 선별해내는 것에는 상인 오베이를 따라갈 자가 없었는데 대관식을 위한 왕관에 그의 손길을 받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나에게는 황금이 어울릴 것이다. 네가 내게 어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 자신은 아주 단순한 황금색의 왕관을 쓸 생각이었다. 녹색의 에메랄드를 박은, 아름답고 심플한 관. 핏빛 에메랄드라는 별칭을 지녔던 그의 아내와 닮은 관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신관의 경고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에스트레드 다워서 세리나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신탁은 그의 신관을 통해 에스트레드를 건너뛰고 플라티나에게 황위가 넘어갈 것을 예언했다. 하지만 얼음의 황자에게는 자신이 황위를 받지 못하는 상황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 없는 모양이었다.

“뜻대로, 나의 황제폐하.”

세리나는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곧 밖에서 밀렌이 들어와 상황을 보고했다.

“격리수용 조치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전과 황실을 믿을 수 없다며 황자 전하께 공식적인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알현 요청이라, 태평한 자들이군.”

“현재 황자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명의 방문자 모두 대귀족 가문입니다.”

에스트레드는 팔짱을 끼었다. 그의 앞으로 기어들어오며 알현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다니 과연 제국의 평화가 지나치게 오래되었다 싶기는 했다. 위기의식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는 자들.

“지금 가지.”

황자는 곧장 일어서 문을 나섰다. 그는 세리나에게 손짓했다.

“잠시 쉬고 있어라. 곧 다녀오겠다.”

“예, 에스트레드님.”

곧 그의 호위병과 수행원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시종들이 남아있으려 했지만 그녀는 얼른 손을 휘저었다.

“나가서 부상병을 돌봐라. 내가 시중을 받을 때가 아니니까.”

모두가 나가고 방은 고요해졌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세리나는 소파에 깊이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말끔하고 단정하게 입은 기사단의 제복이 아주 오랜만에 피부에 감기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종아리를 감싼 승마용 부츠의 감촉이 탄탄했다.

수호기사의 덕목 중 하나는 깊은 신앙심도 포함된다. 신을 독실하게 믿고 그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가짐을 곧 수호기사의 신앙심이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자손이라 하는 황족들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리나 리엔에게 가장 모자란 것이 신앙심이었다. 그녀의 에스트레드에 대한 충성은, 신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으니까.

‘-신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도록 둘 수는 없겠어.’

대신관 제너드가 듣는다면 기절할 일이었다. 그녀는 잠자코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이전보다 좀 더 불룩해진 느낌이었다. 아직 배가 불러올 때는 결코 아니건만 그녀의 아이는 도통 일반적인 경우를 따르지 않아서 예상을 할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플라티나.”

세리나는 배를 놀리듯 통통 두드렸다. 그녀 자신의 육신 역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무엇보다 에스트레드와, 그 다음에는 플라티나.

“나 역시 별로 좋은 엄마는 될 수 없겠어.”

그녀는 쓰게 웃었다. 어린 시절 겨우 열네살의 그녀를 이 차가운 황궁에 버려두고 갔던 어머니. 어떻게 북쪽 변방의 가난한 후작가에서 딸을 황궁의 수호기사로 넣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선택했겠지. 어머니 마리아 엔티아스는 결코 물러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좋은 어머니였던 것은 아니다. 세리나는 자신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 같아서 미리 아기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하다, 아가.”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스트레드가 대귀족들과의 줄다리기를 펼치는 사이에 세리나 역시 할 일이 있었다. 그녀는 어둠 숲으로 사라져버린 황후 라일리아를 쫓아갈 생각이었다.

에스트레드를 제치고 플라티나가 제위를 받는다는 건 한가지를 가리킨다. 아기는 태어나고, 그 전에 에스트레드가 사망한다는 것. 그렇다면 세리나는 그 신탁을 바꾸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

라일리아는 움직여지지 않는 발을 애써 끌었다. 그녀의 긴 검은 머리가 바닥에 끌리며 따라왔다. 원래도 말을 듣지 않던 육신은 이제 거의 한계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바다의 눈물들은 전부 사방에 흩뿌리고 왔다. 아버지 레너드 볼프의 영혼이 담긴 보석들은 물 속으로, 땅 속으로 가라앉아 오랜 시간 잠들 것이다. 라일리아가 새로운 몸을 찾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계획보다 너무 빨리 이 몸이 닳아버리긴 했지만.’

아니, 애초에 신생아였던 몸에 영혼을 옮긴 것이 잘못이었을 것이다. 육신과 어긋난 영혼이 그 위에 억지로 올라타는 순간부터 생명력의 소모는 시작된다. 라일리아 로마나의 육체는 이제 거의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동왕국 최후의 마녀가 자신의 마나를 쏟아부어 움직이게 만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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