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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27화 (127/142)

<-- 역습 -->                꿈 속에서 에스트레드는 수천번 황제와 레드포 로마나를 베었다. 이성을 잃은 그의 얼음창이 발렌2세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얼음의 황자는 끔찍한 기분으로 계속해서 황제를 살해했다.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도 악에 받친 황제가 울부짖었다.

‘네 여자, 그 계집은 이미 죽어있어. 죽은 계집을 감히 황후로 앉힐 셈이냐!’

황자는 차가운 눈으로 아비를 내려다 보았다. 레드포 로마나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며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 역시 딱히 막내 아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장남을 노려보면서 피거품을 뿜었다. 지나치게 회복력이 좋은 로마니엔의 짙은 피 때문에 그의 몸은 얼음의 창에 뚫린 채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 천한 페로몬에, 그 육신에 속아넘어갔다면...이제 쓸모없어진 그 죽은 몸뚱아리에서 벗어나야 할 게 아니냐!’

아들과 비슷하던 은청색 눈동자에는 핏물이 가득찼다. 에스트레드는 더이상 듣고싶지 않아서 그의 경동맥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극한으로 얇은 얼음의 칼날에 황제의 목덜미가 저며졌다. 피를 뿜으면서 그가 결국 뒤로 넘어갔다.

아무리 재생력이 좋은 로마니엔의 황족이라 한들 호흡을 할 수 없는 데야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에스트레드는 레드포 로마나를 향해 돌아섰다. 막내 동생은 벽에 기대어 선 채 부자간의 참상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태까지 미쳐있었으면서 마지막 순간에 제정신인 척 하고 있네요, 그렇죠 형님?’

갈색 머리의 유약한 청년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대다. 황후의 지배력 하에 있었던 황제는 마지막까지도 이성을 잃고 장남에게 덤벼들었다. 완전히 그녀의 지배 하에 있다기엔 뭔가 통제가 살짝 어긋난 느낌이기는 했지만. 아니었다면 세리나가 죽은 육신이라는 사실을 입밖에 뱉을 리가 없었다.

‘형님,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침착해 보이네요. 괜찮은 거죠?’

에스트레드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말끔히 하나로 묶은 긴 은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지나치게 늙고 이성을 잃은 아비는 장성한 아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세리나 리엔을 생각했다. 황홀하게 퍼지던 그녀의 페로몬이, 어느 순간부터 점차 잦아드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 그의 손 안에서 점점 더 차가워지는 육신과 죽은 듯 잠든 그녀의 굳게 닫힌 눈동자.

하지만 에스트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함부로 적의 말을 믿지 않는 편이지.’

‘아-이런. 맞아요. 나의 형님 에스트레드 로마나 전하께서는 상당히 의심이 많은 편이셨지. 잊고 있었네.’

레드포는 쾌활하게 지껄였다. 황제도, 레드포도, 어느 쪽의 말도 액면 그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에스트레드는 상황 판단을 일단 뒤로 미뤄두었다. 정보 수집이 먼저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뱃속에 타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큭…!’

레드포 로마나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 그의 옆구리로 얼음의 칼날이 깊이 치고 지나갔다. 어떤 선제적인 신호도 없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간신히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면한 레드포가 신음하면서 바닥으로 뒹굴었다.

‘감히 누구더러 죽었다는 건가.’

긴 은발의 황자는 허공에서 얼음의 창을 하나 더 뽑아내어 동생의 몸을 향해 쏘아보냈다. 다급해진 레드포의 손바닥 안에서 피어오른 극염의 불꽃이 방패 형태로 쏘아지며 창을 막아냈고 그 서슬에 막내 황자는 뒤로 다시 뒹굴었다. 얼음과 불이 만나 자욱한 수증기가 순식간에 챔버를 가득 채웠다. 그의 몸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카-악, 퉷.’

먼지와 수증기의 뒤에서 레드포가 피를 뱉는 것이 들렸다. 에스트레드는 공기중에 퍼진 습기를 전부 모아 다시 얼음의 칼날로 회귀시켰다.

‘역시 성격이 거칠어.’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막내 동생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피를 토한 끝이라 입가 전체가 붉었다. 레드포는 킬킬 웃었다.

‘안 그런 척 해도 다혈질이지, 형님. 특히 그 여자에 대해서는 말이야.’

‘알면 입을 다물어.’

‘오, 그럴 수는 없지. 내 옆구리...이 근사한 훈장에 대해서 내 보답을 해야하지 않겠어?’

레드포 로마나의 옆구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장기가 전부 얼어붙었다가 부서져나가 그의 왼쪽 허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당연히 죽었어야 마땅한 상처였다. 에스트레드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언데드인가?’

‘와 그 말은 진짜 좀 상처인데. 내가 이성도 뇌도 곤죽이 된 좀비처럼 보인다는 거야?’

‘죽었어야 하는 몸이 살아있다면 언데드지.’

레드포 로마나는 손 하나를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형수님도 언데드겠군. 그렇지, 형님?’

‘닥치라고 했다.’

다시 한번 얼음 폭풍이 레드포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로 뒹굴며 가슴께까지 부서진 채로 막내 황자가 쉬익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헤...헤헤, 확실히...다혈질…’

‘...’

‘하지만 한가지, 한가지 더…’

레드포 로마나는 바닥을 기며 일어났다. 몸의 한쪽이 날아가 균형을 잡기 힘든 몸으로 기어코 일어서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마치 벌레같았다. 에스트레드는 차가운 경멸을 눈에 담은 채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어머니를 증오해, 형님.’

레드포 로마나는 신나게 웃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여자지, 나의 어머니는. 어떤 능력인지 알아?’

‘...’

‘죽은 자가 죽은 자를 품게 하는 법. 정말 탁월한 솜씨지. 멀쩡한 사람도 지옥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그 솜씨가 말이야.’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일까? 그건, 네 아내가 품은 네 아이조차 이미 사자라는 뜻이야.’

*****

“에스트레드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불러내었다.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 또다시 수천번 째 황제와 레드포 로마나를 살해하던 그 때로 돌아가려던 자신의 의식을, 에스트레드는 그 목소리를 붙들고 간신히 현실로 띄워올렸다. 아비와 동생을 향한 본능적인 살해욕구마저도 그녀의 목소리에 단숨에 잠재워진다.

황자는 천천히 은청색의 눈을 깜박였다.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눈이 시야에 적응하며 초점이 맞춰졌다. 그 앞에서 황금색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세리나 리엔이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리나.”

눈을 감은 게 몇달이나 되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수십년동안 보지 못한 것처럼 새삼스럽게 그립고 사랑스러웠다. 에스트레드는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손 안에 담았다. 아직 차가운 그의 손바닥 안에 세리나가 자신의 뺨을 비볐다. 황자의 손끝에 키스하는 황자비의 입술이 차가웠다.

“내가 대체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얼마 안되셨습니다...이틀이니까, 평소보다는 많이 주무셨지만요.”

별일 아니라는 듯 세리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레드포 로마나와 싸우다가 의식을 잃은 뒤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으니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에스트레드는 한숨을 푹 쉬고 세리나를 끌어당겼다. 이틀이나 잤으니 당연하게도 몸이 다소 뻑뻑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움직였다.

평소보다 힘이 약한 그의 손아귀에도 황자비는 자연스럽게 끌려와 그의 곁에 누웠다.

“그래...아냐. 사정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일단, 잠깐만 이러고 있지.”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품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립던 그녀의 몸이었다. 체향 자체가 거의 사그라든 느낌이라 페로몬은 그의 예민한 코끝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구나, 라는 것을 황자는 다시 한번 느꼈다. 그저 그의 손 안에 잡히는 세리나 리엔이라는 여자의 존재가 소중할 뿐이었다. 싸움과 이틀간의 잠으로 인해 제 기능을 잃은 듯한 몸이 세리나의 존재로 인해 힘을 돌려받는 것 같았다.

황자비의 손이 조심스럽게 에스트레드의 긴 은발을 쓰다듬었다. 의식을 찾은 지 얼마 안되는 황자를 배려한 손길이었다. 에스트레드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품 안에 맞춤하게 들어맞는 세리나의 몸이 축복처럼 안온했다.

“아버지와 레드포를 죽였다.”

오리고기로 아침식사를 먹었다, 라고 하는 것처럼 태연하고 여상한 말투였다. 세리나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예상은 하고 있던 부분이니까.

에스트레드는 세리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맑고 깊은 녹색의 눈동자는 짙은 피로를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청명했다. 틀어올린 황금색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서 그녀의 뺨 위로 흩어졌다. 그 머리카락들을 조심히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주면서 황자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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