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습 -->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마수화와 폭주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세리나의 혈액과 페로몬을 매개로 한 추적에 한가닥 기대를 건 채로, 밀렌과 벡스 레넌은 지친 얼굴로 황자궁으로 몸을 이끌었다.
“젠장, 정말 피곤하군.”
벡스가 투덜거렸다. 다행히 두 사람 다 중상은 입지 않았지만 사흘 째 계속된 전투로 인해 모두 지친 상태였다. 신전의 성기사단과 수도방위군이 제대로 협력하여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의 용병길드 역시 게릴라전으로 황후 측 병력을 괴롭히고 있었다.
“최대한 일반 시민들한테는 영향이 안가도록 하고 싶지만 사상자가 상당히 늘었어.”
“한번 마수가 나타나면 수도 안으로 짓밟고 들어와 버리니까. 어쩔 수 없지.”
밀렌은 턱을 매만졌다. 언제나 말끔하던 그의 얼굴에도 눈밑의 그늘과 턱의 수염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의 기사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도 눈의 총기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지. 에스트레드 전하께서 의식이 돌아오셨다고 하니 황자 전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시면 사냥은 훨씬 쉬워질 거야.”
“싸운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기댈 생각이나 하고, 꽤 약한 소리를 하는군 밀렌.”
등 뒤에서 들려온 황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전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에스트레드 전하!”
“왜 그렇게 놀라? 내 궁에 왔으면서.”
은발의 황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의식을 찾은 지 얼마 안되었다는 남자가 멀쩡히 서서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거는데 놀라지 않는 것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반박하지 않고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미 싸우는 데 편한 말끔한 기사용 제복으로 갖춰입은 세리나가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했는데 때마침 들어왔군, 일단 대신관께서 부르시니 그분께로 가보지.”
*****
“참...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2층 대신관의 방에서 네 사람은 그의 입만 쳐다보았다. 난감한 얼굴의 대신관은 황족의 가계도로 쓰였던 가죽을 벽에 걸어두고 일단 그 위를 두드렸다.
“세리나 전하의 혈액에 제 신성력을 더해 추적이 가능한 가계도...아니, 이건 가계도라기엔 조금 이상하군요. 일단 지도라고 하지요. 이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대신관 제너드는 가죽 지도의 한 점을 짚었다. 꼭대기에 세리나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세리나 리엔. 그녀의 이름이 은은하게 빛났다.
“마치 세리나가 시조인 또 하나의 가계도 같은 느낌이군요.”
밀렌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지도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리나는 자신의 혈액을 중심으로 타고 내려간 거꾸로 선 나무 모양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페로몬-농축도니 혈액이나 다름없는-과 같은 성분의 혈액이 이어지고 있는 자들의 이름이 가계도 위로 짙게 새겨져 있었다. 황실의 혈통이 짙은 자들의 이름이 더 크고 짙게 새겨지는 황족의 가계도와 마찬가지의 형태였다.
“제 페로몬이 정말로 마수화에 꽤 도움이 되는 모양이긴 하군요.”
다소 우울한 기분이 되어서 세리나는 중얼거렸다. 그녀 자신의 몸 역시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사실 알 수 없었다. 에스트레드는 그 사실을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세리나 자신 역시 척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은폐하려는 듯 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대상은 아니군요.”
“맞습니다. 이미 사냥이 이루어진 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손가락 한마디 이상의 크기로 이름이 새겨진 자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다행히도 그리 많은 수는 아니죠. 이미 많은 수가 사냥당했기도 하고.”
대신관 제너드는 손가락으로 대상자들을 짚어서 세었다. 불과 십여명에 이르는 숫자였다.
“꽤 많이 잡았군. 능력 좋은데, 자네들.”
“저희들만 움직인 것은 아니니까요. 카스가드 백작과 신관 기사단이 많이 싸워주셨습니다.”
“용병 길드도.”
에스트레드는 피식 웃었다.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이미 사망한 자들의 이름과, 앞으로 ‘관리’를 들어가야 하는 이름들을 살폈다. 그 중 그는 라일리아 로마나의 이름을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황후도?”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황후는 자신의 몸에도 실험을 진행했던 모양입니다.”
“별 짓을 다했군.”
마수는 원래 몸의 능력에 비례하여 강함이 결정된다. 모두의 얼굴이 다소 심각해졌다. 라일리아 로마나가 마수화 한다면 대체 얼만큼의 인명피해가 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에스트레드 역시 썩 마땅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든...이로써 우리가 취해야 할 방식이 정해졌군. 가장 진한 이름으로 나타난 자들을 일단 격리조치 해. 상황 설명은 명확히 하지 마라. 각 가문의 수장, 장남, 영애들이니 이유를 알면 내놓지 않으려고 할 게다.”
“만약 반항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름이 크게 쓰였던 자들은 지금까지 몇 퍼센트나 마수로 발현했지?”
황자가 밀렌을 향해 물었다. 그림자의 기사는 잠시 셈을 한 후 대답했다.
“이미 거의 절반 가량이 발현했습니다.”
“그 이하의 이름에서는 발현이 있었나?”
“없습니다.”
“좋아, 그럼 간단하군. 말을 듣지 않는다면 사냥해라. 마수로 발현한 후 잡든 그 전에 잡든 마찬가지니까. 아니, 그 전에 잡는 게 사실 더 편하겠군.”
자비가 느껴지지 않는 에스트레드의 말을 들으면서 세리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불편한 심경을 아는 황자가 최대한 물러선 것이, 대상자들을 ‘격리’하라는 명일 것이다. 세리나 역시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 대신 조금의 인도적인 방식을 선택해준 황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밀렌과 벡스는 황자의 명을 받들고 곧 방을 나섰다. 너른 2층의 대신관의 거처에는 이제 셋 밖에 남지 않았다. 대신관 제너드는 좀 망설이는 얼굴이 되었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두분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이 상황에서 유일한 황위 후계이시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황제와 레드포 로마나가 사망한 상황에서 황후라는 걸림돌만 제거한다면 에스트레드가 황위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제너드의 얼굴은 그리 확신에 차있지 않았다. 그는 덮수룩한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일전에 신전에 들르셨을 때...제가 보여드렸던 석판을 기억하실 겝니다.”
“계승자를 결국 새기지 못했던 일 말씀이시군요.”
에스트레드는 굳이 에두를 것 없이 곧장 그 일을 끄집어 내었다. 제너드는 주름진 이마를 더 구기면서 수염을 꼬았다. 잘못 들으면 그의 능력 부족을 꼬집는 것 같았지만 황자는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실은...석판 위에 이상한 이름이 나타났습니다.”
“...이상한 이름?”
“저는 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아니 일단 보시는 게 낫겠군요.”
대신관은 한 옆에 부드러운 벨벳으로 덮어놓았던 석판을 꺼내 올렸다. 일견 평범해보이는 검은 석판 위로 선명하게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에스트레드의 눈이 커졌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석판의 글씨를 읽었다.
“플라티나 로마나…”
“그렇습니다. 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군요.”
대신관의 손에서 은은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다시 한번 석판 위의 글씨를 바꿔보려 신성력을 쏟아부었지만 글씨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았다. 그저 빛나기만 하다가 사라지는 신성력을 보면서 세리나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배 위로 손을 올렸다.
황자와 황자비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침묵 후, 황자는 입을 열었다.
“플라티나는...지금 내 비가 가진, 내 딸의 이름이오. 앞으로의 일이 어찌될지 몰라 이름을 미리 정해두었지.”
“....”
대신관은 잠깐 말을 잃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결코 좋은 미래만은 아니다. 플라티나 로마나는 제대로 장성하여 황위를 잇는, 최초의 여황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지금 눈 앞에 있는 에스트레드 로마나가 황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사망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세리나는 황자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황자비의 아름다운 녹색 눈은 단호했다.
“그것이 태양신의 뜻입니까?”
“신성력이 그리 명하셨으니, 신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신의 뜻을 거역하겠습니다.”
“황자비 전하.”
대신관은 불경한 소리를 내뱉는 황자비를 만류했다. 하지만 세리나의 눈은 굳건했다.
“나의 아이도 중요하지만, 황자 전하가 더 중요합니다. 제 목숨을 걸고 지켜낼 겁니다. 신께 맹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