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은의 왕관-123화 (123/142)

<-- 역습 -->                “새로운 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번엔 또 어디야?”

황자궁의 정원에 지친 얼굴로 앉아있던 벡스 레넌은 하드레드의 보고에 버럭 화를 내었다. 그의 곁에서 칼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있던 밀렌 바스트도 지친 얼굴이었다. 주변에 부상병들이 누워있었고 시녀들은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신관과 의료술사들을 도왔다. 지금 현재 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이 에스트레드의 황자궁이었다. 이곳은 아직도 에스트레드의 힘으로 서늘하고 푸른 결계를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따름이었다. 황혼과 그 새벽 사이, 마수는 간헐적으로 수도와 황궁 안에 나타났다. 물론 간헐적이라는 말은 타이밍이 그럴 뿐이었고 한마리를 사냥하는 데 드는 시간은 끔찍할 정도로 길었다. 사냥이 진행될수록 부상당하는 인원이 늘어나서 시간은 더 길어졌다.

‘세리나는 확실히 마스터급에 오른 게 확실하군.’

세리나가 단신으로 슈엔 로마나를 사냥했던 사실을 떠올리면서 밀렌은 혀를 찼다. 혼자 마수를 사냥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에스트레드 로마나 정도였다. 일반적인 인간과 로마나 황족을 비교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잘 아는 밀렌은 세리나가 부럽지도 않았다. 부러울 수준마저 아득하게 지나친 것이다.

“...세리나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인가?”

“그렇습니다.”

“능력 좀 발휘해 보라구, 자네가 부관이었잖아. 전쟁터에서는 그렇게나 세리나의 꽁무니를 따라다녔으면서.”

“...면목없습니다.”

벡스의 투덜거림에 하드레드의 고개가 점점 더 깊이 떨궈졌다. 부상 당한 황자비가 사라져버린 것은 큰일이었지만 벡스와 밀렌은 그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아니, 신경은 지독하게 흔들려 분산되고 있었지만 몸을 그쪽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가장 명망 높은 귀족가, 가장 존경받던 재상, 가장 깊은 황궁에서도 마수가 폭주했다. 그리고 황궁 경비대와 기사단은 전부 황후의 휘하에 있어 오히려 성기사단과 에스트레드 휘하의 기사단, 수도 용병대와 국지전을 벌였다.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카스가드 백작의 수도방위군이 아니었다면 마수를 따로 쫓는 것은 상상도 못할 상황이었다.

“귀천의 분별이 있는 징벌이로구만. 귀한 자들만 벌을 받나.”

벡스가 킬킬 웃었다. 딱히 귀족은 아닌 밀렌도 그 농담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귀천이라기보다는 재력이 기준이겠지. 동방의 차는 매우 비싸서 부자들만 마실 수 있었으니까.”

“그거나 그거나.”

쓸데없이 정확하게 고치는 밀렌의 말에 용병대장이 투덜거렸다. 하드레드는 피로에 쩔어서 움직이지 않으려는 두 사람 앞에서 안절부절했다. 그나마 두 사람이 있어서 폭주한 마수가 수도 시민들을 짓밟는 피해가 최소화 되고 있었다. 이미 수도에는 비상령이 떨어져 많은 수가 대피했지만, 문제는 그 대피소에서도 폭주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동방의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저택 지하에 따로 대피소가 있는 것이 보통이라 일반 시민들이 짓밟힐 위험은 적었다. 다만 그 저택의 사용인들을 보호할 수 없을 뿐이었다.

“신전의 성기사단도 부상자가 늘어나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이제 많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그래서, 이번에는 누군데?”

“...상단 게오르그 소속 오베이 가에서 폭주 개체가 나타났습니다.”

“오, 이런.”

밀렌과 벡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상인 오베이 자신은 아닌가?”

“아닙니다. 그의 장남이라고 합니다.”

에스트레드의 상단에서 가장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이 오베이 가였다. 그 장남이라면 밀렌 역시 몇번 본 일이 있었다. 뚱뚱한 상인 부자는 둘 모두 미식가라서 맛있는 음식이나 음료라면 가리지 않고 즐겼다고 하는데, 아마도 동방의 차가 유행했을 무렵에 누구보다 많은 양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마수보다 거대하고, 가죽이 두꺼워 검이 먹히지 않는 타입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몹시 기분이 더럽게도, 마수는 생전의 원래 특성을 그대로 빼다 박는다. 오베이의 아들은 대식가이며 미식가 답게 덩치가 크고 살이 찐 남자였다. 애초에 특수한 페로몬과 혈액을 기반으로 객체의 특정한 부분을 폭발시켜 마수화하는 종류의 술수라 객체의 특징이 남아있는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었다. 슈엔 로마나처럼 생전의 얼굴이 그대로 머리 꼭대기에 달려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수도 방위군과 황궁 경비대의 상황은?”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전투가 교착상태입니다. 수도방위군이 성벽만 뚫고 들어올 수 있다면 점령은 금방일텐데 수도 내벽 성곽을 아직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겠지.”

끙, 소리를 내며 벡스가 몸을 일으켰다. 결국 움직여야 하는 건 자신들이었다.

‘황자 전하와 황자비 전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이건 승산이 있는 싸움인가.’

이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황후가 주체로 마법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서 시전자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동방의 차가 어디까지 퍼져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상황이 진정된 이후에라도 재력이 있는 자들을 전부 사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하지?”

용병대장이 투덜거렸다.

“에스트레드 전하가 돌아오실 때까지요. 얼마 안남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전하께 맡겨야죠.”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소리군. 세리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전들 압니까.”

퉁명스럽기는. 넋두리를 하려던 벡스는 입을 다물고 검을 허리에 찼다. 순간 밀렌이 고개를 돌려 정원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왜?”

“조용히.”

밀렌은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정원에 기묘한 적막감이 돌았다. 누워서 신음하던 부상병들도, 그 주변을 바삐 움직이던 시녀와 의술사들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밀렌의 민감한 오감에는 마나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고요한 허공 속에 둥글게 마나의 파장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녹색의 환한 빛이 정원 한가운데에 터졌다.

“뭐, 뭐야!”

벡스가 당황해서 눈을 가렸다. 눈이 찢어질 듯 부신 빛무리였다. 정원의 하늘을 가득 채운 진녹색의 섬광이 일순간 사라지고, 밀렌은 재빠르게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았던 그림자를 조심스럽게 치웠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싸쥐고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밀렌은 순식간에 감쪽같이 빛이 사라진 정원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황자 전하, 그리고 세리나.”

그림자 기사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놀람에 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

세리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꽤 요란한 이동이다. 그녀는 품 안에 꽉 끌어안은 에스트레드의 몸을 다시 추스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유일하게 밀렌 바스트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밀렌, 별일 없었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편을 품에 안고 있어 손을 들어올릴 수는 없었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밀렌은 세리나가 끌어안고 있는 황자를 바라보면서 잠시 말을 잃었다가 물었다. 시야를 잃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시 빛에 적응하면서 고개를 들어 황자와 황자비를 알아보았다.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던 부상병들은 그러나 창백하게 정신을 잃고 있는 에스트레드를 알아채고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전하는 어찌 되신 거지?”

밀렌은 주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딱히 답해줄 말이 없어서 세리나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어깨 위로 에스트레드의 긴 은발이 흘러내렸다. 여전히 창백하고 의식을 잃은 채인 남편의 얼굴은 세리나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황자를 믿었지만 그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황자비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을 의식한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괜찮으실거다.’

세리나는 부상당했던 왼쪽 어깨와 등이 욱신거렸지만 참고 황자를 조심스럽게 추슬러 올렸다. 그녀의 근력은 일반인 이상이었지만 에스트레드가 워낙 장신인지라 쉽지 않았다. 곧 정신을 차린 벡스와 밀렌이 다가와 황자를 모셔가도록 지시했다.

“볼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어. 그러니까...공동묘지. 새로 생긴 공동묘지에.”

“...공동묘지?”

의아한 밀렌의 물음에 세리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일 뿐이었다.

“상황은 어때?”

“안좋아. 우려했던대로 계속해서 수도 안에서 마수가 나타나고 있어. 지금도...상인 오베이의 장남이 마수화해서 사냥하러 가던 참이었어.”

“오베이 가의 장남이 말인가.”

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오베이 가라면 상단 게오르그의 돈줄과 상품 공급원을 쥐고 있는 상인 가문이다. 이 가문이 무너지면 당분간 게오르그 역시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수도 전체의 상품 공급에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뜻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니엔을 무너뜨리겠다는 말이로군. 게다가 효과적이야.’

황자비는 한숨을 쉬었다. 벡스는 조바심이 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황자비 전하. 당신이 돌아왔으니 사냥엔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야...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어요? 이대로라면 불안정한 지배층 때문에 나라 전체가 가라앉는다고.”

용병대장은 많이 지쳐보였다. 밀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리나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약간 삐딱한 자세로 서서 나이프를 한손으로 돌렸다. 황자비로서 전혀 격에 맞지 않는 태도였지만 오랜 기사생활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자세였다. 어차피 몸에 걸친 가볍고 얇은 드레스도 밑단이 군데군데 찢어져 품위따위는 거리가 멀었다.

“밀렌, 혹시 지금 대신관은 여기 계신가?”

“태양신의 대신관 말야? 지하 챔버에 계시지. 부상병 치료를 해야하니까…”

“잘됐군. 그분하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무슨?”

세리나는 나이프를 어깨에 두드리면서 몸을 돌려 황자궁 안으로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밀렌과 벡스를 향해 그녀가 피식 웃었다.

“대신관은 황족의 피를 다루어 가계도를 쓰는 분이시지. 마수화의 촉매제로 쓰인 동방의 차가 내 혈액과 동일한 성분이라면, 그 피가 이어지는 흐름도 알 수 있으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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