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25화 (125/142)

<-- 역습 -->                “대신관께서는…”

세리나는 제너드를 지나치며 말했다.

“일단 가계도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하 계승의 챔버로 가보겠습니다.”

“황자비 전하.”

“위험하니 기사들과 함께 가세요.”

“하지만 황자비 전하께서도 위험합니다. 오히려 지하 챔버가 더 위험할텐데…”

세리나의 손 안 나이프에서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흰 빛의 소드오러가 솟아나왔다. 대신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람의 빛이 스쳤다. 새하얀 검기는 소드 마스터의 증거. 워낙 널리 알려진 일이라 굳이 검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신관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은 슬픔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소드마스터란 대륙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제국의 황자비가 백색의 소드 오러를 뽑아낼 수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소드마스터 한명은 일반 기사들의 군집과도 전혀 다른 궤의 강함을 자랑한다. 후자가 작은 힘이 여럿 모여 함께 움직인다면, 소드마스터는 큰 힘 하나로 중심을 꿰뚫고 들어간다. 어느 모로 봐도 전력으로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는 자들이었다. 기사들은 경외의 시선으로 세리나 리엔의 백색 소드오러를 바라보았다. 검기를 뽑아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클래스에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특성을 나타내는 색색의 오러와 달리 순백색의 소드오러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경지에 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성 기사조차 드문 로마니엔에서 백색 오러를 뿜고 있는 세리나는 거의 인외의 존재처럼 보였다.

“기사들과 함께, 가능한 빨리 가계도를 찾아 황자궁으로 돌아가주세요. 이곳에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답을 듣지 않고 세리나는 그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에두르지 않고 직선으로 신전 1층 홀에서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향했다. 다 헤진 드레스 대신 입은 간편한 승마복과 부츠가 기사였을 당시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황자비와 기사. 하지만 세리나는 그녀 자신일 뿐이었다.

뒤에서 대신관과 기사들은 급히 서둘러 1층 가장 안쪽의 방으로 복도를 뛰어들어갔다. 아마도 그곳에도 죽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리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중앙 계단의 가운데로 피가 흩어져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충분히 죽었을 만한 출혈이다.

계단은 고요했다. 군데군데 켜진 마법구로 인해 충분히 밝았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걸어내려가다가 멈칫했다. 계단 아래쪽으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세리나는 가까이 가서 그의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물론 사망한 상태였다.

죽은 자를 똑바로 눕히고 황자비는 계속해서 걸어내려갔다. 그녀가 일부러 발소리를 죽였는데도 아주 미세한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릴 정도로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인위적인 마법의 불빛조차 위화감이 들었다.

‘...기척은 없어.’

마스터가 되며 얻은 감각을 확장시켰는데도 살아있는 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가지 뿐이다. 모두 죽었거나 아주 잘 숨었거나. 후자라면 세리나를 상회하는 능력의 마스터급 존재가 또 하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지하는 지독히 깊었다. 사흘 전 에스트레드와 황제, 레드포가 함께 들어가던 문을 열고도 계속해서 내려가야 했다. 계단을 돌고 돌아 내려가면서 세리나는 몇 구의 시체를 보았다. 신관들의 시중을 들었을 어린 소년 수련신관과 이곳을 지키던 성기사들. 그 시체들을 주의깊게 살피던 그녀는 한가지 공통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상처들이 불에 타서 전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군.’

날카로운 창으로 심장을 관통당한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처들은 전부 까맣게 타서 오그라들어 있었다.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 마치 그 부분만 일부러 지진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고열로 짧은 시간 바늘처럼 정확하게 열을 가한 것으로 보였다.

시체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내려온 황자비는 챔버의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문 앞에서 죽어 넘어진 성기사의 눈을 감겨주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예상했던 자가 방 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있었다. 세리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드포 로마나.”

*****

어두운 방 안에서 청년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여전히 그에게서는 산 자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왜 진작 몰랐을까. 죽은 자의 비린내가 레드포 로마나에게서 물씬 풍겼다. 아주 오래 전에 썩은 물고기 같은 냄새.

청년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아- 이런. 이제는 전하라는 경칭도 붙여주지 않는 건가요, 형수님?”

“황제를 죽인 반역자에게 경칭 따위는 붙이지 않아.”

세리나는 어두운 방 한구석에 처박힌 은발의 시체를 흘긋 바라보았다. 마스터가 되면서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시력 덕분에 어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렵지 않게 황제의 시체를 알아보았다.

“내가 죽인 거라고 확신하는군요. 하지만 우리는 세명이 들어왔어. 잔인하고 능력있는 그대의 남편이 죽였을 수도 있잖아?”

“나의 남편 에스트레드 전하는 전능하시지만, 얼음의 능력을 지닌터라 아쉽게도 사람을 그슬려서 죽일 수는 없어.”

황제의 등에는 거대한 상처가 나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 주변이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내장이 쏟아져 나왔어야 정상인 바닥에는 그을린 자국만이 남아 있다.

“오, 그렇군.”

레드포는 히죽거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는 유쾌하게 반짝거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미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당신도 다쳤군.”

막내 황자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얼음의 창이 꽂혔던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질척하게 젖은 검은 예복 위를 더듬으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가 힘을 좀 냈나봐. 이런 상처도 다 만들어주고 말이야.”

“죽은 자라서 그런가 별로 아프지는 않은 모양인데?”

“형수님, 죽은 자라고 부르지는 말아줘. 영혼과 육체의 일치감이 남들보다 좀 떨어지는 쪽일 뿐이라고.”

“보통 그걸 죽었다고 부르지.”

유약한 인상의 청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했지만 세리나가 뭐라고 하든 별로 상관은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는 손가락을 딱 부딪히면서 불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작은 불꽃만이 튀고 그마저도 어둠 속에 사그라졌다. 레드포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었다.

“육신이 많이 망가졌나보네, 이것도 안되고. 담뱃불도 못붙이겠는데.”

“이미 죽은 자인데 육신을 갈아타보는 건 어때? 사실 이미 해본 거 아닌가?”

“아, 그 부분은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형수님. 남의 몸을 빼앗아 타고다니는 건 어머니의 악취미지 내가 아니니까.”

시니컬한 세리나의 말에 레드포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는 이미 생사가 모호했던 라일리아 로마나의 육신에서 태어난 자, 날 때부터 죽어서 태어난 자. 영혼을 옮겨갈 만큼 강인한 생명력 같은 건 타고나질 못했지요.”

“그것도 꽤나 조건이 많은 모양이군?”

“당연하지. 나같은 괴물을 만들어낸 내 어머니 같은 여자 정도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짓이지.”

레드포는 경쾌하게 웃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한바퀴를 돌았다. 막내 황자의 등과 배, 다리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관통상과 자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저러고도 살아있을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죽었으니 살아있다는 건 좀 어폐가 있나.’

황자비는 손 안의 나이프를 굴리면서 곰곰히 생각했다. 이대로 레드포 로마나를 사로잡아 끌고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아예 살아나지 못하도록 그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인가. 후자가 더 매력적이었지만 아직 알아내야 할 비밀들이 있었다. 레드포는 거기에 열쇠가 되어줄지도 몰랐다.

레드포 로마나가 비틀거리며 좀 더 밝은 곳으로 다가왔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막내 황자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한가지, 당신한테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

“한 가지만 말고 여러가지를 말해도 좋아. 얼마든지 들어주지.”

“딱 한 가지만.”

난 어머니가 싫어, 정말 싫어. 레드포는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뜻 제정신인 것처럼 보였지만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리나는 혹시라도 그가 이성을 잃고 폭주할 것을 대비해 손안의 나이프를 말아쥐었다. 하지만 황자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 방안에, 산 자의 냄새가 납니까 형수님?”

“나지 않아.”

“왜 일까요?”

“너는 죽은 자니까.”

“아냐, 그게 포인트가 아니야.”

레드포 로마나가 피식 웃었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아직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학생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황제는 죽었으니까 되었어요, 나 역시 죽은 자니까 뭐 그렇다 칩시다. 그럼 그 둘을 제하고 이 방에 남은 것은?”

세리나는 멈칫했다. 둘을 제외하고 이 방 안에는 그녀 자신이 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마.”

“당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잖아, 소드마스터님. 한번 직접 보라고.”

세리나는 약간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감각을 확장했다. 방 안에 자리한 살아있는 인간의 기운은 제로였다. 왼쪽 어깨 뒤의 부상이, 갑자기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욱씬거리며 얼음처럼 차갑게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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