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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의 왕관-122화 (12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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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할 말을 찾을 수 없어서 세리나는 침묵했다.

[굉장한 아이 아닌가. 훗날의 복수를 위해 제 아비의 영혼을 자신의 손으로 부술 수 있다니.]

볼프의 파편이 웃었다. 세리나는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한 이야기 속 레너드 볼프는 딸을 이해하며 평온을 가장하여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 볼프의 파편은 갈데 없는 증오를 감추지 못했다.

‘파편이기 때문인 것인가.’

의식이 깨져 나가면서 수백 조각으로 갈라진 볼프의 의식들은 완전한 총합인 레너드 볼프 자신의 감정을 균형적으로 갖추지 못한 듯 싶었다. 단편적인 감정, 단편적인 의식.

“그래서, 레너드 볼프여.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세리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해서 물었다.

[어쩌다니, 죽은 자가 뭘 어쩌겠는가. 온전한 영혼도 갖지 못한 자가 대체 뭘 어쩌겠는가.]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어두웠다. 그 안에 숨은 감정을 느끼고 황자비는 말을 건넸다.

“당신의 원한, 당신의 증오는 그대로 둘 생각입니까?”

[어쩔 도리가 없지. 왜, 그대에겐 뭔가 생각이 있나?]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라일리아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나와 손잡아주시오. 나와 나의 남편을 도와준다면 확실한 복수를 약속하겠습니다.”

[호오, 복수라.]

목소리가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세리나는 흔들리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게 나의 딸을 죽이기 위해 제국의 황자비와 손을 잡으라고 말하는 것인가?]

“바로 그렇소.”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닌 건 당신 쪽이겠지. 레너드 볼프의 갈라진 의식이여,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당신이 영혼 깊숙히 느끼는 것은 과연 딸에 대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원한 입니까.”

세리나는 예리하게 물었다. 조각조각 부서져버린 레너드 볼프의 영혼은, 지식이 남아있을 뿐 그 영혼의 감정들은 전부 갈라져버린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지하를 장악하고 있는 건, 원한과 분노와 증오로 똘똘 뭉친 볼프의 의식의 한 조각.

[교활하군 황자비. 내 생각보다 훨씬 교활해.]

레너드 볼프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길게 웃었다.

[나의 지식은 내게 라일리아가 나의 딸임을 알려준다. 레너드 볼프의 영혼의 총합은, 그녀에게 복수를 한다면 극도로 슬퍼할 것도 알려준다. 하지만…]

혼잣말은 곧 외침으로 변했다.

[아아! 하지만 내게는 원한만이 쌓여 견딜 수가 없구나!]

챔버가 무너질듯 우르르 울렸다. 세리나는 나이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만약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쌓인 원한이 광증으로 변한다면 지금 이 챔버에 갇힌 세리나와 에스트레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녀가 미끄러져 내려온 굴의 길이는 상당했다. 아마도 이곳은 캐딜럿의 연구실이었던 공동에서도 가장 밑바닥, 물이 고여있는 지하수층 바로 위일 것이다. 볼프가 미쳐서 이곳만 무너뜨려도 빠져나갈 길 같은 건 없었다.

“적극적인 협조는 원하지 않소. 하지만 당신의 길을 묻고 있는 겁니다, 볼프의 파편. 나와 나의 남편, 황자 에스트레드는 라일리아를 저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저 우리를 방관하면 됩니다.”

[흐...흐흐…]

목소리의 웃음은 흐느낌 같았다. 한동안 그마저 끊어져 적막했던 방 안에 곧 목소리가 대답했다. 감정을 추스렸는지 낮고 안정된 소리였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황자비여, 그대와 그대의 남편의 목적은 제국을 지켜내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라일리아를 미워한들 제국에 대한 원한만 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소.”

세리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했다.

“당신은 볼프 안의 원한, 그것도 딸에 대한 원한을 간직한 파편일 뿐일 테니까.”

[....]

“솔직히 말하십시오. 당신이 진짜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레너드 볼프의 영혼은 수십 수백조각으로 갈라져 터졌다고 했다. 그 중 원한이라는 감정이 통째로 떨어져 나왔다면 이렇게 얌전할 수가 없었다. 제국에 대한 원한, 내부에서 있었던 배신자들에 대한 원한, 그 모든 것 아래에 자그마하게 딸에 대한 원한이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는 이 파편은 바로 그 부분이었을 테다.

[나의 지식은 내가 그대들을 이 자리에서 생매장시키는 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동안의 침묵 후 볼프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국의 몰락을 볼 수 있겠지.]

“그것을 보면 당신의 내면이 기뻐하겠습니까”

[볼프는 기뻐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목소리가 킬킬대며 웃었다. 그가 갑자기 세리나에게 물었다.

[죽는 자는 제국의 몰락 쪽이 몇백배 많겠지. 하지만 우리들이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나, 제국의 황자비?]

“내가 써야한다고 말하면 신경 쓸 겁니까?”

[오, 그건 아니지. 하지만 생각해봐.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비제국인들이 많이 죽어갔는지. 그대 남편의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그 고통들이 증폭되어 갔는지.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나?]

세리나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주군이자 남편인 황자가 누워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고통 받는 영혼이 있었다. 하지만 세리나는 하나의 대답밖에는 낼 수 없었다.

“나는 군인이었고, 지금 또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뼛속까지 군인이군.]

“정당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방식 또한 거부하지는 않겠습니다.”

[잘못되었다면 벌을 받는 게 어떤가? 그게 최소한의 양심 아닌가?]

“잘못되었다면 받겠습니다. 하지만 군인의 삶은 적과 아군으로 나눠집니다. 난 후회가 없습니다.”

세리나는 명확하게 말했다. 그녀의 손으로 거둬간 수많은 목숨들. 비록 그녀가 군인으로써 민간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고수했다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전투를 치르며 죽였던 수많은 목숨들에 대한 벌은, 아마도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그녀 역시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검을 들었던 그 때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스트레드 로마나를 만나고, 그를 지킬 수 있었으니까.

[그 오만 때문에 언젠가 큰코 다칠게야.]

목소리는 여전히 지친 상태였다.

[결국은 권력 싸움이지, 그렇지?]

“어쩔 수 없죠. 나는 지킬 겁니다. 내 남편을 위해서.”

[훌륭한 군인이구 훌륭한 부인이야.]

마지막 말은 조롱조에 가까웠다. 세리나는 아예 침대에 앉아서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남편의 뺨을 만졌다. 밀랍처럼 차가웠지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에스트레드의 속성은 얼음, 그의 능력이 여전히 신체 내부를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라일리아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왔어. 아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목소리가 느리게 말했다.

[나 역시 의지와 힘을 수십조각으로 으깨어 보석에 들어앉은 채 기다려왔어. 하지만 그 덕분에 내 인지는 수백조각으로 깨져버렸지. 이제 내가 무엇인지, 누구였는지 조차 희미해.]

“황후가...그러니까, 당신의 딸이 라일리아의 육체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리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어떤 역사서에도 레너드 볼프의 사랑스러운 딸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나타나있지 않았다. 그저 멸족에 대한 말만 있을 뿐이었다.

[글쎄,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뭐였지? 베스였던가, 줄리아였던가…]

“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겁니까?”

[라일리아가 대체 몇년이나 육체를 갈아타며 때를 기다렸다고 생각하나? 한명이라도 부담이 되는 일을 그애는 이미 일곱명째야.]

“....”

[나는 이제 끝내고 싶어.]

볼프의 파편은 지친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임에도 잠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있었다가 그가 말을 이었다.

[동부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언젠가 그대가 발견한다고 해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남편을 이곳에 두어주지.]

“이미 멸족시켰습니다...삼년 전 내란의 시기에.”

[독립전쟁을 말하는 거군? 아냐, 하지만 아주 작은 혈족의 불씨는 남아있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에 날아가 정착하고 있지.]

세리나는 예상 외의 말에 침묵했다. 만약 에스트레드가 안다면 그들마저 말살시키려 들 것이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곳 어딘가에.]

목소리가 웃었다. 어딘가 제정신이 아닌듯한 웃음소리였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는 것으로.”

[황자비, 아니...기사 세리나 리엔의 이름을 걸고. 맞지?]

“맞습니다.”

[마리아 엔티아스의 딸 답군.]

갑자기 나온 어머니의 이름에 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뭘 물어볼 새도 없이 눈 앞에 녹색의 빛이 터졌다. 시신경이 찢어질듯 강렬한 빛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싸고 몸으로 에스트레드를 보호하는 세리나의 귓가에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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